제129화
그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 이곳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그림 리퍼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들려오는 곳은 보이지 않는 손에 들려있는 낫이었다.
“낫이 말 한 거에요, 지금?”
니엘이 허공에 떠 있는 낫을 보며 물었다.
나는 확인차 낫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으악! 어지럽다! 그, 그만 두지 못 하겠느냐!”
그림 리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낫을 멈추었다.
“맞네.”
“가둔다는게 이런 거였군요.”
이시결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이템 도감에서 가둘 수 있다는 이야기만 읽었을 뿐 정확한 방법은 몰랐다.
“으윽, 네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림 리퍼가 외쳤다.
하지만 이미 놈은 낫 안에 갇힌 상황.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할 건데? 갇힌 몸으로.”
“뭐, 뭐야?”
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낫을 내게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심연의 불꽃을 꺼내어 낫에게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
“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라도 살아있고 싶다면. 낫 하나 쯤 부러트리는 건 레버넌트를 붙잡는 것보다 쉽거든.”
그러자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없었던 것 마냥 놈이 조용해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심연의 불꽃을 거두었다.
물론 그림 리퍼의 낫을 없앨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없앤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이런 놈에겐 이정도는 해줘야 말을 들어먹는다.
놈이 입을 다물자 주변은 조용해졌다.
“간이 시험은 끝난 건가요?”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이네스가 물었다.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했던 그림 리퍼는 낫 안에 갇혔고, 놈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가만히 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구울이 우리에게 물었다.
“놈은 소멸한건가?”
애매한 질문이었다.
지난번에는 놈을 일그러진 공간 안에 집어넣어 소멸시키자 간이 시험이 종료되었다는 안내문이 떠올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 리퍼가 소멸하지는 않은 상태.
낫에 가두어둔 것이 과연 간이 시험의 클리어 조건에 맞는 것인지 조금 의문스럽긴 했다.
“소멸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제멋대로 굴 수 없다는 건 확신할 수 있어.”
내가 그림 리퍼의 낫을 손에 쥐며 말했다.
그러자 그림 리퍼가 분개하며 외쳤다.
“감히 나를 제어하겠다는 말이냐?”
나는 양손으로 가볍게 낫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자.
으득.
“으아아악! 머, 멈춰라! 그, 다, 당연히 제어가 가능하지! 그러니 부러트리지만 말아다오!”
놈이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부탁하는 것 치고는 말이 좀 짧다?”
나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으득.
“끄아악! 자, 잠깐! 져, 졌다! 알겠으니 제발 멈춰다오!”
여전히 말이 짧았다.
으드득.
“아, 아이고,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힘 좀 푸십시오!”
“조심해.”
싸늘한 내 목소리에 그림 리퍼가 금세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알겠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낫을 세워들었다. 그리고는 파수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
네 파수꾼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게이트의 클리어 조건은 파수꾼들을 만족시키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이전에도 레버넌트의 눈에서 붉은 섬광이 사라지자 간이 시험이 종료되었다는 안내문이 떠올랐으니까.
그림 리퍼는 이제 자신의 의사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마음대로 목숨을 수확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더구나 내 명령에 꼼짝 못하는 상황.
‘그런건 더 이상 그림 리퍼라고 할 수 없지.’
놈의 존재 의의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소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곧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해주듯 레버넌트의 붉은 안광이 사라졌다.
[간이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끝났군요.”
이네스가 안내글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니엘이 양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악, 끝났다!”
나는 그녀의 환호성을 들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진행될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죽었던 곳이라 아주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제 괜찮아.’
[출구가 열립니다.]
옆쪽의 공간이 크게 일렁이더니 곧 게이트의 출구가 열렸다.
이번에는 출구를 베어낼 그림 리퍼의 낫도 없었고 우리를 죽게 만들었던 공간의 일그러짐도 없었다.
“출구가 열렸습니다.”
이네스 역시 이제 긴장을 푼 듯 꼿꼿하게 힘을 주고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이예, 나간다!”
니엘이 신이 나서는 출구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 역시 그녀를 따라 출구 앞으로 이동하는데.
“감사한다.”
구울이 파수꾼들을 대표해 우리에게 인사했다.
그들을 돌아보자.
말에서 내려선 듀라한이 우리를 향해 허리를 꾸벅였고 밴시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레버넌트는 안광이 꺼진 탁한 눈으로 가만히 우리를 응시했다.
“잘 있어!”
니엘이 밴시와 파수꾼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는 출구 앞에 섰다.
나는 혹시라도 낫이 제멋대로 움직일까싶어 그것을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잔뜩 기가 죽은 그림 리퍼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니엘과 이네스가 먼저 차례로 게이트를 나갔다.
그 후, 이시결이 내게 손짓했다.
“먼저 가시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제가 먼저 나갔는데 저놈들이 윤도아 씨를 공격이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이시결이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왠 애 취급?’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파수꾼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고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당할 내가 아니었다.
뭐라 한소리 쏘아붙이려던 나는 곧 멈칫했다.
이시결이 입술로 호선을 그린 채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이번 게이트에서 이시결은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전에 나를 밀어내 간이 시험의 게이트를 파악하게 해준 것고 그렇고, 그의 아이템 도감 덕분에 이런 EX급의 아이템 또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벌렸던 입을 꾹 다물고는 혀를 찼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그리고는 그의 말대로 먼저 출구를 통해 게이트를 나갔다.
* * *
윤도아가 간이 시험의 게이트에 입장한 이후.
주선오는 계속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였다.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몸을 가만히 놔두지를 못했다.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거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거나.
그러면서 십분에 한 번 꼴로 바깥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주선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신교진은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신교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야, 이 미친놈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너때문에 나까지 초조해 죽겠네!”
하지만 주선오는 그런 신교진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금까지 했던 동작들을 반복할 뿐.
그에 신교진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주선오를 쏘아보았다.
“와, 진짜 미치겠네. 네가 무슨 주인 잃은 똥개냐? 네가 그렇게 걱정한다고 뭐라도 달라지냐?그냥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좀. 남까지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잠이나 쳐자던가!”
벌떡!
그때 창밖을 바라보던 주선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우씨, 뭐, 뭔데! 때리기라도 할거냐? 어?”
금세 주춤한 신교진이 몸을 움츠렸지만 주선오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주선오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추워죽겠는데 문은 왜…!”
투덜거리던 신교진은 곧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멈췄다.
노을이 진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뭐야….”
주선오의 옆으로 다가간 신교진이 그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주선오는 급하게 책상 위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실시간 방송을 켜자마자 화면에 나온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줄기의 끝.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니엘의 모습이었다.
[속보입니다! 조금 전 간이 시험의 게이트가 있던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져내리더니 시험의 게이트에 입장했던 세계 3위 랭커 독일의 각성자 니엘이 나타났습니다!]
“와, 깬거야?”
신교진이 주선오의 핸드폰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며 물었다.
카메라에 잡힌 니엘의 모습은 입장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별다른 전투의 흔적도 없어보였고 전혀 지쳐보이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오, 니엘이다. 다행히 멀쩡해보이네?”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고, 니엘은 신나게 손을 흔들며 독일어로 무언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뒤이어 이네스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정장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역시 크게 다치거나 한 흔적은 없었다.
이네스는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기자들이 퍼붓는 질문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도아 누나는 안 보이는데? 그 말라비틀어진 놈도 안 보이고.”
신교진이 화면을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화면의 바깥 상황이 보일리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에 시야가 가려진 주선오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보여.”
그리고는 핸드폰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 치사하게! 같이 좀 봐.”
그때 화면 속 니엘과 이네스의 뒤에 있던 빛줄기 안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저게 뭐야?”
기다란 쇠로된 막대 위쪽에 달려있는 기다란 칼날.
“으악!”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신교진이 비명을 내질렀다.
놀란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화면에 담고있던 카메라가 급격히 흔들려 바닥을 비추었고.
[으, 으악! 뭐, 뭐야!]
[꺄악!]
[몬스터?]
기자들의 혼비백산한 목소리와 함께 엉망으로 얽힌 사람들의 발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주선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만 할 뿐 미동없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잠깐만. 저거…!]
[윤도아 각성자입니다!]
그리고 곧 바닥을 비추던 카메라 화면이 크게 움직였고.
그 끝에 윤도아가 나타났다.
“와, 씨! 놀랐네!”
신교진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중얼거렸다.
화면 속 윤도아는 먼저 밖으로 튀어나온 낫을 자신의 뒤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윤도아 각성자!]
기자들의 관심이 모두 윤도아에게 쏠렸다.
[그 낫은 뭡니까? 게이트 안에서 새로 얻게 되신건가요?]
[무사히 간이 시험을 마치고 나오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간이 시험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죠?]
낫의 등장에 혼비백산했던 기자들은 빠르게 윤도아에게 질문을 쏟아부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윤도아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입술 앞에 검지 손가락을 슥 세워보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신교진과 주선오 역시 입을 다물고는 윤도아에게 집중했다.
곧 윤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렸다.
[질문 하나만 받겠습니다.]
윤도아의 입술이 달싹이기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메라의 앞쪽에서도 여러 사람의 손이 번쩍 솟아 올라 윤도아의 얼굴을 가렸다.
잠시 질문을 위해 손을 번쩍 든 기자들을 살피던 윤도아가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윤도아에게 지목을 받지 못한 기자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운좋게 지목을 받게 된 기자가 윤도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간이 시험은 어떠셨습니까?]
그 질문에 방송을 지켜보던 신교진 역시 침을 꿀꺽 삼키며 윤도아의 답변을 기다렸다.
윤도아는 잠시 팔짱을 낀 채 기억을 더듬는 듯 했다.
그리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윤도아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눈이 카메라 너머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교진은 괜스레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곧 윤도아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짤막한 대답에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며 다른 질문들을 쏟아내었지만 윤도아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뭐야. 진짜 별거 아니었나보네.”
신교진이 중얼거리며 응접용 소파로 돌아갔다.
하지만 주선오는 화면에 잡혀있는 윤도아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미묘한 표정.
그는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