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게이트에 입장하자마자 보인 것은 녹빛으로 물든 암석 절벽이었다.
마치 하늘 끝까지 뻗은 거대한 벽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풀이 잔뜩 돋아난 암석 절벽의 꼭대기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 속까지 치솟아 있었다.
“…와….”
고개를 한껏 들어올린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암석 절벽을 올려다보던 윤도빈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협곡이 만들어낸 좁은 길 위 였다.
물론 협곡과 비교했을때 좁을 뿐, 열 명 정도의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었다.
그 길에는 동그란 자갈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발로 자갈들을 슥 밀어보았다. 그러자 안쪽에 묻혀있던 자갈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젖어있어.’
겉으로 드러난 자갈들에는 물기가 없었지만 안에 파묻혀있던 자갈들은 왠지 모르게 젖어있었다.
게다가 왠지 주변에 축축한 공기가 가득했다.
“원래 강이었나?”
함께 젖은 자갈들을 바라보던 윤도빈이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자갈들이 뒤덮인 길을 살폈다.
“어디로 가야하는 거야?”
길은 앞뒤로 이어져 있었지만 모두 방향이 꺾여 있었기에 꼭 협곡 안에 갇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탐지를 이용해 꺾인 길 너머를 살펴보았다.
길은 계속해서 구불구불하게 뻗어있었고 길 외에 탐지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바닥에서 솟아난 바위 덩어리들 뿐이었다.
“글쎄. 길이 딱히 나와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게이트에 입장 전 보았던 정보로는 이 협곡을 무사히 통과하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고 했다.
길을 따라 걸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사히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많은 각성자들이 죽어나간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분명 이 협곡에는 무언가 있어.’
A급 게이트라고 마음을 놓을수는 없었다.
“이럴 때 교진 형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윤도빈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신교진이 있었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그를 따라 갔을 터.
함께 올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어쩔 수 없지. 그냥 가보는 수밖에.”
사실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절벽의 꼭대기로 올라간 후 이동하는 것.
혼자였다면 시도해봤겠지만 도빈이가 함께였기에 나는 그냥 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막 걸음을 떼려는데.
“쿄오.”
뒤쪽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윤도빈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길 위에 놓인 자갈들 뿐.
‘탐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는데?’
나는 다시 한번 탐지를 이용해 자갈 안쪽을 훑었다.
하지만 딱히 눈에 띌만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뭐야? 뭐가 말 하지 않았어, 방금?”
윤도빈이 레부의 팔찌에서 그림 리퍼의 낫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그림 리퍼의 낫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한참동안이나 그 더러운 젤리 속에 갇혀있는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아무래도 교육이 좀 부족했나본데.”
내가 여전히 자갈들을 살피며 한 마디 던지자 윤도빈이 낫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으아아악! 멈춰, 멈추라고! 거 참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렴 숨도 안 쉬어도 되고 물건 뿐인 제가 그런 젤리 안에 갇혀있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요. 흐하하핫!>
그림 리퍼가 빠르게 변명했다.
하지만 그놈의 말 때문에 주변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다.
“시끄러워.”
<옙.>
그림 리퍼가 조용해지자 곧 협곡 안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쿄오오오….”
또 다시 들려온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레부의 말투와 굉장히 비슷한 것이었다.
“누나, 이거…?”
윤도빈도 그것을 느꼈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레부는 분명 심연의 불꽃 안에서 내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빈이에게 멈춰있으라고 손짓한 후 계속해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자갈들을 지긋이 즈려밟기 시작했다.
촤륵.
촤르륵.
그러던 중.
물컹.
뭔가 물컹한 것이 밟힘과 동시에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쿄오오!”
그리고 수십 개의 자갈들이 동시에 위로 치솟았다.
“쿄!”
“쿄옷!”
“뭐, 뭐야?”
뒤에서 놀란 도빈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팔짱을 낀 채 통통 튀어오르고 있는 자갈들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튀어오른 자갈들이 한데 모이더니 곧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반죽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뭉쳐지던 덩어리는 곧 무언가의 형체를 띠었다.
두 다리와 두 팔, 그리고 둥그런 중절모와 지팡이까지. 젤리의 색만 다를 뿐, 레부와 꼭 닮은 생김새였다.
“…슬라임?”
윤도빈이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쿄오. 난폭합니다, 난폭해요! 다짜고짜 그렇게 슬라임을 밟다니 너무 합니다!”
말투까지 레부를 닯아있는 슬라임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슬라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자갈을 밟은 것 뿐인데. 밟히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있던가.”
내 말에 슬라임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쿄, 못된 인간이로군요.”
왠지 레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슬라임은 젤리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대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자기 소개에 나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아이템 보부상인 레부라고 합니다.”
‘사칭범이네, 이거.’
“엥? 레부?”
윤도빈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쿄쿄쿄쿄, 그렇습니다. 혹시 저를 알고 계신가요?”
사칭 슬라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부라면 아주 잘 알고 있지.”
“쿄오, 이거 참 영광이군요! 쿄쿄쿄쿄.”
꽤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진짜 레부가 들어있는 심연의 불꽃이 들썩거렸다.
나는 허리 뒤에 메어둔 심연의 불꽃을 꽉 붙잡아 녀석이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사칭 레부를 보며 모른척 물었다.
“그래서 네가 안내자야?”
내 물음에 사칭 레부가 말했다.
“쿄쿄, 그렇습니다. 저를 이 협곡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칭 레부의 말이 끝나자 자갈밭 위에 글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협곡을 통과하십시오.]
간단한 퀘스트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칭 레부에게 손짓했다.
“안내해.”
“쿄쿄쿄, 이쪽입니다.”
사칭 레부가 우리가 가려던 곳의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윤도빈이 내게 다가와서는 조용히 물었다.
“가만히 있을거야?”
진짜 레부를 꺼내지 않을거냐는 물음 같았다.
“아직까지 우리한테 피해를 준 건 없으니까.”
그 말에 윤도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걸어가던 사칭 레부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쿄,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협곡에는 제가 가진 아이템들을 노리는 몬스터가 많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자갈 모양을 하고 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몬스터가 네 아이템들을 노린다고?”
진짜 아이템 보부상인 레부였다면 몬스터의 표적이 될 일은 없었을 터.
장사 수완이 좋았던 레부는 항상 몬스터들에게 인기 만점인 놈이었다.
“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놈들의 공격을 좀 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쿄쿄쿄.”
사칭 레부가 웃으며 말했다.
“뭐, 좋아.”
우리는 사칭 레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게속 걸어가도 주변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구불구불한 자갈길이 계속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게 지루했는지 결국 그림 리퍼의 낫이 입을 열었다.
<여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곳이네요.>
그러자 앞서 걸어가던 사칭 레부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쿄?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내 대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레부가 우리를 슥 훑어보고는 다시 앞을 걸었다.
나는 도빈이가 들고 있는 그림 리퍼의 낫을 슥 바라보았다.
레부는 EX급의 아이템인 그림 리퍼의 낫을 단번에 알아보았지만, 사칭 레부는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놈은 아마도 레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레부의 명성을 꿰찬 별볼일 없는 슬라임일 것이다.
아이템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레부만큼의 열정도 없어보였다.
‘레부가 본다면 바로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어.’
혀를 내두른 나는 계속해서 사칭 레부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사칭 레부가 멈춰섰다.
길은 여전히 앞으로만 뻗어 있었고 협곡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쿄,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사칭 레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도빈이를 슬쩍 돌아보자 도빈이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쿄오, 뭔가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칭 레부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귀에도 무언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뭐가 날라오는 것 같은데.”
무언가가 떼로 날아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에서 무언가의 실루엣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새떼인가?”
윤도빈이 가늘게 뜬 눈으로 실루엣을 관찰하며 말했다.
펄럭이는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다리를 보니 도빈이의 말대로 새들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때 우리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칭 레부가 외쳤다.
“쿄! 저건 하피입니다!”
“하피?”
하피라면 새의 날개와 다리를 가진 여인 모습의 몬스터였다.
그 말을 듣고보니 구름 속의 실루엣에서 하피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의 절벽 위로 안내문이 떠올랐다.
[약탈자 하피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약탈자 하피 무리에게서 도망치거나 하피 무리를 제압하십시오. 0/20]
“잘 아네?”
내가 사칭 레부를 보며 묻자 사칭 레부가 다시 쿄쿄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많이 오가다보니 잘 알 수 밖에요. 저놈들은 제가 가진 아이템들을 노리는 겁니다.”
나는 다시 구름 속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하피들은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저놈들이 사칭 레부를 공격하려 내려온다면 그것을 막아주면 될 것 같았다.
“잘됐네.”
“쿄? 잘됐다고요?”
“너한테 한 말 아니고.”
나는 도빈이를 바라보았다.
“그거 써보기엔 딱일 것 같은데.”
나는 도빈이의 손에 들린 그림 리퍼의 낫을 가리켰다. 그러자 윤도빈 역시 낫을 바라보았다.
그림 리퍼의 낫은 원하는 곳을 베어낼 수 있는 낫이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하피를 공격하는 것에 그것보다 더 제격인 것은 없었다.
“그렇네.”
도빈이가 조금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그림 리퍼의 낫을 움켜쥐었다.
<오오, 드디어 목숨을 수확할 수 있는 것입니까? 흐하하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림 리퍼의 낫이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사칭 레부가 화들짝 놀라며 윤도빈을 돌아보았다.
“목숨을 수확한다고요? 설마 그건…!”
<이제서야 날 알아보다니. 역시 하찮은 슬라임 놈이구나. 네놈의 목숨은 나중에 수확해줄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아니, 저 슬라임은 수확 안 할 건데.”
윤도빈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안한다고? 그건 조금 아쉽군.>
그림 리퍼가 금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밝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어서 저 하피들의 목숨을 수확하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하피를 베어내는 것을 꽤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도빈이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침 구름 속을 맴돌던 하피들이 하나 둘 구름을 뚫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실전이라 긴장되는데, 조금.”
<흐하핫, 걱정말고 휘둘러라! 내가 어느정도 보정은 해줄 수 있어!>
그림 리퍼의 낫이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에 피식 웃은 윤도빈은 다시 낫을 고쳐쥐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인의 상체를 지녔지만 커다란 날개와 새의 다리를 가진 하피가 우리를 향해 쏟아져내려오고 있었다.
윤도빈이 하피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는 손에 쥔 그림 리퍼의 낫을 수평으로 누이며 옆으로 빼더니.
곧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사악!
그림 리퍼의 낫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반쯤 사라진 낫의 날은 하피들에게 한참 못미친 하늘에서 나타났다.
“어, 어라.”
윤도빈이 당황하며 헛손질한 낫을 거둬들였다.
첫 일격이 허탕을 치자 그림 리퍼가 윤도빈에게 성을 냈다.
<어허! 뭐하는겐가! 조금 더 높이 보고 휘둘러야지!>
“다시 해볼게.”
도빈이가 조금 더 진지해진 눈으로 다시 낫을 휘둘렀다.
사악!
이번에는 거리를 제대로 잰 것 같았다.
하피를 베어내지는 못했지만 하피들의 근처에서 낫의 날이 튀어나왔다.
<다시!>
하지만 여전히 그림 리퍼는 조급했다.
윤도빈 역시 놈의 말에 따라 다시 낫을 휘둘렀고.
세 번째에 드디어, 그림 리퍼의 낫은 하피 하나의 날개를 베어냈다.
<흐하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지!>
그림 리퍼가 굉장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도빈이 역시 성공적인 첫 공격에 웃음을 터트렸다.
“와, 진짜 베였어!”
<어서! 어서 더 베어내라! 빨리 날 더 휘두르라고!>
그림 리퍼가 신이 난 채 외쳤다. 낫에 갇히게 된 신세였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하피들이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 사이 도빈이는 낫을 거둬들인 후 다시 한번 휘둘렀다.
하피들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낫의 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면 맡겨둬도 되겠네.’
도빈이의 공간감은 거의 정확했다. 그림 리퍼의 말대로 놈이 조금씩 보정을 해주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정도 가능 범위가 있을 터. 즉 이렇게 하늘 위의 하피를 정확하게 베어내는 건 다 윤도빈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도빈이가 하피들을 사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칭 레부 역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하피들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사칭 레부에게도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좀 지켜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