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하피 떼는 대략 열다섯 정도 되어 보였다.
하늘이 더이상 자신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놈들은 즉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흐하하하하! 베어라, 베어! 역시 이게 바로 수확의 기쁨이지!>
창공에서 쏟아져내리는 하피들을 보던 윤도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기, 미안한데. 조금 조용히 해줄 수 없겠어? 집중이 안돼서.”
<잔말말고 휘둘러라!>
그림 리퍼의 환희에 찬 외침에 윤도빈은 살짝 한숨을 내쉰 후 낫을 휘둘렀다.
사악!
그림 리퍼의 낫이 부드럽게 허공을 갈랐고 곧 쏟아져내리던 하피 하나가 반으로 갈라졌다.
이제 공간감은 확실히 잡은 것 같았지만 아직 실전에서 쓰일 속도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피들은 금세 우리의 머리 위까지 날아들었다.
놈들의 개체는 생각보다 컸다.
발 한쪽으로 사람 하나는 거뜬히 움켜쥘 수 있을 만한 크기.
“캬아아아!”
하피 하나가 나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이 선 발을 내밀며 다가왔다.
나는 내 앞쪽으로 마나 방패를 만들어냈다.
‘마나 방패.’
촤르륵!
그리고 재게 돌진하던 하피는 마나 방패와 충돌했다.
쿵!
“캬아악!”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하피는 빠르게 몸을 추스르려했지만 내 마나막이 그것의 목을 베어내는 것이 더 빨랐다.
서걱!
“흐익!”
앞쪽에 있던 사칭 레부가 흠칫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입을 틀어막더니 말했다.
“흐, 아, 아니. 쿄오….”
어차피 진짜 레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저놈이 어떻게 놀라든 웃든 내 알바는 아니었지만.
뭔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하피들은 사칭 레부가 가진 아이템을 약탈하기위해 습격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놈들은 사칭 레부가 아닌 우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먼저 하피를 공격했기에 그럴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하피들이 우리를 상대하는 사이에 한 두마리라도 사칭 레부를 공격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칭 레부는 하피가 하나 하나 죽어갈 때마다 젤리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같은 편이구만.’
나는 혀를 내둘렀다.
사칭 레부와 하피는 협력을 맺어 우리를 붙잡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사칭 레부는 하피의 날개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하피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물론 아무런 대가없이 협력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칭 레부는 하피들에게 우리를 식용으로 넘길테니 아이템들만 자신에게 달라고 이야기했겠지.
나는 내 가설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하피들이 바닥으로 내려온 이상 도빈이도 공간을 가르는 용도로 낫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나는 사칭 레부를 주시하며 하늘에 길쭉한 마나창 여러개를 만들어냈다.
“마나창.”
스륵.
스르륵.
마나를 뭉쳐 만든 것이었기에 그것은 사칭 레부와 하피들의 눈에도 보일 터.
나는 가볍게 손을 까닥여 여러개의 마나창을 내리꽂았다.
사악!
삭!
“캬악!”
“캬아아!”
마나창에 꿰인 채 바닥으로 떨어진 하피들의 비명소리가 협곡에 울려퍼졌다.
이제 온전히 움직이고있는 하피는 고작 세 마리.
다른 하피들은 협곡의 자갈들을 붉게 물들인 채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사칭 레부가 외쳤다.
“그, 그만!”
하늘의 하피를 하나 베어낸 윤도빈이 멈칫하며 사칭 레부를 돌아보았다.
“그,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체인데!”
사칭 레부의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나와 윤도빈은 할 말을 잃은 채 놈을 바라보았다.
사칭 레부의 말에 대한 대꾸는 도빈이가 들고 있던 그림 리퍼의 낫에서 튀어나왔다.
<불쌍? 생명체는 죽기위해 살아있는 것이다. 죽음은 피해갈 수 없는 것.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앞당겨서 걱정을 덜어줘야할 것 아니냐. 그러니 내가 저놈들의 목숨을 수확하는 것은 정당하다!>
“뭐라고요?”
사칭 레부도 그림 리퍼의 말에 할 말을 잃은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놈은 결국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는 말했다.
“흐우,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더 이상의 피해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피해?”
윤도빈이 되물었다.
그때 사칭 레부가 형태를 망가트려 바닥으로 축 늘러붙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피융!
위로 튕기듯 솟구친 사칭 레부를 하늘을 날고 있던 하피 하나가 낚아챘다.
젤리로 하피의 발을 감싼 사칭 레부가 외쳤다.
“쿄쿄쿄쿄! 아쉽지만 놀이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뭐야?”
윤도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지금 우리 속인 거지?”
“그런듯.”
우리는 두 마리의 하피와 함께 하늘로 솟아오르는 사칭 레부를 바라보았다.
“쿄쿄쿄쿄!”
사칭 레부의 웃음 소리가 협곡에 울려퍼졌다.
“어디 협곡을 통과해보시던가요!”
“흠.”
살짝 한숨을 내쉰 윤도빈이 다시 낫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낫을 내리 그었다.
사악.
“캭!”
“캬악!”
한 번의 낫질에 두 마리의 하피가 날개를 잃었다. 사칭 레부와 하피 두 마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내가 도빈이를 슥 바라보자 윤도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도망치려는 것 같길래.”
도빈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그림 리퍼의 낫을 사용하는데에는 완전히 익숙해진 것 같았다.
“잘했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채 사방으로 퍼진 젤리를 끌어모으는 사칭 레부를 향해 걸어갔다.
놈은 뭔가 다급해보였다.
“아, 안돼. 빨리 여길 벗어나야….”
“왜? 우리 아이템 뺏어야 하는 거 아냐?”
내 질문에 사칭 레부가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변의 젤리를 끌어모으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이미 다 들켰으니까 헛소리 말고. 하피들이랑 짜고 우리 아이템 빼앗으려고 한 거 아냐.”
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하여간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요! 안그러면 여기는 곧…!”
놈이 점점 안절부절 못하며 외쳤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놈을 바라보았다.
그때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물소리?’
동시에 미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바닥의 자갈들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건….’
쏴아아!
물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닥의 자갈들이 괜히 젖어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물소리가 밀려오는 앞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물소리는 점점 거대해졌고 곧 내 탐지 범위 안에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거대한 물살이 감지되었다.
“누나!”
윤도빈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다급히 나를 불렀다.
곧 앞쪽의 꺾인 협곡의 길을 통해 물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협곡 높이의 절반은 채울 것 같은 거대한 물살은 협곡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흐이이익!”
사칭 레부가 다 수습하지 못한 젤리들을 버리고 빠르게 나를 지나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망할 하피놈들! 아직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데 그걸 열면 어떡하자는거야! 슬라임 살려!”
“누나, 피해야…!”
하지만 이 협곡에 피할 곳은 없었다.
쏴아아아!
해일같은 물살이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 * *
“아, 주선오 씨. 오랜만이네요.”
기관의 엘레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한 여자를 본 주선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서 보았던 사람이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여자가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유지은 경사입니다. 지금은 기관 소속으로 각성자 관련 사건 사고를 담당하고 있고요.”
그제야 유지은의 얼굴이 기억이 난 주선오가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아. 오랜만입니다.”
시작의 날,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쓰고 나타난 윤도아의 신분을 확인해달라며 자신을 불렀던 경찰이었다.
“각성자 관련 사건이면 신수연 각성자 일 때문에 오신겁니까?”
주선오의 물음에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때문인지 그녀의 안색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좀 알아낸 게 있습니까?”
“네. 올라가서 한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지은이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은 도착한 엘레베이터를 타고 기관의 이사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김지석과 함께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김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지은과 주선오를 맞이했다.
둘을 본 남자 역시 슥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지석이 간략하게 소개를 시작했다.
“이쪽은 기관 소속 각성자 유지은 경사님, 개의 이빨 무리 단장 주선오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성위의 수하 단장 김영우 님 이세요.”
주선오는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며 빠르게 김영우를 살폈다.
평범해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하지만 눈에는 경계의 빛이 잔뜩 서려 있었다.
‘신수연 각성자의 죽음이 성위의 수하와 관련이 있다면, 이 사람 역시 연관이 되어 있을 게 분명해.’
김지석이 가볍게 인사를 나눈 셋을 보며 말했다.
“관장님은 일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말씀을 전하게 됐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연락을 받기로는 안세인은 이 문제 때문에 높으신 분들에게 불려간 것 같았다.
“일단 앉으시죠.”
김지석이 셋에게 자리를 권했다.
주선오는 자리에 앉으며 핸드폰을 살짝 확인했다.
새롭게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신수연 각성자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김지석이 김영우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김영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작년에 이어서 각성자가 또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저희와 뜻을 함께 하던 각성자가 죽었어요. 이런 일을 겪으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더군요. 지난번 각성자를 죽였던 그놈이 말입니다. 왜 신수연 각성자가 죽고나서 바로 그놈을 가두지 않은겁니까?”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상당한 적대감이 실려있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유지은 역시 차분하게 대응했다.
“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것도 이해합니다. 저희 역시 단장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고요. 그래서 곧바로 이시결 각성자의 행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김영우는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꼰 채 유지은을 쏘아보았다.
상당히 띠꺼운 그의 태도에 주선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유지은은 계속해서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시결 각성자가 지금 윤도아 각성자의 감시 아래에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김영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지은은 계속 이야기했다.
“신수연 각성자가 사망했을 당시, 이시결 각성자는 윤도아 각성자와 그 동생인 윤도빈 각성자와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그부분에 대해서는 두 분께서 확인해주셨고요.”
하지만 김영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걸 어떻게 곧이 곧대로 믿겠습니까? 윤도아 각성자와 윤도빈 각성자가 공범이라면요. 둘 중 하나 혹은 둘이 함께 이시결 각성자에게 그것을 사주했다면 사전에 입을 맞췄을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주선오가 싸늘한 표정으로 김영우를 바라보았다.
“말이 심하십니다.”
김영우의 시선이 주선오에게 꽂혔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러니 고작 둘의 증언으로는 이시결 각성자가 그 시간에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심한 억측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잠시 김영우와 주선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잠깐만요.”
유지은이 당장이라도 김영우를 칠 것 같은 기세의 주선오를 말렸다.
그리고는 김영우를 보며 말했다.
“그부분에 대해서는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기관에서도 이시결 각성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추적기를 달아놓았어요. 그걸 확인해본 결과 둘의 증언과 이시결 각성자 본인의 말처럼 그 시각에 이시결 각성자는 집에 있었습니다.”
“집에서 살인이 일어났을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김영우는 계속해서 삐딱한 태도를 취했다.
그에 살짝 한숨을 내쉰 유지은이 물었다.
“신수연 각성자가 윤도아 각성자나 윤도빈 각성자, 아니면 이시결 각성자와의 접점이 있었나요? 그렇게까지 주장하시는 걸 보면 무언가 짐작되는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그건 모릅니다.”
김영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유지은은 조금 힘에 부치는 듯 미간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쪽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왜 신수연 각성자를 죽였다는 말입니까?”
김영우는 오히려 유지은에게 되물었다. 그러더니 유지은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다른 각성자가 저지른 짓일지도 모르겠군요.”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주선오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유지은이 재차 물었다.
“대체 어느 일반 사람이 각성자를 죽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각성자가 죽었다면 당연히 각성자 중에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겠지요.”
김영우의 말에 유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번 사건은 이전의 오진서 각성자 사망 사건과는 달라요. 그때 오진서 각성자를 죽인 것이 각성자라고 판단했던 것은 사인이 신경독에 의한 마비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김영우가 말을 멈추고는 유지은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말을 이을 타이밍을 잡은 유지은이 빠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독은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독의 종류였고 그래서 당연히 각성자의 짓일거라 생각을 했던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신수연 각성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신수연 각성자의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에요. 시신이 발견된 비닐에 함께 들어있던 밧줄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 같습니다. 저항의 흔적이 없는걸로 보아 아마 목을 졸릴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을 확률이 크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김지석이 말했다.
“그럼…. 각성자가 아닌 사람이 저지른 짓일수도 있겠군요.”
“네. 그래서 이번에는 일반사람들 역시 수사망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조사하려면 신수연 각성자의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쭤보는건데 혹시 신수연 각성자가 평소에 원한을 살 일 같은 게 있었나요?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십니까?”
유지은의 질문에 김영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모릅니다. 신수연 각성자가 우리와 뜻을 함께 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사생활을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확실히 선을 긋는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원한보다는 다른 것이 조금 짐작가는 게 있습니다.”
그에 유지은이 빠르게 김영우를 돌아보았다.
“그게 뭡니까?”
김영우는 눈을 빛내며 답했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뜻밖의 대답에 주선오와 김지석, 유지은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