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협곡의 길은 하나 뿐이었고 클리어 목표는 협곡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앞이든 뒤든 어느쪽으로 가더라도 협곡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갈 슬라임에게 안내를 시키는 이유는 있었다.
‘아직 하피 무리가 남아있어.’
퀘스트에 나타난 하피의 숫자는 스무 마리 였지만 정작 모습을 보였던 것은 열 다섯이었다.
남은 다섯 마리는 아마도 앞쪽 어딘가에서 수문을 여는 역할을 했을 터.
그 이후에는 다시 둥지로 돌아가 다른 하피들이 전리품을 들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놈은 그 둥지를 알고 있을 거야.’
둥지로 찾아가 남은 하피들을 마저 처리 한다면 상향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거 협곡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는데.”
윤도빈이 그림 리퍼의 낫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자갈 슬라임을 따라 걸은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내 탐지 범위에도 협곡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걸어오는 사이에 우리를 덮쳤던 물살은 잦아들어 더이상 우부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우부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가장 앞에 선 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자갈 슬라임에게 물었다.
“사칭범. 얼마나 더 가야해?”
내 질문에 놈이 나를 흘긋 돌아보았다.
“거, 거의 다 왔습니다.”
자갈 슬라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협곡의 모퉁이를 따라 돌자 앞쪽에 회색빛의 거대한 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우리에게 쏟아졌던 물을 품고 있던 댐이었다.
“오, 저거 댐인가? 저기가 끝인거야?”
윤도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멀리 보이는 댐을 바라보았다.
“저 댐을 지나가면 협곡이 끝납니다.”
자갈 슬라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놈의 뒤를 따라 걷던 모부와 레부가 한 마디씩 던졌다.
“휴. 거짓말이라면 정말 각오해야할텐데 말이죠.”
“쿄쿄쿄쿄, 죽고싶지 않은 이상 그렇게야 하겠습니까?”
두 슬라임의 말에 자갈 슬라임이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
“휴휴휴휴. 그러게 진작부터 착실하게 좀 살지 그랬어요. 왜 남을 사칭하고 그럽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쿄쿄쿄.”
“그쯤하고.”
내 말에 즉시 레부와 모부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하피 둥지는 어디야?”
“…예?”
자갈 슬라임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랑 공모한 하피들, 둥지가 있을 거 아냐.”
“…그, 그건….”
그래도 의리가 있는지 말해주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나는 레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레부가 기다렸다는 듯 몸에서 불꽃을 크게 일으켰다.
“히이익! 위! 위에 있어요!”
그 말에 다시 레부의 불길이 수그러들었다.
자갈 슬라임은 후다닥 왼쪽의 암벽을 향해 달려갔다.
“뭐야, 도망치려는 거 아니겠지?”
윤도빈이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혹여나 놈을 놓칠세라 자갈 슬라임에게 표식을 걸었다.
‘표식.’
그러자 놈의 머리 위에 하얀 빛이 스르륵 떠올랐다.
표식을 단 자갈 슬라임은 암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암벽은 상당히 가파르고 물에 젖어있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나야 뭐 도약을 이용해 금세 오를 수 있겠지만 도빈이가 걱정이었다.
나는 윤도빈을 돌아보며 물었다.
“올라갈 수 있겠어?”
“음….”
윤도빈이 위를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가파른 언덕을 바라보던 녀석이 고개를 비틀었다.
“확답은 못하겠는데.”
“누나가 업어줄까?”
그러자 윤도빈이 정색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미쳤어?”
나는 도빈이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옆에 가만히 서있던 모부에게 말했다.
“모부, 도빈이 좀 도와줘.”
“휴? 알겠습니다.”
모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부는 일단 들어가고. 우부도 팔찌로.”
“쿄.”
고개를 끄덕인 레부가 심연의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지만 우부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우부를 불렀다.
“우부.”
“푸! 우부 팔찌 싫어!”
우부가 반항을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우부를 바라보았다.
윤도빈 역시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우부를 바라보았다.
우부는 꼬리를 바싹 세우고는 앞팔로 바닥을 팍팍 내리치며 말했다.
“우부도 집! 우부도 집 갖고 싶어! 팔찌 별로야!”
‘사춘기라도 왔나.’
나는 쯧 혀를 차고는 지그시 우부를 내려다보았다.
우부가 온 시점은 레부와 모부가 어느정도 내 말을 잘 따르고 있을 때였다. 그랬기에 두 슬라임이 내게 교육을 받는 것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저런 시덥잖은 반항이 가능한 것일테고.
그걸 잘 알고 있는 모부가 웃으며 말했다.
“휴휴휴. 우부가 맞을 때가 됐나보네요, 주인.”
“푸?”
그 말에 우부가 고개를 갸웃하며 모부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우부, 팔찌로.”
살짝 굳은 표정과 낮아진 목소리 톤에 우부는 금세 위축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푸…. 푸우….”
그러더니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우부의 형태가 뭉개졌다. 얼굴만한 물방울로 변한 우부에게 팔을 내밀자 물방울이 팔에 휘리릭 감기며 팔찌의 형태를 취했다.
‘빨리 우부 집도 찾아야겠네.’
한숨을 내쉰 나는 도빈이와 모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모부가 모래의 심장에서 모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륵.
모래의 심장에서 뽑혀나온 모래들은 암벽에 달라붙어 도빈이가 디딜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냈다.
그걸 본 도빈이가 그림 리퍼의 낫을 레부의 팔찌에 밀어넣었다.
<또냐! 또 가두는….>
그림 리퍼가 억울한 외침과 함께 레부의 팔찌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암벽 위의 수풀에 가려 자갈 슬라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식의 하얀 빛이 놈의 위치를 여과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벌써 한 십여 미터는 올라간 것이 굉장히 필사적으로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먼저 간다. 잘 따라와.”
나는 잠시 자세를 낮췄다가 표식을 향해 도약했다.
훅!
훌쩍 뛰어오른 나는 자갈 슬라임이 가려던 길목 앞에 착지했다.
촥!
“흐익!”
자갈 슬라임이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나는 놈을 보며 씩 웃었다.
“어딜 그렇게 혼자 바쁘게 가. 같이 가야지.”
“…흐…, 흐으엉….”
자갈 슬라임이 결국 흐느끼며 눈에서 손톱만한 젤리를 뚝뚝 흘렸다.
난 그런 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우냐?”
“흐어어엉….”
아이템 보부상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은 것 치고는 마음이 많이 약한 슬라임인 것 같았다.
레부와는 다르게 각성자를 처리하는 것은 하피에게 맡긴 이유가 그 때문이리라.
놈은 계속 젤리를 흘리며 열심히 협곡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잡을 곳도 마땅치않아아 보였고 암벽들이 젖어있었기에 잘못 발을 헛디디면 추락사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
나를 감싸쥘 수 있을 정도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조용하게 생성되었다. 나는 그것을 내쪽으로 끌어당겨 손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무언가가 보기에는 허공에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생각보다 안정감이 있었다.
나는 다리를 꼰 채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슬라임의 뒤를 따랐다.
‘처음 해보는데 나쁘지는 않네.’
마나 방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더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많았다.
나는 잠시 아래쪽을 살폈다.
차분하게 위를 살피며 올라오고 있는 도빈이가 보였다. 모부가 계속해서 발판을 잘 만들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며 탐지로 주변을 살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쪽의 암벽에 움푹 패인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은 안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깊숙한 안쪽의 커다란 공간에는 남은 다섯 마리의 하피가 있었다.
‘찾았다.’
나는 씩 웃었다.
자갈 슬라임은 착하게도 그 앞까지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동굴의 입구를 뒤덮은 수풀을 가리켜보였다.
그 수풀때문에 협곡 아래에서 올려다본다면 절대로 이런 곳에 동굴이 있을 거라 생각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염력을 이용해 수풀들을 걷어낸 후 동굴의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축축하네.’
그럼에도 이곳에 둥지를 마련했다는 것은 댐의 수문을 모두 개방하더라도 이곳까지는 물이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자갈 슬라임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혹여나 놈이 올라오는 도빈이에게 허튼짓을 할지도 몰랐지만 도빈이나 모부나 그냥 당하고 있을 놈들이 아니었다.
나는 동굴을 따라 들어가며 안쪽에 있는 하피들의 동태를 살폈다.
조용한 발걸음 때문에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피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다.
“캬캬캬캭!”
“키키킥.”
아마도 신선한 식사를 할 생각에 들떠있는 것 같았다.
동굴의 깊은 곳 공터로 다가갈수록 퀘퀘하고 기분나쁜 냄새가 풍겨왔다.
아마도 이곳에 잡혀왔던 각성자들의 옷가지나 소지품들, 그리고 그들의 잔해가 썩어 문드러지며 풍기는 냄새일 터.
잠시 후 공터에 다다르자 역시나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각성자들의 소지품과 유해들이 보였다.
나는 잠시 그들의 명복을 빌어준 후 팔짱을 낀 채 하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놈들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쯤되면 알아차려줬으면 좋겠는데.”
그제야 하피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잠시 멀뚱히 나를 바라보던 놈들은 곧 먹잇감이 스스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놈들의 자그마했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며 웃기 시작했다.
“캭!”
“캬아아!”
두 마리의 하피가 입안에 감춰두었던 수십 개의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날아들었다.
“미안하지만 너희에게 줄 건 이것 밖에 없다.”
‘마나막.’
얇게 생성된 두 개의 마나막이 내게 달려드는 하피 둘을 세로로 조각냈다.
사악!
놈들은 내게 닿기도 전에 반으로 갈려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제야 뒤에 남아있던 세 하피가 웃음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미 내 세 개의 마나막이 놈들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서걱!
놈들의 목과 몸통이 동굴의 지저분한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툭!
투두둑!
‘싱겁네.’
동굴의 벽면에 알림글이 떠올랐다.
[약탈자 하피 무리를 모두 제압했습니다. 20/20]
[게이트 클리어 보상이 상향됩니다.]
“쿄, 주인.”
레부가 심연의 불꽃에서 쏙 머리를 내밀며 나를 불렀다.
“이곳을 잠깐 훑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그러자 레부가 신이 나서는 바깥으로 퇴어나왔다.
“쿄!”
놈은 작아진 몸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사망한 각성자들의 소지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연락은 없어?”
내 질문에 레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쿄, 없습니다.”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주선오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에 이시결이 성위의 수하 무리에 잠입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여간 행동력은 진짜.’
시차를 생각해봤을때 지금쯤이면 어느정도 결과가 나왔을 것 같았다.
“주변 상황 볼 수 있어?”
“쿄, 연결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데,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
레부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쿄…. 소매에 가려져 있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 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잠입을 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쿄,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저는 본적이 없는 인간같습니다.”
‘아직 잠입 중인가.’
내가 직접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쿄, 갑자기 뒷짐을 지더니 팔찌를 움켜쥐었습니다.”
레부가 연결을 하며 발생하는 열기에, 이시결이 눈치챈 것 같았다.
팔을 뒤로 숨겼다는 건 이 상황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
“연결 끊어.”
“쿄. 끊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시결은 아직까지는 별 일이 없고 정보를 빼내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이시결이 잘 알아오길 바라야지.’
“잘 정리하고 나와.”
나는 다시 동굴 밖으로 이동했다.
이제 클리어 보상도 상향됐겠다 협곡만 통과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난쟁이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게이트를 찾아달라는 것 자체가 조금 애매한 조건이긴 했다.
결론적으로 신교진에게 이득이 될 조건이 걸려있긴 했지만, 그런식으로는 운이 작용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 * *
셔츠 아래에 있던 레부의 팔찌가 열기를 뿜었다.
이시결은 뒷짐을 진 채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타이밍이 별로군.’
얼마 지나지 않아 레부의 팔찌에서 일어난 열기는 가라앉았다.
다행히 눈 앞의 남자는 이시결의 행동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이시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군요, 이시결 씨. 저는 성위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