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잠시 후, 도빈이가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바로 자갈 슬라임에게 안내를 시키려했지만 윤도빈이 지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돼?”
모래 발판을 밟으며 이곳까지 올라오는게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은 협곡의 밑바닥에서 300여 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윤도빈이 체력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신교진이었다면 진작에 나가떨어졌을 높이였다.
하지만 나는 난쟁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상태였고 최대한 빨리 난쟁이에게 광휘의 서리 제작을 요청하고 싶었다.
“바로 가자. 이동시켜 줄게.”
윤도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업느니 뭐라느니 헛소리 하려고?”
“아니.”
나는 살짝 고개를 저은 후 보이지 않는 손 두 개를 만들어냈다.
하나는 조금 전 내가 앉아 올라왔던 정도의 크기였고,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 더 커다란 손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 위에 걸터앉은 후 윤도빈을 바라보았다.
이미 올라올 때 내가 앉아서 허공을 이동하는 것을 보았기에 윤도빈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나도 띄워주겠다는거야?”
그럴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내 눈 밖에 보이지 않으니 잘못하다가는 도빈이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나는 도빈이의 옆에 서있던 모부에게 말했다.
“모부, 모래.”
내 명령에 모부가 모래의 심장에서 모래를 뽑아냈다.
사락.
사르륵.
나는 염력을 이용해서 모래들을 보이지 않는 손 위에 둘렀다.
그러자 모래색의 커다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이건 또 뭐야?”
윤도빈이 기가 막힌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내가 앉으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모래 손 위에 올라가 앉았다.
“신기하네. 나도 탈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에 해주지.”
윤도빈이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새로운 경험에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모부, 사칭범. 올라가.”
내 말에 모부가 훌쩍 뛰어올라 도빈이의 옆에 자리잡았다.
자갈 슬라임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부의 시선에 슬금슬금 모래 손 위에 올라탔다.
막상 그 위에 앉으니 놈도 신기한듯 젤리로 모래 손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안내에 충실해야지.”
그제야 자갈 슬라임이 정신을 차리고는 위를 가리켰다.
“일단 구름 위로 올라가야해요.”
나는 자갈 슬라임의 안내에 따라 보이지 않는 손 두 개를 움직였다.
“우왓!”
갑자기 손이 움직이자 윤도빈이 조금 긴장한 듯 자세를 낮췄다.
안내를 하는 자갈 슬라임과 도빈이를 보이지 않는 손에 태우자 확실히 이동 속도가 빨랐다.
우리는 금세 협곡의 위를 뒤덮은 구름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야를 가린 뿌연 수증기 사이에서 도빈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어렸을 때는 구름 위에 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택도 없겠네.”
그 이야기에 나 역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때 상상했던 것처럼 폭신함과 부드러움 따위는 없었다. 구름은 그저 축축한 수증기일 뿐이었다.
꽤 두터운 구름층을 통과하자 색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 아래쪽이랑은 느낌이 전혀 다른데?”
암벽으로 막혀 있던 협곡과는 다르게 탁 트여있어 답답함이 사라지는 곳이었다.
그 드넓은 공간에는 얇게 깔린 구름 층을 뚫고 내려온 은은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따스한 빛에, 양옆의 암벽 위로 펼쳐진 푸른 초원이 반짝였다.
그리고 우리가 떠오른 쭉 뻗은 구름의 강 끝에는 높이 치솟은 산이 하나 있었다.
우리와 수십 키로 떨어져있는 것 같은 그 산은 얇은 구름위로 치솟아 있었다. 산의 중앙에서 쏟아지는 폭포는 아래의 구름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에 잠시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데 자갈 슬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이에요.”
놈은 구름의 강 왼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암벽 위의 초원 위에 작은 대장간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저기에 난쟁이가!’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대장간으로 향했다.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 역시 얇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폭포 쪽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물줄기가 대장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런 평화로운 풍경을 배경으로 대장간에서 철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깡!
깡!
다행히 대장간의 주인인 대장장이가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대장간에 가까이 갈수록 설레는 나와는 달리 자갈 슬라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며 계속 손가락 젤리를 꼼지락대었다.
대장간 앞에 도착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서 내려섰다.
여전히 자갈 슬라임은 우물쭈물하며 대장간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그런 자갈 슬라임을 지나쳐 대장간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망치질 소리가 뚝 멈췄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대답대신 들려온 것은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였다.
훅!
콰직!
굳게 닫혀있던 대장간의 나무문을 뚫고 튀어나온 것은 날카로운 도끼의 날이었다.
“히익!”
그걸 본 슬라임이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에 이어 안에서 천둥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꺼져라! 무슨 낯짝으로 다시 이곳에 찾아온게냐!”
아마도 문을 두드린 것이 이 자갈 슬라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탐지로 내부를 살폈다.
대장간 안은 지저분했다.
발 디딜 틈 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닥에 무언가 잔뜩 널려 있었고 문 반대쪽에는 벽을 가득메울만한 화로가 있었다.
중앙의 모루 앞에는 땅딸막한 난쟁이가 문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시 한번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꺼지라니까!”
그러더니 이번에는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냅다 집어 던졌다.
나는 슬쩍 옆으로 비켜섰고 빠르게 날아온 망치는 문을 박살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직!
쿵!
“에잉! 이 쓸모없는 놈같으니라고! 네놈 때문에 문이 부서졌으니 고쳐놓고 가라!”
나는 부서진 문 틈 사이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을 툭툭 털고 있는 난쟁이가 보였다.
북실북실하고 희끗한 수염과 뭉툭한 코, 두텁게 치솟은 눈썹과 너저분하게 헝클어진 더벅머리까지. 전형적인 난쟁이의 모습이었다.
나는 구멍을 통해 난쟁이에게 말했다.
“네가 부순 거잖아.”
“으잉?”
내 목소리에 난쟁이 대장장이가 두터운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문을 돌아보았다.
“뭐야. 시부 놈이 아니었어?”
나는 뒤에서 달달 떨고 있는 자갈 슬라임을 돌아보았다.
저놈의 이름이 시부인 모양이었다.
“뒤에 있는데, 그 놈.”
“히익! 그걸 말하면…!”
“뭐야?”
난쟁이가 잔뜩 치켜뜬 눈썹으로 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부서진 나무문을 벌컥 열었다.
어느새 시부는 윤도빈의 뒤에 숨어 있었다.
“이놈 새끼가 왔으면 당장 튀어나와서 머리를 조아릴 것이지 거기에 숨어 있어?”
이 난쟁이는 아무래도 화가 많은 난쟁이 같았다.
결국 시부는 달달 떨며 나와 난쟁이의 앞에 바짝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스승님이 절 워낙 인정해주지 않으셔서….”
시부가 변명했다. 하지만 난쟁이는 더 역정을 내었다.
“그렇다고 화로의 불을 꺼트려? 그게 어떤 불인데! 네놈이 화롯불을 꺼트리고 튄 바람에 더 이상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 수가 없잖아! 결과물이 온통 시덥잖다고!”
난쟁이가 왜 시부를 죽이려드는지 알 것 같았다.
대장장이에게 화롯불은 굉장히 중요한 것. 그런데 시부가 그걸 꺼트리고 튄 것이라면.
나같아도 놈을 갈아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이 나에게는 유리하게 다가왔다.
나는 발을 톡톡 굴러 대장장이의 시선을 내게 돌렸다.
“뭐야?”
여전히 험악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어디 빌어먹을 인간따위가 여기에 발을 들여? 당장 꺼지지 못해?”
역시 다혈질은 종특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대장장이의 눈앞에 심연의 불꽃을 들이밀었다.
“에엥?”
대장장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눈이 몰릴 정도로 심연의 불꽃을 자세히 살피던 대장장이가 곧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네놈. 못난 아우놈이랑 아는 사이냐?”
‘아우놈?’
분명 이걸 만들고 내게 준 건 난쟁이 왕이었다. 난쟁이들 역시 이걸 만든 이가 난쟁이 왕이라는 건 알고 있을 터.
그런데 그런 왕에게 못난 아우라고 부른다면 분명 혈연관계임이 틀림없었다.
“못난 아우? 너 그 술쟁이 형이야?”
난쟁이 왕을 떠올리며 대장장이를 보고 있자니. 1년 전 보았던 난쟁이 왕의 모습과 꽤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외모가 비슷비슷해서 알아보기가 힘드네.’
대장장이와 나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 대장장이 역시 난쟁이 왕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이내 한숨을 푹 내쉰 대장장이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망치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들어와. 못난 아우놈 손님이니 잠깐 쉬었다나 가던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마 대장장이의 목적은 따로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 역시 내 목적이 있으니 나는 별말없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탐지로 보았던대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지저분했다.
바닥에 놓인 것들은 모두 완성에 실패한 무기들이었다. 대충 보기에는 괜찮아보였지만 무언가 조금씩 부족한 느낌.
‘미완성품들이군.’
내 뒤를 따라 스르륵 안으로 들어온 시부가 주섬주섬 대장간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에잉, 쯧.”
그런 시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 대장장이는 모루의 앞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수염 속을 뒤적여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파이프를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내가 쥔 심연의 불꽃에 꽂혀 있었다.
나는 심연의 불꽃을 휙휙 돌리며 말했다.
“심연의 불꽃이 필요할 것 같은데.”
“끄응.”
대장장이가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대장장이의 화롯불은 난쟁이들이 사용하던 심연의 불꽃이었다.
단검인 심연의 불꽃에 담겨 있는 불꽃과 같은 종류의 불.
즉, 이 단검이 있다면 대장장이의 화롯불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씩 웃으면서 물었다.
“줄 수도 있는데 말야.”
그러자 파이프를 뻑뻑 피우던 대장장이의 눈이 번뜩였다.
“그럼 당장…!”
하지만 나는 심연의 불꽃을 뒤로 감추었다.
“대신 나한테 해줄 게 있어.”
“뭣?”
대장장이의 눈살이 확 찌푸러들었다. 영 싫다는 반응이었다.
“별로 불꽃이 필요 없는 모양인데.”
“끄응….”
대장장이가 나를 쏘아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담배 연기가 연거푸 쏟아져 나왔고 계속해서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뚱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게 뭔데. 들어보고 결정하겠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우부.”
하지만 손목에 돌돌 감겨있던 우부는 응답이 없었다. 나는 우부가 듣지 못한건가 싶어 다시 한번 녀석을 불렀다.
“우부.”
그러자 손목에 감겨있던 팔찌가 스르륵 풀리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져내렸다.
몽글몽글한 물방울 모양으로 부풀어오른 우부는 곧 다시 고양이의 형태를 취했다.
누가봐도 토라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우부는 곧 내게 등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탁, 탁.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 행동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흐음?”
대장장이가 팔짱을 낀 채 골이 난 어린 물 슬라임을 바라보았다.
“이 슬라임이 뭐 어쨌다는 거지?”
“아니, 쟤 말고. 우부, 서리 꺼내.”
우부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몸 속에 보관 중이던 서리를 꺼내들었다.
그 투박한 얼음 덩어리를 본 대장장이의 눈이 커졌다.
“…저건…?”
나는 염력을 이용해 우부가 꺼내든 서리를 위로 들어올렸다.
대장장이의 시선이 서리를 따라 움직였다.
“이걸로 광휘의 서리를 만들어 줘.”
“잠시 봐도 되겠나?”
대장장이가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서리를 움직여 대장장이의 앞으로 보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떠 있는 서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윤도빈 역시 대장장이가 살피고 있는 서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저거 컨벤션 경매 때 산 그거야?”
“맞아.”
그러자 도빈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컨벤션 때 이시결과 경합이 붙어 생각보다 더 큰 거금을 주고 산 서리였다.
도빈이에게는 그 거금을 들여 서리를 산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에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었다.
“흐음.”
서리를 살펴보던 대장장이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만드는데 얼마나 걸려?”
하지만 대장장이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광휘의 서리를 만들 수가 없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