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쿠구구구구!
광차가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추락했다.
마나가 있다면 어떻게든 막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수 없었다.
이 추락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밑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높은 높이인지,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했다.
그러려면 시야 확보가 우선이었다.
“레부!”
다급한 외침에 심연의 불꽃에서 레부가 튀어나왔다.
“쿄, 쿄옷? 이게 무슨…!”
허공으로 붕 떠오르던 레부가 황급히 손을 뻗어 심연의 불꽃을 붙잡았다.
추락하는 광차에 타있는 상황에 놀란것 같지만 설명을 해줄 틈은 없었다.
“불!”
“쿄오오옷!”
비명인지 기합일지 모를 소리와 함께 레부가 거세게 타올랐다.
화르르륵!
어두웠던 주변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끊어져 함께 떨어져내리는 낡은 철로. 바닥을 이루고 있던 젖은 흙뭉치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암벽!
“꽉 잡아!”
내 말에 레부와 우부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동시에 나는 광차의 바닥을 박차며 암벽을 향해 도약했다.
훅!
떨어지는 철로의 파편과 흙더미 사이를 지나 암벽의 앞에 도달했을 때.
들고 있던 심연의 불꽃을 암벽을 향해 내리 찍었다.
콰득!
카가가각!
심연의 불꽃날이 암벽에 박히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단검을 암벽에 박아넣는데는 성공했지만 추락하던 속도와 내 무게때문에 쉽사리 멈추지는 못했다.
카가가가각!
심연의 불꽃이 암벽을 가르며 계속 아래로 미끄러졌다.
멈추기 위해서는 속도를 더 줄여야했다.
왼손에 쥐고 있던 광휘의 서리역시 암벽에 찔러넣었다.
콰직!
드드드드!
두 개의 단검이 암벽에 깊숙히 박히자 확실히 추락하던 속도가 줄어들었다.
드드드드…
드디어 추락이 멈췄다.
단검을 박아넣은 이후로 십여 미터를 미끄러져 내려온 후였다.
심연의 불꽃이 지나온 길에 작은 불꽃이 일고 있었고 중간 쯤부터는 광휘의 서리의 길을 따라 얼음이 얼어있었다.
“…쿄, 쿄오오….”
어깨에 매달려있던 레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푸…. 우부 죽는 줄 알았어!”
반대쪽 팔에 매달려있던 우부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살은.”
죽었으면 내가 죽었겠지.
슬라임들은 이곳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지는 않는다. 물론 죽을만큼 아프기야 하겠지만.
암벽에 매달린채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쏴아아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우부가 잘 컨트롤을 한건지 떨어질때도 그렇고 지금도 비를 맞고 있지는 않았다.
발을 디딘 암벽 역시 젖어있지 않았다.
푹!
아래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에 묻혀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떨어졌던 광차가 바닥에 닿은 것 같았다.
소리로 가늠해보았을때 바닥이 그리 깊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레부, 불.”
“쿄오오!”
어깨에 매달린 레부가 밝게 타올랐다. 뜨거운 불은 아니었기에 어깨가 타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약간의 열이 있었기에 차가웠던 몸이 조금은 덥혀지는 기분이었다.
레부의 불에 무저갱같았던 암흑이 밝아졌다.
우리가 떨어지던 통로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그 통로마저도 어느순간 사라지더니 한참 아래쪽에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쿄, 바닥이 보입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빛에 비추어보이는 먼 바닥을 응시했다.
비죽비죽 언덕이 솟아난 바닥이었다. 흙이나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은 아니었다.
‘작은 알갱이들 같은데.’
얼핏보면 모래와 비슷해보였다. 그중 한 언덕에 내가 타고 있던 광차가 처박혀 있었다.
바닥까지의 높이는 대략 500여 미터 쯤 되어보였다.
어쨌든 이곳에 계속 매달려있을수는 없었다.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편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고양이 신의 가호 전용 스킬의 균형감과 유연성을 이용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밑에 깔려있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 역시 충격을 흡수하는데 도움을 줄테고.
하지만 더 편안하게 내려갈 방법이 있었기에 나는 모부를 불렀다.
“모부.”
바지 주머니 속에서 모래가 스르륵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래는 곧 삿갓을 쓴 둥그런 얼굴의 형태를 갖추었다.
“휴휴휴. 재미있어보이는군요, 주인.”
모부의 가느다란 눈이 음흉하게 휘었다. 초반처럼 내게 반항하거나 덤벼들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신경을 긁는 게 있었다.
나 역시 눈을 가늘게 뜬 채 모부를 바라보았다.
“주인 혼자 재미보니까 좀 아쉬운데 도토리들이랑 좀 놀아줄까?”
모부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허튼 소리 그만하고 모래나 뽑아.”
사르륵.
곧바로 모래가 뿜어져나왔다.
모래의 심장 덕분에 모래는 무한정으로 뽑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뽑아낸 모래에 모부가 합쳐진다면 놈이 우리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을 터.
사르르륵.
모부는 바로 내 생각을 이해했는지 어느정도 모래를 뽑아낸 후 그 모래에 섞여들었다.
이전 모부를 얻었던 캐나다의 게이트에서 보았던 것처럼 거대한 모부가 나타났다.
“휴. 내려드릴게요.”
나를 한 입에 꿀꺽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입이 뻐끔거리더니 아래쪽에서 커다란 손이 슥 올라왔다.
암벽에 꽂아넣었던 심연의 불꽃과 광휘의 서리를 회수하며 밑으로 다가온 모부의 손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툭!
모부의 손바닥에 내려서자 우부와 레부 역시 그 위로 자리를 옮겼다. 묵직한 물슬라임이 내려서자 몸이 굉장히 가볍게 느껴졌다.
“휴, 아무 곳에나 내려드리면 되나요?”
모부가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우부가 나름의 센스를 발휘해 모부에게 쏟아지는 비를 막아주었다.
모부의 손이 바닥의 한 언덕에 닿았다.
조심스레 언덕 위로 내려서자 발이 잔해들 속으로 파묻혔다.
촤륵.
촤르륵.
언덕을 이루던 것은 광석의 잔해들이었다. 내 발이 밀어낸 광석의 잔해가 언덕을 따라 스르륵 굴러 떨어졌다.
“푸우! 주인, 우부 묻히고 있어!”
옆에 내려선 우부는 이미 반쯤 광석의 잔해 속에 파묻힌 상태였다. 레부는 불 슬라임이라 그런지 잔해의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우리가 모두 내려서자 모부의 크기가 사르륵 줄어들더니 평상시의 크기로 돌아왔다. 모부 역시 잔해의 위에 온전히 서 있었다.
“휴휴휴. 저는 안 묻히는데요? 우부같은 물슬라임은 이 위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군요. 휴휴휴휴.”
“쿄쿄쿄쿄. 그래갖고 제대로 걸을 수나 있겠습니까?”
위에서는 우부에게 꼼짝도 못하던 레부가 모부의 힘을 얻었는지 함께 우부를 놀리기 시작했다.
목만 내놓고 있던 우부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푸우! 아냐! 우부도 설 수 있어!”
“어디 서보시던가요? 휴휴휴휴!”
“쿄쿄쿄쿄쿄!”
우부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사실 레부나 모부는 우부에게 까불 수 있는 슬라임들이 아니었다. 특히 레부는 잘못 까불었다가는 즉사였다.
아무래도 우부가 더 자라기 전에 충분히 놀려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도토리들의 유치한 장난을 뒤로 하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이곳은 광산의 쓰레기장인 것 같았다. 광석을 가공하고 남은 잔해들과 낡은 채광 도구들을 버리는 곳. 가끔가다 보이는 녹슨 광차와 철로 등이 그 증거였다.
‘그닥 유쾌한 곳은 아니야.’
이런 쓰레기장이라면 분명 이곳에서 일을 하다가 죽은 몬스터들의 사체 또한 버려졌을 것이다.
그런 사체들이 곱게 썩었을리는 없었다.
분명 그 냄새를 맡고 사체를 뜯어먹기위해 몰려온 몬스터들 역시 이곳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
즉 빨리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나 역시 놈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레부. 장난 그만치고 앞장 서.”
아직도 뒤에서 우부를 놀려먹고 있는 레부를 호출했다.
그러자 레부가 후다닥 달려와 내 앞을 걷기 시작했다. 모부도 충분히 우부를 놀려먹었는지 곧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푸우우, 주인. 푸우. 같이 가아. 우부 데려가아, 푸우우….”
뒤에서 서러움이 가득담긴 먹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우부는 광석의 잔해에 묻혀 겨우 귀만 빼꼼히 나와있는 상태였다.
쯧, 혀를 차고는 레부와 모부를 돌아보자. 두 슬라임이 움찔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다시 뒤로 돌아가 우부를 번쩍 들어올렸다. 우부의 천진한 눈망울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푸우우우, 레부랑 모부 미워!”
우부가 후다닥 내 어깨 위로 올라와서 자리를 잡고는 두 슬라임을 쏘아보았다.
‘어렵게 구해온 물 슬라임을 버릴 수도 없고….’
어깨가 묵직해진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길수밖에 없었다.
도토리들이 조용해지자 광산의 쓰레기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빗소리와 이동하기위해 광석의 잔해들을 헤치는 소리만이 공간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촤르륵.
촤륵.
이 쓰레기장은 상당히 넓었다.
밝게 타오르는 레부의 불빛이 간신히 닿는 천장에는 고드름같은 종유석들이 잔뜩 매달려있었다. 군데군데 천장과 바닥을 잇는 거대한 석주들도 보였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을 쓰레기장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정도 앞으로 걸어가자 더이상 비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떨어졌던 그 통로에서만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아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곳은 위쪽의 광산 뿐인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올라가야한다는건데.’
그게 문제였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광산에서 이곳으로 쓰레기들을 버렸다면 그걸 버린 통로가 있을텐데.
아무래도 도약으로 빠르게 이곳을 훑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려면 먼저 어깨를 짓누르는 물 슬라임을 들여보내야했다.
“우부, 팔찌.”
어깨 위의 우부에게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우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또 집을 갖고 싶다며 반항을 했다.
“우부.”
다시 한번 우부를 부르자 우부는 잠시 칭얼거리고는 팔찌의 형태로 돌아갔다.
“모부도 들어가.”
“휴.”
모부는 짧은 대답 후 곧바로 모래의 심장으로 들어갔다.
레부가 살짝 내 눈치를 살폈다. 자신도 들어가야하는건가 싶어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곳을 밝힐 불이 필요했기에 레부는 들여보내지 않았다.
“올라와.”
조금 전까지 우부가 올라와있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레부가 즉시 올라왔다.
나는 심연의 불꽃과 광휘의 서리를 각각 양손에 쥔 후 광석의 잔해들을 박차며 도약했다.
훅!
바닥이 판판하지 않아 도약의 거리는 짧았다. 그래도 걸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훅!
후욱!
하지만 얼마 안가서 도약을 멈추었다.
내가 도약을 한 곳 말고 다른 언덕에서 광석의 잔해들이 우수수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르륵.
사륵.
“쿄….”
조금 전 우리가 떨어지며 일어났던 소란 때문인지 이곳에 있던 몬스터가 깨어난 것 같았다.
어떤 종류의 몬스터일지 몰랐기에 나는 잠시 숨을 죽인채 그곳을 바라보았다.
사체를 먹는 스캐빈저라면 이 쓰레기장에서는 꼭 필요한 놈이겠지만 그닥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순수하게 사체를 먹는 것을 즐기는 몬스터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몬스터들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쫓겨난 경우라면. 매번 죽은 고기만 뜯어먹다가 살아있는 나를 보게된다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사체 대신 싱싱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할 놈들을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생각은 없었다.
사사사삭.
잔해가 흘러내리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러더니 그 잔해 속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
생각치 않았던 의외의 놈의 등장에 나는 두 단검을 살짝 내렸다.
잔해를 뚫고 나타난 것은 60cm정도의 키를 가진 아주 작은 소인이었다.
광부들이 흔히 입는 작업복과 장화, 그리고 머리에는 랜턴이 달린 헬멧까지 쓴 모습.
광산에 사는 요정인 노커였다.
노커 역시 나를 보고 놀랐는지 숨을 한껏 들이켰다.
“이, 이, 인간이다! 헙!”
금세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는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후다닥 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심연의 불꽃을 휘둘러 놈의 접근을 막았다.
“흐이익! 자, 잠깐. 잠깐만! 나, 나 안내자인데!”
심연의 불꽃이 일으킨 불꽃에 놀란 노커가 몇발짝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안내자? 안내자가 왜 여기서 나와?”
쓰레기장은 안내자가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 질문에 노커가 자신도 억울하다는 듯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쥐고는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내 말이, 내 말이! 나도 왜 여기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아니 대체 왜! 여기는 조금만 시끄럽게 굴어도 청소부들이 잡아먹으려드는 무서운 곳이란 말야. 그런데 왜 안내자인 나를 여기에 떨어트렸는지 모르겠어!”
노커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시끄러워서는 안될 곳인데.
그리고 역시나.
쿠구구구구…
잔해의 아래쪽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우, 이런.”
노커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뒤를 부탁해, 인간!”
“쿄? 뭐 저런 놈이 다 있습니까?”
멀어지는 노커를 보며 레부가 중얼거렸다. 나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안내자들은 다 저모양이지?’
한숨을 내쉬고는 멀어져가는 노커에게 표식을 달았다.
어쨌든 저놈이 안내자라면.
밑에서 나타날 청소부를 해치운 후 놈을 쫓아가야했다.
‘빠르게 정리하자.’
간만에 단검의 손맛을 느낄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