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174화 (175/201)

제174화

‘끝이구나.’

나제쥬다는 자신의 죽음을 짐작했다.

핏빛의 가지가 그녀의 목을 죄여왔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나제쥬다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조금전까지만해도, 자신과 함께 싸우던 동료들.

나제쥬다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저들처럼 나뭇가지에 꿰여 매달린건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을 열매처럼 주렁주렁 꿰찬 나뭇가지는 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맛보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뿌리가 거꾸로 매달린 동료의 머리에 박히자. 그는 순식간에 온몸의 피를 빨렸다.

그렇게 바싹 마른 미라가 되자 뿌리는 곧바로 옆의 각성자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다리에 뿌리를 박고, 피를 빨아마신다.

쭉, 쭈욱.

나무 기둥을 타고 피가 흡수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공포를 느껴야 정상이겠지만.

나제쥬다는 공포보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임무를 완벽하지 수행하지 못했어.’

처음부터 이곳에 이런 나무가 있었던건 아니었다.

이 흡혈 나무는 그들이 이곳에서 마주한 10번째 몬스터였다.

이런 보잘것 없는 나무 괴물에게 동료들이 죽어나간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이전의 9번에서 그들의 체력이 모두 바닥났기 때문에.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순전히 나제쥬다의 잘못이었다. 더 강하지 못한 그녀의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옆에 있던 동료의 피를 모두 삼킨 뿌리가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향해 다가왔다.

살아있음을 느낄 마지막 순간.

크게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며 나제쥬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콰각!

갑작스러운 충돌음에 나제쥬다는 눈을 떴다.

‘뭐지?’

반투명한 막 같은 것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굉음.

콰칭!

‘이 소리는…!’

익숙한 소리였다.

자신의 무기인 채찍 연검 우르미가 허공을 찢을 때 일으키는 굉음이었으니까.

나제쥬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번쩍이는 은빛의 칼날이 나제쥬다의 목을 감은 나뭇가지를 내리쳤다.

서걱!

나제쥬다의 목을 감고 있던 가지가 힘없이 풀어졌다.

동시에 계속해서 나제쥬다를 끌어당기던 중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떨어진다!’

덥썩!

누군가 나제쥬다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뭐라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자는 나제쥬다를 붙잡은 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살았어….’

다리에 힘이 풀린 나제쥬다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한번 우르미가 굉음을 일으켰다.

콰칭!

콰광!

나제쥬다가 번쩍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우르미의 하얀 칼날이 춤을 추자.

툭, 투두둑.

핏빛의 가지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우르미는 위험한 무기였다.

사용에 능숙하지 못하면 사용자를 해칠수도 있는 양날의 검.

그런 우르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면 딱 한 명 뿐이었다.

나제쥬다의 시선이 우르미의 시작점을 쫓았다.

그 끝에 그것을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본 나제쥬다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보스!”

나제쥬다가 속한 라자레프 패밀리의 보스. 이고리 유리예비치 라자레프라는 이명을 가진 에이단이었다.

살짝 나제쥬다의 상태를 확인한 에이단은 다시 한번 그녀의 우르미를 휘둘렀다.

콰칭!

매섭게 튀어나간 우르미가 핏빛의 흡혈 나무를 갈랐다.

쩌적, 쩌저적!

핏빛의 나무가 세로로 쪼개지더니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우르미를 거둬들인 에이단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넋을 놓은 나제쥬다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쟈, 괜찮아?”

당황한 나제쥬다는 인사도 잊은 채 물었다.

“…보, 보스가 왜 여기에….”

에이단이 나제쥬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여기서 단원들이 죽어나간다길래 어떤 곳인가 보러 왔지.”

에이단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제쥬다는 얼굴을 굳혔다.

“오지 마셨어야죠! 잘못하다가 보스까지 위험해지시면 어쩌려고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봤는데 또 잔소리야? 걱정마, 나쟈. 든든한 원군을 데려왔거든.”

넉살스럽게 웃은 에이단이 나제쥬다의 어깨를 토닥였다.

“든든한 원군이라니, 무슨…!”

그러고보니 분명 어떤 여자가 자신을 안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제쥬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동양인 여자였다.

까만 머리카락에 짙은 다갈색의 눈동자. 그리고 왠지 익숙한 얼굴.

어디서 본 적이 있나?

하지만 나제쥬다는 동양인 여자와 친분을 가진적이 없었다.

그럼 대체 어디에서 본걸까.

나제쥬다가 멍하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자, 뒤에서 에이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도아라고.”

그와 함께 나제쥬다의 머릿속에 동양인 여자의 얼굴이 확실하게 기억났다.

기사에서 많이 봐왔던 얼굴.

세계 랭킹 1위의 각성자, 윤도아였다!

* * *

틱.

푸른 초원의 바닥에 있던 빛이 하나 꺼졌다.

처음에는 원을 그리고 있던 빛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날때마다 하나씩 꺼지던 불빛은 이제 반원만을 남기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들어 그 원 안에 위치한 사람 크기의 알을 바라보았다.

푸른 초원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붉은 알.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마트료시카의 알.’

러시아의 목제 인형의 이름을 딴 알이었다.

인형 안에 인형이 있고, 그 안에 또 인형이 있는 마트료시카.

알이 깨지면 몬스터가 나타나고, 또 알이 나타나는 것이 마트료시카와 꼭 닮아있었다.

손에 쥔 광휘의 서리를 휙휙 돌리며 마트료시카의 알을 쏘아보는데, 에이단이 다가왔다.

“거 참. 골치 아프네.”

그는 내 옆에 선채 팔짱을 끼고는 마트료시카의 알을 바라보았다.

틱.

또 하나의 빛이 꺼졌다.

“나쟈의 말로는 저 빛이 다 꺼지면 알이 깨질거라더라.”

에이단이 뒤쪽의 여자를 가리켰다.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살핀 정보로는 나제쥬다…, 뭐라는 이름이었는데.

에이단을 보스라고 부르던걸 보니 그의 조직에 속한 일원인것 같았다.

에이단의 손짓에 따라 살짝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에이단의 코트를 걸치고 있던 나제쥬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보지 않을때 내 뒷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나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에이단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하지는 못한 사람같았다.

[나제쥬다 예브게니에브나 소로킨]

다시 봐도 외우기 힘든 이름이었다.

어쨌든 눈산양 신의 가호를 가진 나쁘지 않은 실력의 각성자였다.

홀로 살아남은 것은 다른 단원들에 비해 운이 좋아서인것 같았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마트료시카의 알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열 번 정도 이 짓을 반복했다는데, 나쟈는 처음 이곳에 온 인원이 아니야. 그러니까 처음에는 저 알이 더 컸겠지. 게다가 거기서 나타난 몬스터들은.”

“매번 달랐겠지.”

중얼거림에 에이단이 말을 멈추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본 적 있나봐?”

‘꽤 많이.’

대답은 속으로 삼켰다.

마트료시카의 알은 일종의 키메라였다.

단순한 마트료시카처럼 알이 깨질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크기만 다른 같은 종류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쉬웠겠지.’

저 알에는 알껍질의 갯수만큼이나 많은 몬스터들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까다로운데 몇 개의 알이 존재하는지 짐작할수도 없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마트료시카의 알을 상대하는 각성자들은 절망에 빠지기 일수였다.

틱.

일정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줄어드는 저 빛 때문에 마음편히 휴식을 취할 수조차 없었다.

몬스터를 잡으면 미리 나타나있던 다음 알의 주변에 동그란 빛의 타이머가 생겨나고, 지금처럼 일정 시간이 지날때마다 빛이 꺼진다.

‘그래도 초반에는 이런 시간이라도 있지만….’

알의 크기가 일정 이상으로 작아지고나면, 몬스터를 잡기도 전에 빛의 타이머가 나타난다.

타이머 역시 알이 작아질수록 더 빠르게 흐르고, 타이머의 시간 안에 이전의 몬스터를 잡지 못하면 그 몬스터는 다음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놈과 합쳐져서 기괴한 형태를 취한다.

첫 회귀 전, 마트료시카의 알을 상대하며 보았던 현상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으니, 그곳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천운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틱.

어느덧 빛의 타이머는 4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곧 있으면 저 알을 깨고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나리라.

“어느정도 크기까지 줄어야 끝날지 모르겠군.”

에이단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몰라 탐지로 알의 내부를 살펴보았지만 저것은 생물로 분류가 되기 때문인지 내부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저 알이 저절로 깨지기를 기다리며 하나하나 상대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마트료시카의 알은 각성자의 체력과 지구력, 정신력을 모두 시험했다.

첫 회귀 전에는 그 시험에 당할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휙휙 돌리던 광휘의 서리를 콱 움켜잡았다.

내 손에서 얼굴로 옮겨지는 에이단의 시선이 느껴졌다.

“기다릴 필요는 없지.”

“뭐?”

대답대신 알을 향해 걸어갔다.

에이단이 황급히 나를 쫓았다.

“진심이야? 저걸 부쉈다가 뭐가….”

튀어나올줄 알고?

에이단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가 말을 다 꺼냈다면 나 역시 그대로 받아쳤을거다.

뭐가 튀어나올줄 알고 기다리고 있냐고.

기다리기만했던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에이단은 질문을 바꿨다.

“깰 수 있겠어?”

“안 해봤잖아.”

그래. 내 말대로 시도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깨질지 아닐지는 나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가만히 몬스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생각해보면 좋은 실험 상대가 아닌가.

최대 마나구의 위력을 시험해보기에 말이다.

나는 염력을 이용해 가볍게 주변의 마나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최대 마나 운용 범위 80미터.

그 안의 마나를 차곡차곡 뭉쳐나갔다.

‘이전에 최대로 폭발을 일으켰던게 언제였더라?’

꽤 많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야했다.

마나구는 작은 범위의 마나를 응축하더라도 상당한 폭발력을 자랑했다.

그렇기에 최대 마나 운용 범위의 마나를 응축해서 사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큰 범위의 마나를 응축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전용 특성과 염력의 레벨이 더 높아진다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그러니 이렇게 시간이 있을때만 가능한 실험이었다.

마나를 응축할 시간과 더불어 내가 멀리 도망갈 시간도 필요했다.

80미터의 마나가 응축된 후 폭발을 일으킨다면, 나 역시 그 폭발에 휘말리지 않으란 법은 없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것을 터트릴 방법이 필요했다.

틱.

또 하나의 빛이 꺼졌다.

“너, 갖고 있는 무기 중에 쏠 수 있는 게 있어?”

에이단의 손에 끼어 있는 까만 반장갑을 보며 물었다.

그의 장갑은 그저 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EX급 아이템인 보관의 장갑.

장갑을 낀 채로 붙잡는 모든 것을 장갑 안에 보관할 수 있고, 생각만으로 소환할 수 있는 굉장한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을 거래하는 상인인만큼, 그 안에 굉장한 아이템들을 넣어뒀으리라.

잠시 푸른 눈동자를 굴리던 에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사거리랑 정확도는?”

“문제 없어.”

사거리 따위 무시하고 적중률 보정이 붙은 EX급의 총인 모양이다.

그정도면 충분하다.

에이단은 앞으로 내민 내 손 위에 뭉쳐지고 있는 마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쏘라는거지?”

역시 장사꾼답게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남은 시간 안에 한껏 응축한 마나구를 알 앞에 두고 폭발에 말려들지 않을 정도의 범위까지 물러나는 건 무리였다.

3칸의 남은 빛을 바라보던 에이단이 말했다.

“하나 처리하고 움직이자.”

굳이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단은 뒤로 이동했다.

아직 운용 범위 내 마나구의 응축이 덜 끝나기도 했고 이것을 든 채로 전투를 하는 것은 위험했다.

‘이번 알은 에이단에게 맡겨야겠어.’

생각을 하는데 에이단이 나제쥬다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나제쥬다가 내 손 위에 뭉쳐들고 있는 마나구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모아. 이번건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에이단과 나제쥬다가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

알아서 척척이다.

틱.

빛의 타이머가 모두 꺼졌다.

쩍.

쩌저적.

붉은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제쥬다가 살짝 몸을 떨고는 손에 든 우르미를 고쳐쥐었다.

이미 그 광경을 여러번 보아온 그녀에게는 더욱 긴장되는 순간이리라.

알과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정도.

쩌저적!

빠르게 부서진 알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후두둑.

알이 있던 곳에는 깨지기 전보다 조금 더 작아진 알이 남아 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알껍질들은 서로에게 인력이 작용하는것처럼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붉은 덩어리가 된 그것은 크게 꿀렁이며 위로 치솟더니 곧 거대한 망치를 들고 커다란 뿔을 지닌 소의 모습으로 변했다.

‘미노타우르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미노타우르스는 흉측한 몰골이었다. 마치 거죽을 벗겨놓아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드러나있는 것 같은 모습.

놈의 번들거리는 붉은 눈이 우리에게 꽂혔다.

쿠오오오!

묵직한 포효가 초원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뒤이어.

쿵! 쿵! 쿵!

미노타우르스가 머리의 뿔을 날카롭게 세운채 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