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그날은 도빈이의 생일을 앞둔 주말이었다.
내 생일은 지난 후였고 이미 고급 학용품세트와 귀여운 인형을 선물로 받았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선물을 고르지 못한다는 것에 토라져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동생이 선물을 고르기를 기다리는 것은, 8살의 나에게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아빠아, 나도 저거어!>
결국 나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아 흔들며 떼를 썼다.
<우리 도아는 지난 달에 생일선물 받았는데. 저것도 갖고 싶어?>
아버지가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갖고 싶어. 나 저거 보러 가면 안 돼?>
<그럼 도아야. 도빈이 선물 다 고르면 도아것도 보러 갈까?>
아버지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계속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말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품에 장난감을 한가득 안고 있는 또래 아이들을 보니 더욱 서운해졌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윤도빈은 아직도 선물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나는 부모님의 정신이 도빈이에게 쏠린 사이 그 매장을 벗어났다.
도빈이의 선물을 산 이후에 내것도 사준다고 했으니 미리 인형을 고르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치며 여러 매장들을 둘러보았다.
혼자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몇몇 어른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그럴때마다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원래 가려고 했던 매장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아빠? 엄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으….>
그제야 부모님을 잃어버렸다는걸 알고 울음을 터트리려는데.
쿠궁!
갑자기 흔들리는 건물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진동을 느낀건 나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황급히 자신의 일행을 챙기며 주변을 살폈다.
쿠구구구…!
진동은 더 커졌고 길어졌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백화점을 벗어나려 뛰어가자,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너지겠어!>
<꺄아아악!>
<빠, 빨리 나가!>
<도망쳐!>
<으악! 밀지마요!>
<저리 비켜!>
<으아아아앙!>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 한발이라도 먼저 나가기위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치이고 치여 밀려나다가 결국 근처 매장의 인형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아, 아빠…. 엄마….>
쿠궁! 쿠구구구…!
건물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것처럼 흔들렸다.
비명을 억누르며 인형을 꽉 끌어안았다.
<…아야! 윤…! 어디있어!>
<…아빠?>
멀리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인형들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새 벽과 천장에 수많은 금이 가 있었고 그 사이에서 건물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진 위층의 잔해가 수북히 쌓여있었고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그 사이를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도아야! 윤도아!>
사색이 된채 목청껏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였다.
<아, 아빠!>
인형사이에서 뛰쳐나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도아야!>
나를 발견한 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달려가서 아버지에게 안기자, 아버지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으아아앙, 아빠아!>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내 등을 토닥이던 아버지가 다시 나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다친데 없어?>
내 볼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길에 금세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으, 흐으, 응. 안 다쳤어.>
<그래, 도아야. 이제 괜찮아. 얼른 아빠랑 같이 나가자.>
아버지가 다시 나를 토닥이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출구로 향하는 길 역시 잔해로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엄마는?>
<도빈이랑 먼저 나가셨어. 우리도 얼른 나가…!>
쿠구궁!
콰광!
이번의 소리는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아버지와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의 위쪽 천장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황급히 나를 끌어안으며 몸을 날렸다.
쿠구구궁!
쿠구구구….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버지의 품 속이었다.
아버지는 회색의 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두 눈을 감은 얼굴.
<…아, 아빠. 아빠?>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자.
아버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도아야.>
<아, 아빠. 괜찮아?>
울먹이며 물었다.
아버지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는 괜찮아.>
쿠구구….
흠칫 놀란 아버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왜 그래? 아빠, 빨리 일어나. 나가자. 나 무서워. 나가고 싶어.>
울먹이며 아버지의 팔을 끌어당겼다.
<응, 도아야. 근데 저기, 저거 도아가 좋아하는 인형이네?>
아버지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내가 숨어있던 인형 매장이었다. 바닥에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크고 작은 인형들이 흩어져있었다.
<아빠가 지금 움직이기가 좀 힘든데 도아가 저것좀 가져올래?>
<시, 싫어. 저거 이제 안 갖고 싶어.>
마구 고개를 저으며 아버지의 손을 붙잡았다.
<도아야, 얼른.>
아버지가 흘끔흘끔 천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싫어. 아빠랑 있을거야! 싫어!>
울먹이며 떼를 썼다.
<윤도아!>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라며 아버지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붉어져있는 아버지의 눈시울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도아야. 얼른. 아빠 부탁이야.>
절절한 목소리와 내 볼을 쓰다듬는 손길.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 인형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쿠구구궁!
건물이 또 다시 무너져내렸다.
몸을 웅크리며 인형들 사이에 몸을 파묻고 덜덜 떨었다.
아버지가 와서 나를 안아주기를 바랐지만 조금전 소리를 질렀던 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웠다.
쿠구구구구….
건물의 흔들림이 잠잠해질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속으로 수를 세며 빨리 이 공포스러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셀 수 있는 수를 벗어난지 한참이 되어서야 소리와 진동이 멎었다.
<…….>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주위로 건물의 잔해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빠?>
끌어안고 있던 인형을 그대로 들고 아버지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했지만 무너진 잔해들 때문에 길이 막혀있었다.
손만 통과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구멍 뿐이었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며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아빠? 아빠. 어딨어? 아빠?>
잔뜩 쌓인 콘크리트의 밑으로 익숙한 거친 손이 보였다.
<…아빠?>
앞으로 쭉 뻗어있는 그 손을 보고 나도 모르게 구멍 안으로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아빠. 아빠!>
아버지의 손가락을 잡고 마구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다.
<아빠….>
그러자 아버지의 위에 쌓여있던 콘크리트들이 흔들리며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흠칫 놀라며 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계속 아버지를 부르며 구멍을 통해 그 손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고, 무서웠다.
그래서 다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지만.
아버지의 손은 차디찼다.
흠칫 놀라며 손을 거두고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걸.
건물이 무너질것을 예상한 아버지는 나라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이 구조를 하러 올 것을 알고 나라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인형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했다는걸.
건물의 잔해 속에 갇혀있는 하루동안, 계속해서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잔해 속에 있는 아버지의 손이 내게 다가왔다.
<도아야. 아빠 좀 꺼내줄래?>
<아빠 너무 힘들어.>
<모든게 아빠를 짓누르고 있어.>
<아빠 좀 도와줘.>
<그러게 왜 아빠 말을 안 들었어.>
<아빠가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동생 선물사고 네것도 사준다고 했는데.>
<왜 아빠 말을 안들어서 아빠를 죽게 만들었어?>
<윤도아.>
<네가 아빠를 죽게 했어.>
<너만 아니었어도 아빠는 죽지 않았어.>
<너만 아니었어도.>
<너 때문에.>
<네가.>
<내가.>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어도.>
<아빠는 나 때문에 죽었어.>
<아빠를 죽인건 나야!>
<다 내 탓이야!>
<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나 때문이라는 그 죄책감이, 내 눈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는 충격이 나를 끊임없이 심연 속으로 끌어당겼다.
아래로, 계속 아래로.
어둠 속으로.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깊숙하게.
아래로.
…….
….
“윤도아 씨.”
덜컥.
어둠을 뚫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심연 속으로 떨어지던 몸이 멈추었다.
“뭘 하고 있습니까?”
나른함과 한심함이 뒤섞인 목소리.
이시결이 나를 깨웠다.
* * *
“…으윽…!”
유지은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오른쪽 다리는 부러져 기이하게 뒤틀려있었고 한쪽 눈은 크게 베이는 바람에 뜰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일어나야했다.
뭐하는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이 물러서게 되면 이곳에 있는 수감자들이 모두 풀려나버린다.
그거야말로 놈들이 노리는 것이었다.
유지은은 바닥을 더듬어 놓쳤던 철편을 쥐었다.
그때 까만 구둣발이 그녀의 철편을 짓밟았다.
콰직!
흠칫 놀란 유지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움직이는건가?”
앞에 쪼그려앉은 남자가 손을 뻗어 유지은의 목을 거칠게 붙잡아올렸다.
“큭!”
까만 마스크와 내리쓴 모자의 틈으로 사납게 번뜩이는 눈빛이 유지은을 향했다.
목을 죄어오는 그의 손에 숨이 막혀왔다.
“다리 하나로는 부족했나보군. 사지를 다 부러트려야 멈추겠어.”
유지은이 피묻은 손을 들어올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콰득!
손톱을 세워 그의 팔에 상처를 내려했지만 불가능했다.
그의 드러난 피부 전체에 덮여있는 푸른 빛이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미 실패한 시도를 여러번 한다는건 그만큼 네가 멍청하다는 걸까. 아니면 그마저도 높게 평가해야하는걸까.”
혀를 내두른 그가 유지은의 목을 놓았다.
“컥! 콜록! 콜록!”
바닥에 떨어진 유지은이 목을 움켜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어떻든 상관없지만.”
그가 들고 있던 검은색의 두꺼운 막대기 같은 것을 들어올렸다.
팔뚝 길이와 비슷한 그것의 끝을 잡고 훅 털자.
촤르륵!
반대편 끝이 갈라지며 철로 된 살을 가진 부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아냐.”
잠시 펼쳐진 철선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철선을 접었다.
촤륵, 탁!
“역시 자르는 것보다는 부러트리는게 낫지.”
“뭐 하는 거야? 시덥잖은 장난 그만하고 빨리 와서 이거나 부수지 못해?”
멀리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남자의 미간이 확 찌푸러들었다.
“하,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하네.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아주 기어오르지? 내가 네 명령 듣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남자가 옆을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유지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를 둘러싼 푸른 빛가루는 상처를 막아주지만 그 충격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한눈을 파는 사이 기습으로 충격을 준다면, 놈을 무력화시킬수도 있으리라.
유지은의 한쪽 눈이 번뜩였다.
‘기습!’
두 팔과 한쪽 다리를 이용해 바닥을 박찼다.
“!”
하지만 어느새 유지은의 앞은 텅 비어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잡힌 푸른 나비.
‘…저건…!’
팔랑.
신비한 푸른빛의 날개가 팔랑이며 유지은의 앞을 벗어났다.
‘푸른빛!’
뒤로 향하는 나비를 놓치지 않기위해 유지은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물러난 나비가 단번에 커지더니 조금전 자신의 앞에 서있던 남자가 되었다.
그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들고 있던 철선을 내리쳤다.
유지은은 반사적으로 양팔을 겹쳐 앞으로 내밀었다.
퍽!
우득!
철선이 내리쳐지며 유지은의 양팔을 부러트렸다.
털썩!
“컥!”
바닥으로 내리쳐진 유지은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이 제일 싫더라.”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접힌 그의 철선이 유지은을 내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