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와장창!
갑자기 깨어진 창문에 유지은을 내려치려던 철선이 멈추었다.
그 틈에 재빨리 몸을 굴린 유지은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어졌다.
이제 성한건 왼쪽 다리 뿐이었지만 그대로 있을수는 없었으니.
“뭐야!”
다시 멀리서 날카로운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남자가 입을 열어 채 대꾸를 하기도 전에 깨진 창문 너머에서 흙더미가 쏟아져내렸다.
스스스스스….
지하도 아닌데 자연적으로 흙이 흘러들 일은 절대 없었다.
남자가 철선을 펼쳐들고 경계를 하는 것을 보니 저들과 한패는 아니었다.
‘그럼 누가…!’
스스스슥.
안으로 흘러든 흙들은 위로 솟구치며 남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더러운건.”
남자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철선을 휘둘렀다.
촤악!
철선에서부터 일어난 날카로운 바람이 흙을 갈기갈기 찢었다.
흩어진 흙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시 뭉쳐 솟아오르며 남자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
발목을 잡힌 남자가 급히 흙을 털어내며 뒤로 물러났지만, 흙은 끈질기게 그를 쫓았다.
“쳇.”
가볍게 혀를 찬 그가 유지은을 쏘아보며 말했다.
“운좋네, 너. 뭐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살아남아봐.”
말을 마친 남자가 곧 푸른색의 가루로 변했다. 흩어진 푸른색의 가루는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흙을 피해 스르륵 창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이런, 놓쳤네!”
창문을 훌쩍 넘어 나타난건 한 여자였다.
깔끔한 정장차림에 여성용 로퍼를 신고, 짧은 단발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여자.
공식적으로 인사를 나눈적은 없었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땅의 지배자 무리 단장 심지원!’
기관 소속의 각성자도 아니었고 경찰 쪽과도 크게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의아한 찰나.
흙을 타고 바닥에 내려선 심지원이 유지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곧바로 출발한다고 했는데 늦었네요.”
“…여길 어떻게…?”
의심스러웠다.
수감소가 습격당한 것은 고작해야 한 시간 전. 벌써 이 일이 매스컴을 타기라도 한걸까.
그런 유지은의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녀에게 다가온 심지원이 살짝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주선오 씨랑 함께 왔거든요. 자세한 설명은 그분한테 들으세요. 저는 도망가려는 놈들 좀 잡고 올게요.”
빠르게 이야기한 심지원이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자 그녀의 발밑을 맴돌면 흙더미가 사방으로 훅 흩어졌고, 심지원 역시 그 흙을 타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주선오 씨 라고?’
온몸이 부서질것같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유지은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계단을 올라온 사람은 심지원의 말대로 잔뜩 굳은 표정의 주선오였다.
“…주선오 씨? 대체 어떻게 여기에….”
유지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주선오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놈들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여기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리나가 여기 없어서 일단 근처 병원으로 이동해야겠네요.”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놈들 움직임이요? 여길 습격한 놈들이 누군지 알고 계신다는 건가요?”
유지은의 물음에 주선오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위의 수하입니다.”
* * *
항구 근처에서 안세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이시결은 그녀가 장막을 깬 틈을 타 벌루닝을 이용해 그 안으로 들어왔다.
표류를 통해 그대로 허공을 날아 섬에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자박.
바닥을 밟자 자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너무 조용하군.’
안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감각 스탯이 눈을 대신해 주변을 감지했다.
안에 살아있는 것이 전혀 없는것처럼 이시결의 감각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로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각성자들이 죽든말든 이시결과는 관계없는 일.
이시결은 주변으로 거미줄들을 흩날렸다.
사방으로 퍼진 거미줄은 주변의 지형지물에 붙어 그곳의 정보들을 그에게 전달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 쓰러져있었다.
윤도아가 아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 너머에도 또 다른 사람이 있었지만 역시 윤도아는 아니었다.
‘분명 들어왔다고 했는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는 앞으로 몇 발짝 이동하며 거미줄들을 계속 흩뿌렸다.
자박. 자박.
몇걸음 지나지 않아 그의 거미줄에 두 명의 사람이 잡혔다.
윤도아와 윤도빈이었다.
이시결은 곧장 둘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윤도아의 앞에 멈춰선 그는 빤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죽었나?’
고개를 삐딱하게 비튼 그가 발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에도 윤도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시결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딴 곳에서 죽었다고?’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윤도아의 앞에 쪼그려앉은 이시결은 거칠게 그녀의 목에 손을 대었다.
맥박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아직 살아있었다.
손을 떼려던 이시결이 움직임을 멈췄다.
사실 이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시결의 손가락이 뱀처럼 윤도아의 목을 휘감았다.
윤도아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서약이 걸려있었기때문에 간단히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이시결은 서약의 맹점을 알고 있었다.
“…….”
윤도아의 목을 감싸쥔 이시결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리고는 이내 그 목에서 손을 떼었다.
‘이렇게는 재미없지.’
의식이 없는 상대를 죽이는것만큼 지루한 일이 또 어디있을까.
지금껏 윤도아를 죽일 상황만을 기다려왔지만 이렇게 싱겁게, 제대로 붙어보지도 않고 죽인다?
안 될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 윤도아를 죽인다면 그 다음은?
아직 윤도아만큼 자신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없었다.
주선오? 에이단 맥카시? 아니면 박성현?
그들에게 아무런 흥미가 없다고하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윤도아만큼은 아니었다.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들이 윤도아만큼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윤도아는 계속해서 이시결의 눈앞에 있어야했다.
‘지금은 아냐.’
이시결의 손이 이번에는 윤도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윤도아 씨.”
윤도아를 흔들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눈살을 찌푸린 이시결은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냈다.
치익!
라이터의 불이 켜지며 주변이 밝아졌다.
그 아래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윤도아의 얼굴이 비추었다.
“윤도아 씨. 안 일어납니까?”
이시결이 다시 그녀를 흔들었다.
스스스슥.
조용하던 섬에 움직임이 나타났다.
수풀들을 가르며 무언가가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빛에 반응했나?’
슬쩍 들고 있는 라이터를 바라보았다. 굳이 다시 불을 끄지는 않았다. 어차피 놈들을 상대해야 여기 쓰러진 잠꾸러기들을 깨우든 어쩌든 할테니까.
스스슥!
스스스슥!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이시결은 손가락 끝에서 거미줄들을 뽑아냈다.
거미줄에 비수와 시커를 연결하는 중.
<꺄르륵!>
귓가에 들려온 웃음 소리에 곧바로 시커를 휘둘렀다.
훅!
하지만 아무것도 베이지 않았다.
‘뭐지.’
무감각하게 시커를 거두어들인 이시결이 다시 주위를 주시했다.
사사삭.
사사사사삭.
소리가 이시결의 주변을 맴돌았다. 소리만 들릴 뿐 딱히 감지되는 것은 없었기에 이시결은 그저 가만히 놈의 정체가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눈앞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나갔다.
화악!
강한 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느껴졌다.
<꿈과 환상 속으로.>
<악몽 속으로.>
<너를 초대할께.>
또 한 번 섬광이 터졌다.
아차 싶었지만.
“……?”
변화는 없었다.
이시결은 살며시 눈을 뜨며 앞을 바라보았다.
코끼리를 빼다박은 코와 커다란 귀, 곰을 닮은 몸통과 두꺼운 네 개의 다리.
푸른 빛을 내뿜는 그것은 또랑또랑한 노란색의 눈으로 이시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
“…뭐야?”
잠시간의 정적.
이시결이 더욱 미간을 찌푸리며 놈에게 시커를 휘둘렀다.
서걱!
위아래로 갈라졌던 놈이 다시 스르륵 연결되었다.
놈은 여전히 동그란 눈으로 이시결을 바라보았다.
<…꿈과 환상 속으로….>
<악몽…, 으로.>
<너를 초대…, 했는데.>
“꿈과 환상?”
코웃음을 친 그가 시커를 거둬들였다.
아무래도 이놈이 윤도아를 비롯한 나머지를 저런 상태로 만든 주범인 모양이다.
<초대….>
<…했…, 는….>
오류가 난 것 처럼, 놈이 말을 더듬더니 곧 고장난 라디오와 같은 소리를 냈다.
치직.
치지직.
그러더니 그대로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훅!
이시결의 앞에는 라이터의 불빛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주변을 맴돌던 이상한 소리도 사라졌다.
“…….”
정말 짜증나는 게이트 브레이크였다.
대체 윤도아는 왜 이딴 곳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것인가.
급격히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몸을 숙인 이시결이 윤도아의 멱살을 잡아챘다.
“윤도아 씨. 뭘 하고 있습니까?”
윤도아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당신을 죽일겁니다.”
이시결이 바닥에 늘어트려두었던 시커를 훅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윤도아의 얼굴을 그으려는 찰나.
훅!
자신에게 잡혀있던 윤도아가 사라졌다.
“!”
그리고 순식간에 시커를 들고 있던 오른팔이 뒤로 꺾여버렸다.
“아야, 아픕니다만.”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사라졌다. 윤도아가 깨어난 것이 만족스러웠기에.
“…어떻게 된거야.”
낮게 잠긴 목소리에 이시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대체 왜 이런데서 자고 있는겁니까?”
곧 윤도아가 이시결의 팔을 놓아주었고 그는 뻐근한 어깨를 풀며 몸을 돌렸다.
혼란스러움을 담은 윤도아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켜둔 라이터의 불빛과 함께 번갈아가면서 주변을 살피던 윤도아가 물었다.
“…너…. 맥을 안 만났어?”
“맥이요?”
잠시 눈알을 굴리던 이시결은 조금 전 보았던 푸른 덩어리를 떠올렸다.
“온갖 동물을 섞어놓은 것 같은 괴상한 파란 물체를 말하는 겁니까?”
“…만났는데도, 깨어있다고?”
윤도아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담겨있었다.
“꿈과 환상 속으로 초대한다느니 뭐라느니 하긴 했습니다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섬광이 자신을 감쌌지만 결론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문득 맥이라는 환상의 동물에 대해 들어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까 본 맥이 그 맥인건가요? 악몽을 먹는다는. 근데 웃긴 놈이군요. 왜 악몽을 먹는 놈이 악몽으로 초대를 합니까?”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에 계속 코웃음을 치던 이시결이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의 윤도아를 보며 말했다.
“윤도아 씨는 악몽에 빠져들었나보군요. 맥에 의해서. 무슨 악몽이었습니까? 조금 궁금하네요.”
“…….”
윤도아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이런 반응을 보니 그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윤도아의 악몽이라. 잘만 이용한다면 윤도아를 죽이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시결이 살짝 고개를 비틀며 재차 물었다.
“뭡니까?”
“…트라우마.”
“트라우마?”
이시결이 되물었다.
하지만 윤도아는 그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큰 소득은 없었지만 윤도아에게 무언가 큰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맥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는지도.
이시결에게 트라우마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있었는데 사라졌다.
각성을 하고 자신이 당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되돌려준 그 날.
이시결은 이미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했으니까.
‘재미없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어쨌든 이걸 걷어내려면 그 맥을 죽이면 됩니까?”
이시결의 물음에 윤도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둘의 앞에 다시 섬광이 터져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강한 푸른 빛이 아닌 은은한 하얀 빛.
윤도아가 즉시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이시결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 놈이었다.
그리고 놈 역시 이시결에게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테고.
잠시 후 빛이 잦아들었다.
조금전 푸른색의 모습일 때 풍기던 위험하면서도 경박한 느낌은 사라졌다. 노란색이었던 눈 역시 까맣게 변해 있었다.
물끄러미 둘을 바라보던 맥이 말했다.
<내 몸에 들러붙었던 나이트메어들을 없애줄 수 있어?>
다짜고짜 본론을 내밀었다.
이시결은 윤도아를 흘긋 돌아보았다. 눈을 부릅뜬 채 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꽤 긴장을 한 것 같았다.
맥이 거래를 제안해왔다.
<그렇게 해주면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