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굉음과 함께 장막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바깥의 빛이 쏟아져내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셨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사님!”
내 외침과 동시에 짧고 강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탕!
김지석이 쏜 마력탄이 찢어진 장막에 직격했다.
콰앙!
다시한번 굉음이 울리며 장막이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파에 살짝 뒤로 밀려난 나는 숨죽인채 찢어진 장막을 지켜보았다.
‘안과 밖에서 같은 포인트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
그것이 맥의 장막을 찢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쿠구구구….
동시에 같은 지점에 공격을 받은 장막의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쩌적.
균열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균열의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섬 곳곳을 밝히더니 이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쨍!
그 빛을 고스란히 받게된 푸른 맥, 나이트메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빛!>
<빛이다!>
<도망쳐!>
<벗어날 수가 없어!>
놈이 몸을 한껏 웅크렸지만 강렬한 아침 햇살을 피할수는 없었다.
<…안…, 돼….>
<이대로는…. 사라질 수 없….>
맥을 감쌌던 푸른 빛이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악몽을….>
<복수를….>
에이단이 내 신호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실패했을 작전이었다.
위치를 전송하자 몇 초 후, 에이단이 쏜 탄환이 장막에 닿았다. 그때 미리 얘기해뒀던 김지석에게 신호를 보내 마나탄으로 같은 위치를 쏘도록 한 것.
그 덕에 맥의 장막은 사라졌고 쏟아진 빛을 받은 푸른 나이트메어들이 녹아내렸다.
<…사라…, 진…. 다….>
여러겹으로 들리던 나이트메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이제 눈앞에 있는 맥은 온전히 하얀빛을 내뿜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나이트메어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우리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끝났어.’
이제 다시 나이트메어의 악몽에 시달릴 일은 없었다.
그것에서 느껴지는 안도감.
다른 게이트 브레이크나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후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다시 보고싶지 않았던 장면을 억지로 보게되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우리의 상처를 후벼팠던 나이트메어는 푸른 액체가 되어 보이지 않는 손 안에 고여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을 풀어내자 고여있던 액체가 아래쪽으로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그 액체가 수풀에 닿자 맹독이라도 닿은것처럼 풀잎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일정 구역의 수풀을 녹여버린 액체는 바닥으로 떨어져 움푹 파인 구덩이를 만들고서야 사라졌다.
맥이 구덩이에서 피어오르는 까만 연기를 피해 바닥으로 내려섰다.
나 역시 맥을 따라 자갈이 쌓인 해변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맥이 천천히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고마워.>
맥의 감사인사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 뿐이었다.
장막이 깨지고, 나이트메어가 사라졌고, 맥의 감사인사를 받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여전히 몇몇 각성자들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각성자들을 눈앞에 두고 기쁜 마음이 들 리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맥이 다시한번 말했다.
<감사의 의미로 모두에게 환상을 보여줄게.>
그 말에 맥의 앞에 있던 모두가 긴장하며 맥을 바라보았다.
환상이라니!
꿈이니 환상이니 그 말만 들어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감사의 의미라지만 지금은 아무런 꿈도 꾸고 싶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는듯한 눈빛으로 김지석과 윤도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그건 절대 사양이었다.
“아니, 괜찮아.”
빠르게 대답했지만 맥은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놈은 우리의 의사를 무시한채 하얀 빛을 내뿜었다.
환상의 빛이 순식간에 섬 전체를 뒤덮었다.
* * *
하얀 빛이 나를 감싼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옆에 서 있던 도빈이도 김지석도 보이지 않았고 발을 딛고 있던 자갈들과 옆의 푸른 바다까지 모조리 자취를 감추었다.
‘젠장!’
분명 필요없다고 했는데!
기껏 나이트메어를 없애서 다시 악몽을 꿀 일이 없을거라 안심했었다.
그런데 맥의 환상이라니.
악몽을 먹는 맥이기에 우리에게 악몽과 같은 환상을 심어줄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제대로 뒷통수를 맞은 기분에 맥을 향해 울분을 쏟아내는데.
내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눈에 들어온건 익숙한 구두.
즉시 몸이 굳어버렸다.
아버지가 그날 마지막으로 신고 계셨던 구두였다. 그 전날 도빈이와 내가 반짝반짝하게 닦아두었기에 절대 잊을 수 없던 구두.
눈을 꾹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꽉 쥔 양손이 덜덜 떨려왔다.
빨리 이 환상에서 깨어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맥의 빛은 광범위했다. 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환상에 빠져들었으리라.
‘…피할 수 없어.’
깨어날수도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곳은 그때 무너졌던 그 백화점이 아니었다. 내게 내밀어졌던 아버지의 손이 아른거렸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버지의 환상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버지를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다시 눈을 떴다.
짙은 회색의 정장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사랑이 가득 담긴 그 눈빛에 가슴이 아려왔다.
“…아빠….”
나이트메어의 악몽과는 다르게 내 의지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내 부름에 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셨다.
“도아야.”
“…아빠.”
아버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온, 도아야. 많이 컸구나.”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항상 궂은 일을 해오시느라 투박한 아버지의 손은 따듯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흐려졌다.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왜….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거야…. 나는 아빠를 볼 자신이 없어…. 나는 아빠를….”
“도아야.”
아버지가 내 말을 끊었다.
“아빠 봐봐.”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이 흐려 아버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자 잔뜩 고여있던 눈물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항상 보아왔던 잔잔한 미소.
그 미소에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아버지의 옷깃을 부여잡고 외쳤다.
“…왜!”
다시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왜 나를 쫓아왔어! 엄마 아빠 말도 안 듣고 맘대로 돌아다닌건 난데, 왜!”
당연히 나를 쫓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어떤 상황이었어도 당연히 그랬으리라.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외쳤다.
“그냥 두지 그랬어! 아빠가 안 왔어도 난 거기서 인형들 사이에서 살 수 있었을텐데 왜!”
“도아야.”
아버지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빠는 그날 너를 찾지 못했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을거야.”
눈을 꼭 감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빠가 어떻게 너를 두고 거기서 도망을 칠 수 있겠어. 아빠는 그날 너를 찾아 헤멨던걸 후회하지 않아. 어린 너를 그곳에 혼자 남겨둬서 미안해.”
나를 끌어안은 아버지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빠는 너를 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기뻤어.”
아버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 전혀 없어.”
순식간에 어렸을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 * *
눈을 뜨자 아버지의 품처럼 따스한 햇빛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훔쳤지만 눈물은 없었다.
몸을 일으켜보니 옆에는 김지석이 앉아 있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그가 인기척에 나를 돌아보았다.
맥의 환상에 빠지기 전보다 훨씬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의 트라우마를 지울 수 있는 기분좋은 환상이었으리라.
“좋은 꿈 꾸셨어요?”
김지석의 물음에 대답대신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김지석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조용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맥의 환상이었지만 실제로 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같은 말을 해주셨겠지.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를 구해서 다행이었다고.
후련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계속해서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너진 건물더미가 이제야 사라진 것 같았다.
이제 도빈이와도 거리낌없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셔둔 납골당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맥은 보이지 않았다. 산 중턱에 있던 활짝 열렸던 게이트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김지석이 말을 꺼냈다.
“맥은 돌아갔군요.”
“저희에게 환상을 심어준 후 바로 돌아간 것 같아요.”
김지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게이트가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맥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옆에 쓰러져있던 도빈이 역시 정신을 차렸고, 다른 각성자들도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빠?”
커다래진 눈의 김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곧바로 나라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나라야!”
권재경이 깨어난 나라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훌쩍 커버린 나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권재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자그마한 손을 뻗어 제 아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마, 아빠. 나 괜찮아.”
권재경의 심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한것은 아버지가 나를 위해 그러했던것처럼 권재경 역시 나라를 살리기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권재경에게는 나라가 전부이고, 나라에게는 권재경이 전부일테니.
권재경은 그런 나라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다.
비록 환상으로 덮어지긴 했지만 악몽을 꾼 일곱 살의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는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라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의젓하게 제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 모습에 괜히 가슴이 시큰해져 시선을 떨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나라가 이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다시는 권재경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아빠. 나 꿈에서 엄마를 봤어.”
그 이야기에 가늘게 떨리던 권재경의 몸이 일순 굳은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레 나라를 품에서 떼어낸 권재경이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를…?”
“응. 잘 커줘서 고맙데. 그리고 아빠를 잘 부탁한다고 했어.”
나라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아빠는 나라가 지켜줄거라고. 그러니까 그만 울어, 아빠. 엄마랑 약속하고 왔는데 아빠가 계속 울면 엄마랑 약속 못 지키잖아.”
나라가 권재경의 안경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그의 눈을 닦아냈다.
“…하…. 하하….”
권재경이 힘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괜찮은가요?”
어느새 섬에 올라온 안세인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관장님.”
그녀의 왼쪽 팔에는 이시결이 말했던대로 의수가 달려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박효진과 이리나의 합작이리라.
“정말 고생많으셨어요!”
박효진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안세인은 김지석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박효진은 정신을 추스른 각성자들을 배로 안내했다.
이리나는 혹시 부상을 입은 각성자가 있는지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시선이 권재경과 나라에게 꽂혔다.
나라를 꽉 끌어안고 묵묵히 앉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이리나의 표정이 금세라도 무너질것처럼 변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두면 금방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았다.
“리나야.”
내 부름에 흠칫 놀란 이리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 언니.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그런데 여기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뒤쪽에 누워있는 각성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리나가 후다닥 달려가 그들을 살폈다.
김지형의 곁에 있던 정시언이 이리나를 보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리, 리나 언니. 언니, 지형 오빠가 안 일어나요. 어떻게 해야 되요? 악몽에서 벗어나지를 못 하는 것 같은데.”
이미 한참을 울었는지 두 눈은 새빨간 채 퉁퉁 부어있었다.
항상 당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걸지도 몰랐다.
그건 정시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깨어나지 못한 각성자들의 곁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잠시 김지형과 다른 각성자들의 상태를 살펴본 이리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일단 다들 병원으로 이송하는게 좋겠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의식이 없는 각성자들을 배에 태워 육지로 이동시켰다.
“근데 누나.”
다시 배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곁으로 다가온 윤도빈이 말했다.
“이시결 씨 안 보이는데.”
환상에서 깨어났을때부터 이시결의 모습은 보이지않았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그가 남겨둔 메시지가 있었다.
[에이단 씨랑 합류해서 먼저 올라갑니다.]
메시지 도착 시간을 보니 이시결은 우리가 맥의 환상에 빠져들었을 때 빠르게 이곳을 벗어난 것 같았다.
그에게는 트라우마가 없었으니 맥의 환상을 볼 일도 없었을 터.
이제 이곳의 게이트 브레이크는 마무리 되었으니 그틈에 일어난 위쪽의 사건을 정리해야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곳으로 돌아올 배를 기다려야했고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나는 도빈이를 돌아보았다.
“도빈아.”
“응?”
“나도 아빠를 봤어.”
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윤도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응….”
놀라긴 한 것 같았지만 도빈이 역시 맥의 환상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것이다.
도빈이가 이내 작게 웃어보였다.
“…그렇구나.”
살짝 가늘어진 눈과 곡선을 그린 입술 끝의 보조개가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다.
우리는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추억들을 나누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