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나는 따로 올라갈게.”
공항으로 이동하려는데 도빈이가 말을 꺼냈다.
도빈이의 뒤에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덧붙였다. 설재민이었다.
“저도 올라가긴 해야되는데 올라가는길에 잠깐 동네 좀 들러야되서요. 도빈이 행님한테 태워달라고 부탁 좀 했어요.”
“그 김에 리나도 같이 태워가려고.”
이리나는 깨어나지 못한 각성자들과 함께 병원에 가있었다.
“알겠어. 올라가서 봐.”
윤도빈과 설재민이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먼저 항구를 떠났다.
“저희는 먼저 가서 비행기 표를 끊어두겠습니다.”
나라의 손을 꼭 붙잡은 권재경이 말했다.
“부탁할게요.”
안세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재경과 나라, 문기훈까지 항구를 떠났다. 이제 이곳에 남은건 안세인과 김지석, 박효진, 나 뿐이었다.
“조심히 올라가세요. 저는 꼼꼼하게 살펴보고 올라가겠습니다.”
박효진이 자신의 결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묶었다.
섬에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나이트메어나 맥의 흔적을 찾기위한 것이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었으니, 사실 앞으로 그녀가 찾아낼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박효진과 인사를 나눈 후 공항까지 이동할 차로 움직이는데 안세인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김 이사, 도아 씨.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감사인사에 나와 김지석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세인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시선을 돌려 안세인의 새로 운 왼쪽팔을 바라보았다.
옷 소매 밑으로 드러난 손목과 손은 의수라기보다는 뼈의 형태를 닮은 기계에 가까웠다. 기계의 뼈대는 마나석을 가공해 만들었고 겉을 둘러싼건 내가 보상으로 받았던 강철이었다.
손에 끼워져있는 까만 너클과 같은 까만색의 강철이라 마치 손과 너클이 하나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안세인이 까만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덕분에 왼손에 다시 너클을 낄 수 있게 됐어요. 어제 사용해보니 원래 왼팔보다 더 좋은 것 같아서 오히려 잘 됐다고 해야할지.”
김지석이 철없는 소리를 하는 안세인을 나무라듯 바라보았다.
“관장님.”
그의 눈빛에 안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만큼 좋다는 거에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안세인이 진지해진 얼굴로 나와 김지석을 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관장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도아 씨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김지석이 오롯이 내게 공을 넘겼다. 그에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을수밖에 없었다. 안세인이 팔을 잃은 것이 내 회귀의 영향인 것 같아서, 내 마음이 편해지기위해 그것들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아니에요. 저한테는 필요없는 보상이기도했고 마나석은 또 구할 수 있으니까요.”
내 변명이 안세인에게는 그저 겸손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한번 내게 감사를 표했고, 나는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마침 안세인 쪽에서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안세인은 왼손을 코트의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의수를 이은지 하루밖에 되지않았다고 믿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통화를 연결한 안세인은 짤막한 까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안세인입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마무리되어 후련함이 가득했던 안세인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지금의 시점에서 안세인을 저렇게 만들 정도의 일이라면, 성위의 수하들이 뭔가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혹시 주선오에게 온 연락이 있는지 핸드폰을 살펴봤더니 새로 도착한 메시지가 있었다.
“…알겠어요. 바로 가죠.”
내가 메시지를 확인한 것과 안세인이 전화를 끊은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김지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안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빨리 돌아가죠. 기관 교도소가 습격당했다고합니다.”
“…네? 그게 무슨….”
“저도 방금 연락 받았어요. 빨리 가는게 좋을 것 같아요.”
김지석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걸음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다시 주선오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성위의 수하가 기관 교도소를 습격했습니다. 일단은 마무리됐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놈들이 움직일 것 같다고는 했지만 각성자들이 수감되어있는 교도소를 노릴 줄이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사일지도 몰랐다.
지난번 잡아들였던 서윤지나 김무영 등 성위의 수하 소속이었던 미등록들이 놈들에게는 상당한 전력이었을테니.
상황이 좋지 않다면 그들이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거나, 혹은 그곳을 지키던 유지은을 비롯한 교도관들의 피해가 클지도 몰랐다.
빨리 돌아가서 상황을 파악해야했다.
* * *
“난장판이군요.”
습격자들이 휩쓸고 간 교도소를 본 이시결의 간단한 소감이었다.
건물 곳곳의 벽이 무너져내렸고 안의 시설물들 또한 엉망으로 부서져있었다. 곳곳에는 치우지 못해 굳어버린 피가 가득했다.
난장판이라는 것이 틀린말은 아니었지만 확연히 가벼운 목소리가 주선오의 예민한 신경을 긁었다. 주선오가 매섭게 뜬 눈으로 그 말을 던진 이시결을 돌아보았다.
이시결은 주선오의 시선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를 타박했다.
“기껏 말해주고 내려갔는데 이것도 막아내지 못한겁니까? 주선오 씨, 생각보다 실력이 별로인건가요.”
그 도발에 주선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루 전, 윤도아가 서해 섬의 게이트 브레이크 현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이시결은 성위의 수하가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곧장 그곳으로 이동했다.
이전 성위의 수하에 대해 함께 조사하던 일이 있었기에, 주선오는 그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뭔가를 노릴거라 예상은 했지만 겁도없이 기관 교도소를 털다니.’
윤도아를 통해 안면을 텄던 땅의 지배자 무리 단장인 심지원의 도움으로 기관을 습격한 놈들 중 몇몇은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녀의 흙을 다루는 마법은 윤도아의 모래 슬라임 모부처럼 사람을 제압하기에 좋았다.
반면 주선오는 사람들을 상처없이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특성은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것이었으니.
놈들을 붙잡아 그 배후를 제대로 찾아내 세상에 드러내야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쉽사리 놈들을 죽일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 몬스터가 아닌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당신처럼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해.”
그에 이시결이 코웃음 쳤다.
“저도 함부로 죽이는 건 아닙니다만? 최근에는 죽인 적도 없고요. 그리고 그거랑은 별개의 얘기 아닙니까. 이건 그냥 제압을 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제압하는 방법 모릅니까? 간단합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은 쉬웠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하지만 그러려면 결국 싸움을 피할 수 없고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 싸움은 누군가 전투불능이 될 때까지 이어질 터.
아직 주선오는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힘들었다. 이곳은 보너스 게이트가 아닌 현실이었으니까.
조용해진 주선오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던 이시결이 물었다.
“무섭습니까?”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주선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시결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그럴 수 있죠. 이해합니다.”
의외의 대답.
이시결 역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서웠던 때가 있었던가 싶었다.
이시결이 걸음을 옮겨 엉망이 된 수감소의 복도로 향했다. 주선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자신을 따라오는 주선오를 흘긋 돌아본 이시결이 물었다.
“사람이나 게이트 안에서 만나는 몬스터나 다를게 뭡니까?”
걸음을 멈춘 주선오가 싸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
“몬스터도 똑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체입니다. 사람과 비슷하게 머리가 있고 사지가 달렸고요.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긴 하지만, 사람과 비슷한 놈들을 베어낸 적 없다고 하지는 않겠죠.”
주선오가 지금까지 베어낸 몬스터의 종류만해도 수십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사람과 달랐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럼 사람과는 말이 통해서? 짐승보다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오히려 들짐승이나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더 잘 알아듣고 잘 복종하죠.”
“…입 다물어.”
주선오의 말을 들을 이시결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듯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이제보니 문제는 그 유약한 생각이군요.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윤도아 씨에게 허락을 받아야하겠지만요. 제가 주선오 씨를 죽일듯이 달려들어야 주선오 씨도 저를 죽일 마음이 들 것 아닙니까.”
이시결의 눈이 휘었다.
“아, 물론 대련의 일환으로요.”
이시결은 또 틈을 노려 주선오와 맞붙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도아를 돕기위해 이시결과 협력을 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마주쳐도 이런 점만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조금 나아진것이라면 이런 부류의 도발에 자신이 일일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랄까.
주선오는 이시결을 무시한채 앞으로 걸어갔다.
피식 웃은 이시결이 곧장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계단을 오르자 여전히 정리되지 못한 교도소의 내부가 나타났다.
“윤도아 씨가 아니었다면 저도 여기에 있었겠죠.”
감회가 새로운듯 이시결이 중얼거렸다.
이시결은 윤도아와의 서약 때문에 이렇게 자유롭게 밖을 활보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윤도아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코웃음을 친 주선오가 말했다.
“그리고 이 사단을 틈타서 당연히 탈출했겠지.”
“물론이죠.”
이시결이 즉각 대답했다.
“그리고 그게 놈들이 노린거겠죠.”
“노렸다?”
“당연히 자신의 빼앗긴 수족을 되찾으려는 거죠.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성위의 수하에 있던 미등록들.”
그 말에 주선오는 꽤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당시에 주선오가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지만 윤도아와 권재경, 문기훈 등이 미등록의 잔당을 잡아들일 때 있었던 일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천둥새.”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시결이 자신의 복부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맞습니다. 제가 찔렀던 미등록 각성자요. 이제는 강제로 등록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기관에 협조는 안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셋이나 더 있고요.”
둘의 앞에 수감자들이 갇혀있는 감옥이 나타났다.
부상을 당한 교도관들 대신 그곳을 지키고 있던 땅의 지배자 무리의 단원들이 주선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단발머리의 한 여자가 둘에게 다가왔다.
“오셨군요.”
이곳에 침입한 놈들을 붙잡은 땅의 지배자 무리 단장 심지원이었다. 그녀는 주선오의 옆에 있던 이시결을 바라보며 얇은 갈색빛의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는 중인듯 했다.
“이분은…?”
“알 거 없습니다.”
이시결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대답에 심지원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를 무시하기로 작정했는지 심지원은 다시 주선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치려던 수감자들 대부분은 붙잡아서 다시 격리시켰습니다.”
이내 심지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한 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갇혀있던 수감자 한 명이 도망을 쳤다라. 모두가 도망간게 아니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 한 명이 누구냐가 중요했다.
“누굽니까?”
주선오의 물음에 대한 답은 심지원 대신 이시결에게서 나왔다.
“천둥새겠죠.”
그에 심지원이 놀란듯 이시결을 보며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죠?”
코웃음을 친 이시결이 답했다.
“천둥새는 벼락처럼 빠른 움직임을 가진 각성자입니다. 놈들과 경찰들의 전투에 감옥 안에도 틈이 생겼을거고, 그 틈을 통해 당연히 이곳을 벗어났겠죠. 그렇게 정신없는 싸움을 벌이는 중에 벼락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주선오는 깊은 탄식을 속으로 삼켰다.
‘하필 천둥새가….’
천둥새는 상대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각성자로 알려져있었다. 벼락같은 움직임과 피할틈도 없이 내리치는 천둥. 윤도아조차 그 천둥을 온전히 피하는 것은 힘들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 천둥새가 도망을 쳤다니.
“천둥새는 곧바로 자신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갔을겁니다. 놈들의 습격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건 아니게 됐군요. 교도관들 수도 줄이고 천둥새까지 빼냈으니.”
이시결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물론 걱정이 섞인 것이라기보다는 이 상황을 비아냥대기위한 수단이었다.
애써 그를 무시한 주선오는 심지원을 보며 말했다.
“남해 섬 게이트 브레이크가 정리됐으니 관장님과 이사님, 윤도아 각성자도 이곳으로 올겁니다. 자세한건 그때 이야기하도록 하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