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랭커가 회귀하는 방법-187화 (188/201)

제187화

12월 5일.

내 요청에 의해 한국 각성 기관은 세계 각성자 회담을 개최했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일정이었지만 두 번째 간이 시험을 앞둔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회담에 참석한 국가의 수는 총 열개국이었다.

“일단 분위기도 조금 풀 겸, 회담 시작 전에 간단하게 인사들 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안세인이 먼저 가볍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왼손은 이제 오른손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있었다.

“저는 한국 각성 기관장 안세인이라고 합니다.”

안세인이 간략한 소개를 마치자 내 옆에 있던 금발머리의 독일인, 니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독일 랭킹 1위이자 샐러맨더 무리를 이끌고 있는 니엘이에요.”

이곳에서 가장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였지만 어디하나 꿀리는 기색은 전혀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입을 연것은 바로 옆의 니엘과 비교될 정도로 큰 키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조이였다.

“미국 각성자 조이에요.”

왼쪽의 푸른 눈동자 밑에 있는 까만 점이 그녀를 한층 더 발랄해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조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도 이곳에 내가 없었더라면 또 험악한 장난을 쳤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이 회담에 참석할지 몰랐던 의외의 인물이었다.

갈색의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흠. 루마니아 기관장 도린입니다.”

지난번, 브란 성의 게이트 브레이크 때 만났던 루마니아의 기관장이자 랭킹 1위인 도린.

도린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그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어서 회색 줄무늬 정장을 차려 입고 도도한 기품을 내뿜고 있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 소속 이네스입니다.”

이네스는 작년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시 첫 번째 간이 시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한국 각성자 주선오입니다.”

주선오의 간략한 소개에 이어 중국, 일본, 터키, 인도에서 참여한 랭킹 1위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당당히 세계 랭킹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랭커들이었다.

그후 가장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러시아 랭킹 1위 대리인으로 참석한 나제쥬다 예브게니에브나 소로킨이에요.”

나제쥬다. 나쟈였다.

한국에 자주 드나드는 에이단이 이곳에 직접 얼굴을 비추는 것을 피하려고 나쟈를 대신 보낸 것 같았다.

나쟈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인사를 보내왔다. 그녀와는 아는체를 할수가 없었기에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로써 처음으로 세계 랭킹 10위 내외의 랭커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회담장의 분위기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세계 각국의 각성자들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기위해 회담에 참여한 루크의 덕택이 컸다.

그의 카피바라 신의 가호 덕분에 이곳에 모인 모두의 마음상태가 안정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렇게 편안한 상태는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두 번째 간이 시험을 앞두고 이런 마음을 갖는게 맞는건가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루크는 이제 첫 회귀 전 내가 알던 루크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해져있었다. 캐나다에서 보았던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잠시 옅은 금발을 단정히 빗어내린 루크를 바라보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려있었다. 아직 나만이 입을 열지 않았고 내가 회담의 개최자였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한국 각성자 윤도아입니다. 오늘 제가 급하게 회담을 요청드린건, 다들 아시겠지만 두 번째 간이 시험 때문입니다.”

몇몇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첫 번째 간이 시험때도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어야했지만 그때는 다들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죠.”

안세인이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나 역시 잊고 있던 간이 시험이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했었다.

“네. 다행히 니엘과 이네스, 그리고 다른 각성자 한 명의 도움을 받아서 첫 번째 간이 시험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어요.”

니엘과 이네스의 눈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첫 번째 간이 시험을 함께 치뤘던 이시결도 이곳에 참여할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진버들의 뒤를 쫓는 것에 심취해 있었기에 회담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지.’

괜히 세계 랭커들이 모여있는 곳에 와서 광역 도발을 시전하면 곤란한건 나였다.

나는 다시 회담장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첫 번째 간이 시험때와는 다르게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비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본의 랭킹 1위인 타츠나리가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투박한 손과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가득했다.

“이번 간이 시험도 그때와 비슷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확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게이트의 종류가 모두 다르듯 간이 시험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때는 파수꾼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림 리퍼를 잡으니 게이트가 클리어 됐었어요.”

니엘이 1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윤도아 씨가 적절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지만요.”

“맞아요. 사실 도아 언니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잘 모르겠고.”

둘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잘 해준 덕이에요. 어쨌든 그때는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고 하지만, 사실 두 번째 간이 시험은 지난번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왜죠? 그때보다 전체적으로 각성자들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중국의 랭커 리웨이가 치켜올라간 눈매만큼이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험은 당연히 응시자의 수준에 맞춰서 출제되겠죠. 각성자들의 수준이 올라간만큼, 시험의 수준 또한 높아진다. 이거 아닙니까?”

도린이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 리웨이가 이해한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린의 이야기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면을 생각해서 한 이야기였다.

첫 회귀 전. 알려지지 않았던 첫 번째 간이 시험과는 다르게, 두 번째 간이 시험의 형태는 대략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이트에 입장해서 주어진 퀘스트를 클리어한다는 기본적인 틀은 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각성자들이 게이트에 입장할 때는 자신이 원할때, 원하는 게이트를 골라 입장하곤 했다. 즉,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게이트에는 입장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

하지만 두 번째 간이 시험은 달랐다. 입장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입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때는 입장이 가능했던 각성자가 있었고, 불가능했던 각성자가 있었다.

게이트에 입장하기위한 조건이 있었던건지, 아니면 게이트가 각성자를 선택한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이라고 다르진 않을거야.’

어쩌면 나도 입장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지금 우리는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두어야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맞아요. 각성자들의 수준이 높아진만큼 간이 시험 또한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시험의 형태 자체가 바뀔 수도 있어요.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브레이크의 형태를 취할수도 있고, 아니면 게이트에 입장하는 방법 자체가 달라질지도 모르죠.”

내 이야기에 회담장 안의 각성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 명만 빼고.

“와우.”

조이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번 시험이 그렇데요?”

왠지 머리가 아파올 것 같았다.

“…그렇다는게 아니라. 그런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 대비를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이의 멍청한 질문덕분에 사람들도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네스가 네모난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그건 너무 섣부른 생각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게이트들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야 브레이크를 일으켰고, 입장 방법도 항상 같지 않았습니까?”

리웨이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뒤이어 인도의 랭커 이르판도 입을 열었다.

“입장 방법이 다를지도 모른다는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문채 소란스러움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회담장 안이 조용해졌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이런일이 일어날거라는걸 알고 계셨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내 앞의 각성자들이 서로를 살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고, 이건 현실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과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들이 앞으로를 대비하는데에 더 유리하겠죠.”

다시 회담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이번의 침묵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이제서야 그들도 내 이야기들이 재고해볼만한 것이라는걸 깨달은 것이리라.

잠시 후 주선오가 물었다.

“만약 정말로 입장 방법이 달라진다면, 어떤 방식을 떠올리셨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방법 자체는 변하지 않을거야. 게이트가 나타나고 그 게이트를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는건 같을거란 말이죠. 달라질수도 있는건 각성자들의 의지에 대한 게이트의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의지에 대한 반응…?”

타츠나리가 흉터가 가로지른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언니. 말이 너무 어려워요.”

니엘이 작게 칭얼거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안세인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내게 물었다.

“내가 게이트에 입장하고자해도 입장이 안될수도 있다는건가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도 랭커 이르판이 멋들어지게 기른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게이트에 입장하기를 원하지 않던 각성자가 억지로 게이트에 입장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랜덤 차출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비슷하게 짚어냈다.

“네. 그런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각성자가 시험에 대한 각오는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정도로 이야기를 했으면 회담이 끝난 후 이 부분 역시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전달이 될 것이다.

이 이상 그 이야기를 지속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가 있었기에, 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물론 그건 만약의 경우입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두는 편이 좋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지원할 사람들은 추리는 편이 좋겠죠. 일단 저는 참여할 생각입니다.”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무섭게 주선오가 말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이번에는 말릴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 했다. 첫 번째 간이 시험을 가지 못하게 했던 것이 한이 된 모양이다.

이번에는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입장을 원한다고해서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니.

첫 회귀 전의 그는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입장할 수 없었다.

‘대신 원하지 않던 신교진이 입장돼버렸지.’

이번에도 그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주선오는 조금 안심이 되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를 이어 그곳에 있던 모든 랭커가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참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대리인으로 온 나쟈만 빼고.

“저는 일단 이고리 유리예비치 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이단의 예명이었다.

물론 그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고싶지 않아할테니.

내가 회담을 열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두 번째 간이 시험의 내용은 다른 게이트들의 클리어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회담이 끝난 후, 회담의 결과를 보며 각성자들이 각오를 다잡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각성자 회담, 두 번째 간이 시험에 대해 논의]

[윤도아 각성자, ‘간이 시험에 대한 형태 변경도 생각해야.’]

[세계 10위권의 랭커들, 모두 두 번째 간이 시험 참여 의사 밝혀]

회담에 대한 기사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곳에서 나왔던 윤도아의 발언에 의해 전세계가 크게 들썩였다.

-형태 변형을 생각해야한다니….

-걍 생각하자는거지 확신이 아니잖아.

-그래도 생각해볼법해.

-입장을 원하는 각성자가 입장할 수 없다면, 반대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원하지 않는데 입장한다고?

-그건 미친거 아님? 각성했는데 게이트 닫는거 포기하고 걍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 걸리기라도 하면? 그냥 죽으라는 거 아냐?

-개무섭네, 진짜.

-아직 불확실한 이야기임. 윤도아가 말하는게 모두 현실이 되지는 않을거잖아.

-그러게. 근데 그걸 뭐 저리 자신있게 얘기함? 어디서 시험 정보라도 샌 줄 알았네.

-그냥 대비하자는 얘기잖아. 요점 파악 좀 제대로….

-ㅇㅇ. 괜히 긴장놓고 있다가 랜덤으로 걸려버리면 그냥 그대로 지구 멸망할지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보면 내가 각성자가 아닌게 정말 다행인듯….

가호자나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남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그 이야기에 상당한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지 않는데도 게이트에 입장하게 된다면, 그게 만약 자신이 된다면 과연 자신이 간이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그저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하는 각성자가 게이트에 입장하기를. 만약 원하지 않는 각성자가 간이 시험을 치르게 되더라도 그게 자신은 아니기를 빌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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