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윤도아 씨 입장하셨어요. 이제 다른분들도 입장하시면 됩니다.]
윤도아가 사라진것을 확인한 박효진이 빠르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그럼 저도….”
윤도빈이 하늘을 바라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주선오가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연 주선오였다. 윤도빈은 괜히 주선오의 눈치를 살폈다.
“…네.”
볼때마다 감탄하던 주선오의 얼굴은 안쓰러울정도로 초췌해져있었다. 어디가 아픈걸까 싶을 정도로.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지만, 주선오는 괜찮다는 대답 뿐이었다.
‘그때 진짜 누나랑 무슨 일이 있었나?’
아파트 앞에서 둘이 나란히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 날 이후로, 주선오와 윤도아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건 오늘까지 이어졌고, 윤도아가 입장을 한 후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연 것.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간이 시험 끝나고 빨리 해결하라고 해야겠네.’
윤도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주선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입장.”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주선오는 그자리에 계속 서있었다.
“…형?”
의아한건 주선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한껏 커다래진 눈으로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입장이…. 안 돼.”
주선오의 말에 윤도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하지만 그건 주선오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다, 다들 입장이 안 된데요!”
뒤에서 들려온 박효진의 외침에 윤도빈은 상황이 심각함을 깨달았다.
“…입장.”
마른침을 삼킨 윤도빈이 하늘의 게이트를 보며 말했지만, 입장이 되는 대신 눈 앞에 한 줄의 안내글이 떠올랐다.
[입장할 수 없습니다.]
“…이게 대체….”
윤도빈이 믿을 수 없다는듯 안내글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난 회담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각성자가 게이트에 입장하고자해도 입장이 안될수도 있다던 윤도아의 이야기가.
윤도빈은 입술을 까득 깨물며 자신의 입장을 거부하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현재 간이 시험의 게이트에 입장을 한 것은 윤도아 한 명 뿐이었다.
‘…누나…!’
* * *
“…세라피스…?”
믿기지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자 세라피스의 날카로운 눈이 곡선을 그렸다.
“그래. 나야.”
‘…어째서…?’
지금 이건 두 번째 간이 시험의 게이트였다.
내가 알던 두 번째 간이 시험에는 세라피스같은 신이 나타나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당시 각성을 하지 않아 간이 시험에 대한 기사를 주의깊게 보지 않았기에 정확한 내용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게이트와 다른 특이사항은 게이트에 입장하는 것이 각성자의 의지와 다르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세라피스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굳어버린 내 모습에 세라피스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자신의 가슴에 얹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보라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긴장 좀 풀어. 그때랑 마찬가지로 난 너랑 싸울 생각은 없어. 지금의 난 안내자이거든.”
그 이야기에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안내자라고?”
게이트의 안내자.
안내자라면 보통 각성자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이들을 뜻했다. 물론 안내자라고 속이며 접근해 뒷통수를 치는 놈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 있어야할건 다른 놈이었지만 말야. 단순히 안내자의 역할이라면 내가 하더라도 상관은 없지. 사실 네가 처음으로 입장하지 않았다면 나도 안내자를 가로챌 생각은 없었어.”
세라피스의 말은 믿어도 되는걸까?
순간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세라피스는 내가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가 말을 바꿔서 나를 죽이려고 한다치더라도 나는 발버둥조차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나타난건 내가 첫 번째로 입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수가 틀려서 그에게 죽게 된다 하더라도, 다음번에는 다른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면 될 터.
‘그러면 최대한 지금을 이용해야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그래도 세라피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한번쯤은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안정된 것을 느꼈는지 세라피스가 다시 방긋 웃었다.
“사실 지난번에는 허락도 없이 개입을 한거라서 한소리 들었거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찾아갈수가 없었어. 이번에는 그래도 합의가 된 상태니까 눈치볼 필요는 없지.”
역시 놈은 입만 열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한데?”
반사적으로 물었지만 세라피스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 말을 흘려넘긴 그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안내자의 역할을 해볼까.”
세라피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의 발밑에서부터 번져나간 암흑이 주변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에게 집중하느라 어땠는지 모를 주변의 환경이 순식간에 변했다.
“…여긴?”
작은 정원이었다.
중앙의 조그마한 연못과 그 주변을 둘러싼 돌들. 연못의 옆에 놓인 하얀 나무 의자 두 개와 그 사이의 동그란 테이블. 그 옆에서 자라난 커다란 나무는 하늘을 뒤덮어 작은 정원에 아늑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수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평화로운 새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세라피스가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연못 옆의 의자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를 처음 봤던 비내리던 광산이 떠올랐다. 밤하늘을 닮은 짧은 머리카락은 여전했지만 옷차림이 조금 변해있었다.
지난번 뒤집어 쓰고 있던 로브는 보이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올린 하얀 셔츠에 짙은 회색의 바지. 사람과 다를바 없는 행색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가서 앉더니 내게 앞자리를 가리켜보였다.
“앉아.”
사람과 똑같은 행동에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 묘한 머리카락의 색과 붉은 동공이 아니었다면 정말 사람이라고 착각할만했기에.
사람을 흉내라도 내고 있는걸까.
애초에 저 모습 자체가 원형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내 앞에 나타나기위해 사람과 같은 형태를 빌린 것일지도 모르지.
게다가 이제는 옷차림까지.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저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어서.”
내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세라피스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너무 평화로웠다. 도저히 간이 시험을 치르는 곳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 번째 간이 시험이 단순히 신과의 담소 시간은 아닐텐데.
“아까부터 계속해서 놀라는걸보니 이 상황은 겪어보지 못한 모양이네.”
세라피스가 턱을 괴며 웃었다.
괜히 마음을 읽힌 기분이었다.
확실히 내가 이 상황을 겪고 회귀를 했다면 세라피스를 마주했을 때부터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뭐하는 거지? 간이 시험을 진행해야하는거 아냐?”
“진행해야지. 나는 안내자로서, 너는 출제자로서.”
“…출제자?”
내 질문에 세라피스는 몸을 똑바로 펴며 빈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 의심스럽게 의자를 바라보았지만, 지금으로써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는 내가 앉지 않으면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세라피스의 맞은편 의자에 가 앉았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서렸다.
“출제자라는게 무슨 소리야.”
그러자 세라피스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세라피스와 나 사이에 있던 동그란 테이블 위쪽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그 안에서 작은 달걀 크기의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툭!
나무를 깎아만든 것 같은 그것은 여섯 개의 면을 가진 주사위였다.
다만 여섯 개의 면에는 1부터 6까지의 눈금 대신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들여다보자 세라피스가 말했다.
“간단히 룰을 설명해줄게.”
세라피스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주사위를 들어올렸다.
“이 주사위의 각 면에는 너희가 치뤄야할 시험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어.”
내가 읽을 수 없는 글자였지만 그의 말대로 무언가 잔뜩 적혀 있긴 했다.
글자들의 형태와 글의 길이는 모두 달랐다. 제각각 다른 여섯 개의 시험 내용이 적혀있는 것 같았다.
“클리어를 위해서는 이 중에 보스전을 뽑으면 돼. 운이 좋아서 한 방에 보스가 나오게 된다면 너희는 보스전 한 번으로 시험이 끝나게 되겠지.”
“…출제자인 내가 그 주사위를 던지는건가?”
내 추측에 세라피스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정답.”
어느정도 두 번째 간이 시험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
가장 처음 입장한 각성자는 출제자로서 안내자를 만나게 된다.
나는 출제자일 뿐 수험자가 아니다.
출제자가 주사위를 던져서 시험의 내용이 결정되면, 그 후에 시험을 치를 각성자가 정해지는 것이리라.
확인을 위해 세라피스에게 물었다.
“시험을 치르는 수험자는?”
“네가 주사위를 던져서 문제가 선택되면, 그 이후에 랜덤으로 차출될 예정이야.”
역시.
첫 회귀 전 주선오가 이곳에 입장하지 못한것도, 신교진이 입장하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
미리 회담에서 다른 각성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라고 아무런 기준없이 차출하는게 아니거든.”
확실히 아무런 기준이 없이 랜덤한 선택이라면 각성자들이 많은 것이 오히려 불리할 것이다.
간이 시험인데 그정도로 불리한 조건을 내보이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그들 역시 어느정도 각성자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재미있지 않아? 가장 먼저 입장한 용기있는 각성자는 문제를 출제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안내자와 함께 그들을 지켜볼 뿐이지.”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다른 가성자들이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럼 대체 왜 세라피스는 내가 입장함에 맞추어 안내자 역할을 자처한 것일까.
역시 재미를 위해서?
아직 내게 흥미가 떨어지지 않았다는건 확실했다.
어쨌든 지금은 나에게 큰 기회였다.
어떻게해서든 이 간이 시험을 이용해서 그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빼내야했다.
“그럼 가볍게 한 번 굴려보겠어?”
세라피스가 내게 주사위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드는 대신 세라피스의 붉은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세라피스가 살짝 고개를 비틀며 웃었다. 그도 내가 순순히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걸 눈치챘겠지.
“그냥 하는건 재미없지않아?”
내 물음에 세라피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양 볼에 자그마한 보조개가 패였다.
“난 내 눈앞에 네가 있는걸로 충분한걸.”
“내가 네게 재미를 주고있는만큼, 나도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하지 않겠어?”
그에 세라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그 눈빛. 그가 감추고 있던 위압감이 조금씩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신을 상대로 미친짓을 벌인건가 싶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돌려 그의 붉은 동공을 피하고 싶었지만 테이블 아래의 주먹을 꽉 움켜쥐며 버텨냈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주워담을 생각도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후후.”
이내 세라피스가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좋아. 뭐 원하는 거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다른 각성자들이 내가 출제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그때마다 내 질문에 대답해주는건 어때.”
물론 랜덤 차출된 각성자들이 시험을 통과해줘야만 질문이 가능하긴 했지만. 이런식이 아니라면 그 역시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흠.”
다행히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세라피스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에 대해서는 본인 혼자 판단을 내릴 수 있거나, 아니면 혼자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더 재미있는 내기 조건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잠시 후, 세라피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난이도를 조금 조정해야겠는걸? 그래도 괜찮겠어? 아마 조금 더 위험해지겠지.”
밑져야 본전이다.
사실 난이도가 올라가서 다른 각성자들이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이다.
만약 다들 성공해서 내가 얻어낼 정보가 많아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향이었고.
여차하면 그렇게 정보를 캐낸 후 회귀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좋아.”
“그리고 하나 더.”
세라피스가 말을 덧붙였다.
“매 시험마다 너희가 이기게 되서 정보만 퍼주면 사실 큰 재미가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 만약 한 번이라도 너희가 실패할 경우에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때는 네 목숨도 하나 함께 거두는 것. 어때?”
닿을리 없는 세라피스의 손끝이 내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광산에서 목이 졸렸던 그때처럼, 또다시 숨이 막혀들었다.
손끝이 떨려오고 온몸이 저린 감각. 놈이 풍기는 죽음의 기운은 끔찍할 정도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만약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그건 무조건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이득이었다.
“…좋아.”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러자 온몸을 죄어오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라피스가 다시 내게 주사위를 건넸다.
나는 손바닥에 맺힌 땀을 닦아낸 후 주사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세라피스의 눈빛을 마주하며 테이블 위로 주사위를 떨어트렸다.
툭.
데구르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