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연못의 표면 위로 도린과 카터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나가라자의 사체를 넘어서 가루다의 알을 강 건너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운이 좋았어.’
첫 번째 맵이 나가들의 서식지라는 정보를 보았을 때, 사실 조금 걱정스럽긴 했었다.
나가라면 독을 가진 몬스터였고 독에 내성을 가진 각성자, 혹은 독을 견뎌낼 각성자의 수는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맵이 선택된 이후 랜덤으로 차출된 각성자의 이름을 본 순간 곧바로 안심할 수 있었다.
‘도린, 카터.’
둘다 내가 알고 있는 각성자였다.
도린은 회담에서도 만났던 루마니아의 기관장이자 랭커. 카터는 캐나다에서 만났던 랭커였다.
둘의 특성이 이번 게이트와 상성이 나쁜편은 아니었다.
메뚜기쥐 신의 가호를 받은 도린이 나가의 독을 역이용해서 쉽게 놈들을 제압했고, 카터도 나가라자를 터트려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곧 연못 표면에 비추던 둘이 가루다의 알을 풀숲에 내려두었다.
그러자 표면에 비추던 둘의 모습은 사라지고, 글자들이 떠올랐다.
[가루다의 알을 강 건너로 이동했습니다.]
[첫 번째 맵이 종료됩니다.]
도린과 카터가 무사히 첫 번째 맵을 클리어해냈다.
옆에서 세라피스의 가벼운 박수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축하해. 첫 번째는 무사히 클리어했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하는 입장임에도, 그는 여전히 즐거워보였다.
세라피스는 박수를 치던 손을 거두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묻고 싶은게 뭐야?”
한 맵 당 질문은 하나.
내게 질문의 기회가 몇번이나 올지는 모른다. 만약 이 다음판에 보스가 걸리게되면 질문의 기회는 끝이 나버린다.
질문은 신중해야했다.
게이트가 무엇인지, 가호는 또 무엇인지, 앞으로 다가올 시험은 몇 개나 있는지 등 묻고 싶은것은 많았다.
세라피스는 미소를 지은채 내가 질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질문을 던지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게 두려운걸지도 몰랐다. 이전 그에게 물었을 때 그가 말했던대로 내가 그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차피 알아야 할 것이라면, 최대한 빨리 알게 되는 것이 좋았다.
“게이트는 뭐지?”
그에 세라피스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전에도 내가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을 그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때와는 다르게 그는 감당할 수 있겠냐는 쓸데없는 걱정따위는 하지 않았다.
세라피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재앙의 전조야.”
…대재앙?
대재앙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건 아닐까싶어 멍하게 세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대재앙이라고?”
세라피스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냐.’
이미 게이트는 우리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이 원하지 않던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세라피스는 게이트가 대재앙이 아니고 대재앙의 전조라고 했다. 그렇다면 게이트보다 더 큰 재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험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시험은 다른 게이트와 다를바 없었다. 그저 시험의 게이트이고 EX급 몬스터가 보스로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정도로 그것을 대재앙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을 터.
분명 그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으리라.
‘…왠지 기분이 나쁜데.’
대답을 해줬지만 다음 질문을 유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번에는 대재앙이 뭐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
이런식으로 휘둘린다면 세라피스에게서 얻어낼 정보는 얼마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게 단답형으로 대답을 받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게이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줄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봐? 그것보다 정확한 대답은 없어.”
내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었는지 세라피스가 재미있다는듯 웃었다.
나는 그를 쏘아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테이블 위의 주사위를 들어올렸다.
이전에 나왔던 주사위의 단면은 까맣게 칠해져있었다. 이제 다시 굴리더라도 저 면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보스가 아니길.’
그래야만 대재앙이 무엇인지를 들은 이후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잠시 꽉 쥐고 있던 주사위를 테이블 위로 굴렸다.
툭!
데구르르르….
테이블 위를 구르던 주사위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연못의 표면이 일렁이며 안내글이 떠올랐다.
[두 번째 맵이 선택되었습니다.]
[두 번째 맵 : 소화가 되기 전 몬스터의 뱃속에서 빠져나가야합니다.]
다행히 보스가 아니었다.
내가 홱 고개를 돌려 세라피스를 바라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맵을 깰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기대하는 거 아냐?”
“깰 수 있어.”
사실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내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뭐, 좋아. 난 당연히 실패를 바라지만. 그래야 네 목숨을 하나 거둬갈 수 있으니까.”
그가 별것 아니라는듯 중얼거렸다. 내 목숨을 거둬가는 것에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쉽게 내 목숨을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그러려면 시험을 치를 각성자가 잘 선택되어야겠지만.
“그럼 차출을 시작해볼까.”
세라피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두 번째 맵에 대한 정보를 띄우고 있던 연못의 글자가 사라졌다.
첫 번째 맵에서 시험을 치를 각성자를 선택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연못에 수많은 각성자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사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대재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야한다는 생각이 컸다.
‘제발.’
나는 두 번째 맵을 클리어할 수 있는 각성자들이 선택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 선택됐어.”
세라피스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연못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수험자가 차출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익숙한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자마자 두 번째 질문을 할수 있냐 없냐에 대한 걱정은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뭔가 미묘한 조합에 헛웃음이 나올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한 명은 에이단 맥카시였다.
러시아의 랭킹 1위지만, 정체를 감춘 채 한국에서 암거래 상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각성자였다.
때문에 그는 한국의 각성 기관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차출된 또다른 각성자의 얼굴을 보아하니 웃음이 날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피할수가 없겠는데.’
벌써부터 게이트에 입장한 에이단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 * *
‘이런, 미친!’
에이단은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고, 러시아의 랭킹 1위임에도 일부러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던 그였다.
그런데 하필 이곳에서!
자신이 가장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사람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꼬리의 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한국인.
이곳에 오게 될 줄 몰랐는지 깔끔한 정장을 입은 단정한 얼굴의 그가 에이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국 각성 기관 소속 김지석입니다.”
에이단은 천천히 김지석이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평온해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에이단의 머릿속은 굉장히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뭐라고 소개해야하지?’
본명을 대야할까? 아니면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대야할까?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른 이름을?
하지만 만약 이 게이트를 나가서 김지석이 이름을 찾아보기라도 한다면? 가명을 썼다는 것이 들통날 것이고, 김지석은 에이단이 왜 정체를 숨겼는지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
의심을 품을 여지를 줘서는 안된다.
‘아예 다른 이름을 대는 건 안 돼.’
그렇게 따지면 에이단 맥카시라는 본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이상했다.
에이단 맥카시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각성자를 찾아보기라도 한다면 가명을 사용했을 때와 다를바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가정을 해야하는걸까?
김지석이 이곳을 나가서 자신에 대해 찾아보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저기…? 아, 혹시 통역기가 없으신건가….”
김지석이 자신의 손을 붙잡은 채 대답이 없는 에이단의 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통역기는 없었다. 애초에 에이단은 간이 시험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으니까.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는 나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정말로 자신이 입장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통역기가 없음에도 김지석의 이야기를 너무 잘 알아듣고 있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고역이었다.
못알아듣는 척 무시를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통성명을 하기위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름을 대냐는 것은 에이단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할 상황이라면, 괜히 어중이떠중이 각성자 흉내를 내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지도 몰랐다. 에이단의 특성이나 그가 가진 모든 아이템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 에이단은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고리 유리예비치 라자레프.”
그에 악수를 나누던 김지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이름을 듣고도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김지석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러시아의 랭커이십니까?”
전세계 기관의 중심에 있는 한국 기관 소속이라 그런지 러시아 랭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단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그를 보는 김지석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반갑습니다! 러시아의 랭킹 1위는 베일에 쌓여 있어서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뵙게 되니 정말 영광입니다.”
정말 기뻐보이는 그와는 반대로, 에이단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 그정도로 기뻐해주니 몸둘바를 모르겠네.”
진심이었다.
이런 김지석의 반응은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실제 에이단이 주로 하는 일을 알면 분명 저 시선은 경멸로 바뀔테지.
시험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머리를 긁적인 에이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이상 당신이나 나나 시험을 치를 각성자야.”
“네. 그렇죠.”
“참, 한 가지 부탁하자면.”
김지석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에이단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나를 만난건 비밀로 해줘. 자국 내의 사정때문에 자세한걸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서 말야.”
물론 그런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에이단이 한국에서 암거래 상인의 일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김지석의 입을 막아버리면 그가 러시아 랭킹 1위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떠들지는 않을 터. 혹시나 그가 게이트 밖에서 자신과 접촉하려해도 그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예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차단하는 편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김지석이 곧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기에 에이단은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한국어를 굉장히 잘 하시네요. 어디서 배우기라도 하신겁니까?”
‘젠장. 대충 넘어가주길 바랐건만.’
에이단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한번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실 이건 김지석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게이트 안에서 만난 러시아의 랭킹 1위가 자신의 나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면 신기할 일이었다.
랭킹 1위를 하려면 러시아에서 게이트만 닫아도 모자랄 판인데. 혼혈이라는 거짓말을 해보려해도 에이단의 외모는 한국인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에이단은 대충 얼버무렸다.
“어, 그 와이프가 한국 사람이라.”
졸지에 결혼도 안한 에이단에게 아내가 생겨버렸다.
“아! 그렇군요.”
자꾸 대화를 하다보면 거짓말만 늘어갈 것 같았다.
그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면 빨리 이 작은 밀실을 벗어나야했다.
둘이 있는 곳은 낡은 오두막의 안이었다.
작은 탁자 위에 있는 등불이 오두막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낡은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벽면에 나 있는 창문 밖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잠시 침묵이 이어진 사이, 김지석이 어둠이 깔린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
에이단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집 밖에서 무언가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꾸르륵.
그오오오.
꾸륵.
저걸 어떻게 들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토끼라서 청력이 좋은가.’
그가 받은 가호에 있을 법한 스탯이었다.
작게 들리는 소리에도기분이 나빴는데 이 소리를 크게 듣는 김지석은 상당히 고역일 것 같았다.
어쨌든 저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이곳을 나가야했다.
창문의 반대편에는 낡은 문이 붙어 있었다.
“상당히 수상하긴 하지만 선택지가 없으니. 먼저 나가도록 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김지석이 조금 걱정스러운듯 물었다.
“안 괜찮을건 뭐야.”
‘이 공간에 그쪽이랑 갇혀 있는게 더 안 괜찮아.’
작게 투덜거린 에이단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