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나는 연못 위에 비치는 붉은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굉장한데.’
처음 연못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는 사실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보스맵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나까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때문에.
하지만 곧이어 떠오른 신교진의 얼굴을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신교진은 첫 회귀 전에도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참여했었다.
그때도 두 번째 간이 시험에서는 살아남았고, 사실 살아남지 못할 운이었다면 이곳에 들어오지조차 못했을 터.
그래서 안심을 한 후 둘의 전투를 지켜보았는데.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각성자였다.
정보를 살펴보니 재규어 신의 가호를 받은 일 카미나라는 남자였다.
그는 일격에 거대한 매머드의 머리를 꿰뚫었다.
정보를 봐서는 내 악마의 고양이 특성보다 더 높은 수치였고, 저정도의 실력이라면 주선오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관의 힘이 닿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각 나라의 기관들끼리 연락을 취하고 정보를 교환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지 않고 있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우리가 모르는 각성자가 있을 수 있었다.
일 카미나도 그런 각성자 중 하나이리라.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분명 첫 회귀 전에도 우리가 모르는 실력자들은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내가 죽은 뒤에 그들이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을지도 모른다.
신교진과 일 카미나를 비추던 연못의 표면이 한순간에 투명해지더니 곧 안내문이 떠올랐다.
[매머드를 처치했습니다.]
[간이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출구가 열립니다.]
“흐음.”
연못의 표면을 바라보고 있던 세라피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살짝 찌푸러져있는 것이 아무도 실패하지 않은 것이 거슬린 모양이다.
곧 연못의 위쪽 허공에 투명한 일렁임이 일더니 게이트의 출구가 열렸다.
하지만 나는 출구에서 시선을 떼어 세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아직 마지막 질문이 남아있었기에.
“자, 아쉽지만.”
세라피스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마지막 질문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확실히 이거다싶은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가 떠올린 질문은 이것이었다.
“너희 세 신과 대재앙은 어떤 관계가 있는거지?”
그 질문에 세라피스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보다. 그럼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좋아. 이야기해줄게.”
나는 세라피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말했듯이 대재앙은 크로노스의 흐름에 따라 나타날 수 밖에 없어. 그럼 당연히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
대재앙은 우주의 재해. 그럼 지구에 사는 우리와는 상관없이 우주의 시간에 따라서 나타나는 재해일 것이다.
우주가 생겨났을 때부터 생각해본다면 분명 이전에도 여러번 대재앙이 일어났겠지.
“그만큼 우리는 많은 대재앙을 겪어왔어. 너희가 나타나기 전부터 말이야. 우리한테 대재앙은 소소한 여흥거리였어.”
“여흥?”
그 가벼운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세라피스의 표정은 공허했다.
“그래. 우리는 무료하거든.”
무표정한 얼굴.
웃음을 지우고 나를 위협하려던 때와는 달랐다.
그 얼굴에서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시간이 느껴졌다.
대체 내 눈앞에 있는 이 신은 얼마나 긴 시간을 살아온 것일까.
세라피스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말했다.
“매번 대재앙 때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내기를 했어.”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
“…어떤 내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저들은 대재앙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까 세라피스는 가호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말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가호가 대재앙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이자 기회라는 것이다.
“그 둘의 내기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물론 다른 존재들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대재앙을 맞이했겠지.”
그 이야기에 나는 멈칫했다.
“매번 대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존재가 있었어?”
“물론이지. 지금 너희가 사는 곳은 이전에는 이미 수많은 다른 존재들이 거쳐간 곳이야.”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재밖에 알지 못했기에 그 이전에 다른 존재가 지구에 살고 있었다는 걸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런식으로 확인받게 될 줄이야.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호가 주어졌고?”
“그래. 매번 가호를 주어줬지만.”
세라피스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실패했어.”
실패는 곧 죽음.
인간 이전의 존재들은 모두 대재앙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둘은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기회를 줘보자라고 생각했어.”
그의 붉은 동공이 내게 꽂혔다.
그 진득한 시선에 세라피스가 말한 조금 특별한 기회라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호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 가호를 이야기 하는거야?”
“그래. 네 가호. 네 목숨.”
세라피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왜 내가 받은 고양이 신의 가호가 특별한 기회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미 나도 느끼지 않았는가.
겪어보고 죽음으로써 다가올 그때를 다시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회귀를 한 이후, 나는 가장 처음 나를 죽게 만들었던 첫 번째 시험을 깨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목숨을 잃은 첫 번째 간이 시험에서는 죽음을 겪음으로써 그 시험을 깰 수 있었다.
왜 내게 주어진 기회가 변덕에 의한 것이라는 건지도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여러개의 목숨을 가진 가호가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미래를 알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을테고 결국은 대재앙에 휩쓸려 버렸겠지.
하지만 무료했던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이번 대재앙에는 조금 특별한 기회를 줘보자는 변덕을 부렸고, 과연 그 기회가 대재앙을 막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결국 우리는 신들의 무료함을 달래줄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다.
이제야 세라피스가 왜 나에게 이렇게 관심을 보였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들의 무료함을 달래줄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때문에.
게다가 실제로 나는 그들의 바람대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나를 보며, 그들은 생각하겠지.
‘과연 나는 대재앙을 막아낼 변수가 될 수 있을까.’
“자.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세라피스가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자 우리가 앉아있던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연못 위에 있던 게이트의 출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랑 헤어지는게 아쉽더라도 가야해. 이제 이곳은 곧 사라질거야.”
세라피스의 말에 코웃음을 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눈 앞에 있는 세라피스 때문에 적잖이 놀랐지만, 오히려 그가 안내자를 자처한 덕에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모두 직접 시험을 치러준 각성자들 덕분이리라.
‘돌아가서 감사인사를 전해야겠어.’
하지만 아직 이런 정보들을 밝히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세라피스와 나눈 대화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다음에 봐.”
세라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나는 그를 한번 슥 바라보고는 앞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껏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대재앙에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만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내게 전해준 세라피스는?
나는 세라피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는?”
내 질문에 세라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우리에게 대재앙을 주고 가호를 줬다면. 그럼 너는 뭘 하는데?”
그가 해준 이야기 속에서 세라피스 본인은 쏙 빠져있었다.
하지만 세라피스는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미 질문의 기회는 끝났어.”
“…….”
확실히 그에게는 더이상 내게 대답을 해줄 의무가 없었다.
나는 손을 흔드는 세라피스를 뒤로 한 채 간이 시험의 게이트를 나왔다.
* * *
“신교진 각성자 돌아왔데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박효진이 외쳤다. 주선오의 시선이 빠르게 그녀를 향했다.
“무사하답니까?”
“네!”
주선오의 표정이 금세 안정되었다. 옆에 있던 윤도빈이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신교진이 무사히 돌아온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로써 한국에서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참여한 네 명의 각성자 중 세 명이 무사히 복귀했다.
김지석, 권나라, 신교진까지.
이제 돌아와야 할 사람은 딱 한 명.
가장 처음 입장했던 윤도아였다.
나라는 게이트 안에서 윤도아를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교진 형은 봤을지도 몰라.’
윤도빈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막 신교진에게 연락을 취하려는 찰나.
“게이트가…!”
안세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늘 이곳저곳을 뒤덮고 있던 투명한 게이트들이 서서히 축소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났나봅니다!”
게이트에 다녀온 후 잠이 든 나라를 토닥이던 권재경이 말했다.
하지만 윤도빈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아직 윤도아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누나는…!”
분명 윤도아는 누구보다 먼저 게이트에 입장했다.
이번 간이 시험이 단계가 나뉘어져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가장 처음 들어갔던 윤도아가 먼저 돌아왔어야 하는게 아닐까.
모든 각성자가 돌아오고 게이트가 닫히고 있는데도 윤도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윤도빈이 잘근 입술을 깨물던 찰나, 근처의 게이트에서 한줄기 빛이 떨어져내렸다.
일렁이는 빛은 기관의 옥상으로 닿아 있었고, 잠시 후 일렁임이 멈춘 빛의 끝에 윤도아가 서 있었다.
“누나!”
윤도빈이 빠르게 윤도아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윤도아는 멀쩡해보였다.
“괜찮아?”
윤도빈의 다급한 물음에 그를 돌아본 윤도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니 굉장히 안심이 되었다. 윤도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옥상 위에 있던 다른 각성자들 역시 윤도아에게 몰려들었다.
“어떻게 된거죠? 이번 간이 시험은 지난번 회담에서 도아 씨가 말한대로 였어요.”
안세인의 말에 윤도아가 옥상을 훑어보았다. 곧 그녀의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더니 윤도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은 잠이 든 나라였다.
윤도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안세인을 바라보았다.
“이사님은 괜찮은가요?”
“네. 김 이사는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요. 다친곳은 없었어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윤도아가 이번에는 주선오를 보았다.
“교진이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주선오가 대답했다. 하지만 곧이어 의문을 표했다.
“다 보고 계셨습니까? 누가 입장했었는지 정확하게 아시는 것 같군요.”
살짝 가시가 돋힌 목소리였다. 간이 시험이 시작되기 전 둘에게서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주선오의 말대로 윤도아는 시험을 치른 각성자들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가장 처음 입장한 사람이 안내자와 만나서 시험을 지켜보는 구조였습니다.”
윤도아는 간략하게 안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녀가 주사위를 굴려서 맵을 선택했고, 그 맵에 참여할 각성자는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라고.
“그럼 누나는 싸우거나 하지는 않은거야?”
윤도빈의 물음에 윤도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켜보기만 했어.”
“그렇군요. 역시 앞으로는 이런 방식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겠어요.”
안세인의 말에 주변에 있던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도아는 기관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향했다.
평소 인터뷰라면 피하고보던 그녀가 그들에게 향한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녀가 기자들을 찾은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간이 시험에 참여하고자 했던 각성자들과 의도치 않았지만 간이 시험에 참여하게 된 각성자들을 향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기자들은 처음으로 윤도아에게 제대로 된 질문 몇 가지를 던질 수 있었다.
[두 번째 간이 시험, 각성자들 무작위 차출되어 치뤄져]
[윤도아 각성자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해]
[윤도아 각성자, ‘이번 간이 시험을 클리어한 것은 모두 다른 각성자들의 덕이다’]
[모든 각성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 윤도아 각성자]
그렇게 두 번째 간이 시험은 끝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