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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4)화 (4/112)

#4

특이하게도 델로즈는 모든 가이드와 비슷한 수치로 매칭됐다. 전부 60% 내외. 정식 매칭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60% 내외는 센터에서 임시 가이드를 맺는 최소 수치였다.

센터에서도 처음 겪는 현상이다. 모든 가이드와 매칭률이 동등하게 나온다니. 연구원들도 그저 SS급이라 그럴 것으로 추측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센터는 조용한 전시 상황 같았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델로즈가 간택하는 가이드가 그의 임시 가이드가 된다. 그렇기에 매일 밤 델로즈의 침실에 몰래 파고드는 사람들의 전쟁이 더 치열해졌다. SS급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접근하는 중이다.

한편에서는 가이드들이 저렇게 적극적인 면이 있냐고 서운해하는 에스퍼들도 생겼다. 평소에 콧대 높은 가이드들의 행동에 충격받은 분위기였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그중에는 본인 능력이 부족한 탓이란 사실을 빠르게 수긍하는 자도 있었다.

개국 이래 처음으로 수치화된 SS급이다. 압도적인 능력치에 대다수 사람은 질투보단 호기심이 앞서겠지. 질투하던 이들도 금세 돌아서서 어느 가이드와 매칭될지 귀를 기울였다.

수업을 끝낸 반테온은 교재와 지시봉을 안아 들고 강의실 문을 열었다.

강의실 안에서 들리던 소음이 끊기자 조용한 복도에 그의 발걸음 소리만 울린다.

이제 내일이면 델로즈가 임시 가이드를 선택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SS급의 등장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던 분위기도 하루만 버티면 끝난다. 물론 정식 매칭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 화제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붕 뜬 분위기를 가라앉겠지.

복도를 걸으며 해가 떨어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붉은 노을이 점차 영역을 넓히고, 하얀 센터의 외벽을 쓸어내린다. 먼 곳부터 그림자에 먹히듯 어둡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항상 보던 하늘이 유독 짙고 붉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생길 것처럼, 묘하게 가라앉은 노을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흐려지는 하늘색처럼 딱딱했다. 최근 즐거운 일이 없었다. SS급의 출현으로 모두 다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지켜봤고, 혹시 어떤 사건이 일어나진 않을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덩달아 반테온의 행동도 조심스러워졌다. 문뜩 단말기 메인 화면에 펼쳐진 달력을 살펴봤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깨끗한 한 달 일정이 보였다.

‘오래간만에 외출이나 해볼까.’

그간 혼란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금욕 기간이 길었다. 오랜만에 야센을 방문할 생각으로 단말기 전원을 내렸다.

***

반테온은 마석의 기운을 녹여 만든 가발을 머리카락 끝에 붙였다. 완전히 접착되자 단정하던 짧은 은발은 화려한 장발로 변했다. 손가락 끝으로 쓸어도 접합부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생소한 감각에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평소 손에 닿던 매끈한 목덜미 대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걸렸다. 향락가에 교육자 모습 그대로 방문할 수 없기에 반테온이 야센을 갈 때 즐기는 변장이었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안경을 접어서 작은 탁자 위에 올리고, 짙은 갈색 렌즈를 착용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단정한 옷을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화려한 장신구 몇 가지를 더하자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인상이 바뀐다. 반테온은 그런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거울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얼굴 인식을 방해하는 귀걸이를 착용했다. 하룻밤 지나면 기억 속 반테온의 얼굴 대신 흐릿한 이미지만 남게 해줄 것이다. 그가 밤놀이를 나갈 때 애용하는 장치였다.

센터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거추장스러운 단말기를 집어 던진 후에 방을 나섰다.

태어나길 금빛 카펫 위에서 태어났다. 남들보다 부족한 것 없고, 바라는 것을 놓친 적도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굳이 본인의 욕구를 참으며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성욕 또한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끝까지 건드리지 않는 건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일 뿐, 그의 도덕성에 기반한 행동은 아니었다.

대신 종종 구미가 당길 때마다 센터에서 조금 떨어진 향락가를 방문했다. 그중에서도 지극히 제한적이고 한정된 자들만 방문하는 가게, 야센은 반테온의 주 놀이터였다.

야센에 도착하자 겉으로는 귀족의 기품, 예의를 주장하던 자들의 화려한 반가면을 쓰고 가게 곳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간접 조명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공간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점잖은 척 눈을 내리깔고 빠르게 서로를 주시했다.

반테온은 모여드는 시선을 익숙하게 즐기며 자리를 잡았다. 웨이터에게 적당히 도수가 높은 음료를 주문했다.

몇몇 강하게 꽂히는 시선을 골라낸다. 깊은 관계는 질색이다. 하룻밤으로 끝낼 수 있는 담백하고 가볍게 즐기고 헤어질 상대가 필요했다.

누구를 골라야 할까. 반테온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깔끔하게 떨굴 수 있는 뒤탈 없을 사람을 물색했다.

“여기 앉아도 돼요?”

가면 아래로도 확연히 보이는 말간 뺨을 가진 남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반테온이 거절하지 않자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연한 밀빛 머리가 움직임에 따라 포슬거리며 흔들린다. 헤픈 웃음을 지으며 반테온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발현자예요?”

“어떻게 보이는데?”

“에스퍼? 지능계 에스퍼?”

이곳에 방문하는 자 중 절반은 에스퍼나 가이드였다. 180이 넘는 큰 키와 특유의 단단한 분위기 때문에 반테온을 지능계 에스퍼로 착각하는 사람이 흔했다.

“왜 말을 안 해줘요? 에스퍼 맞죠?”

“글쎄.”

반테온은 잘못된 추론을 정정하는 대신 눈앞에 사람을 훑었다.

외모는 제법 취향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남자의 외형에 슬쩍 웃었다. 자신이 있으니 먼저 다가온 것이겠지.

당돌한 모습과 다르게 부끄러운 척 살짝 몸을 꼬는 행동이 보인다. 노린 듯 노골적인 태도도 나쁘지 않았다.

“알려주기 싫으면 다른 이야기 할래요? 그럼 전 뭐 같아 보여요?”

그 말에 반테온은 예쁘게 웃고 있는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발현자에게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색이 보이지 않고, 남자의 주변은 깔끔한 형태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에스퍼는 아니었다.

“넌 비발현자군.”

“앗, 어떻게 알았어요?”

“아는 방법이 있어.”

“신기하다. 다들 잘 모르던데. 기계로 감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나 봐요?”

에스퍼가 아니라면 남은 건 가이드와 비발현자였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가이드는 센터에 널린 에스퍼를 비교하며 좋은 패를 고르기 바빴다. 이런 구석진 술집에서 에스퍼를 찾아 물을 린 없으니 일반인이겠지.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야.”

“그래요? 그런데 형 되게 반말이 자연스럽네요?”

매정한 대답에도 남자는 기분 상한 기색 없이 맹랑하게 물어본다. 속셈이 빤한 질문에 티가 나지 않게 웃었다. 야센에는 반말을 쓰는 사람이 드물었다. 회원권만 있으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야센을 방문하는 손님 대다수가 귀족이었다.

귀족이라 하여도 모두 같은 위치와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다. 뒤탈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호 존댓말을 쓰거나 상대를 파악하려 드는 경향이 있었다.

상대의 지위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반말을 쓴다는 건, 서로 알게 됐을 때 아무런 문제 없는 상위 가문 출신이란 암묵적인 표시였다.

“저랑 같이 나갈래요? 괜찮으면 자주 봐도 괜찮아요. 저 혼자된 지 오래됐거든요.”

“글쎄.”

야센에 자주 방문했는지, 반테온의 위치를 빠르게 추론한 남자의 눈이 빛났다. 반대로 반테온의 의욕은 싸늘하게 식었다.

평소라면 작고 귀여운 남자는 딱 선호하는 타입이다. 손가락 마디에 주름도 없이 뽀얗고 불그스름한 상대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떨어질 보상을 바라며 눈을 빛내는 성격도 괜찮았다. 적당한 보상을 쥐여주고 깔끔하게 헤어지는 건 자신이 선호하는 관계니까. 그러나 오늘따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최근 잇속을 채우기 위해 SS급 주변을 하루살이처럼 맴도는 이들을 많이 봐서 그럴까. 솔직하게 드러낸 욕심에 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반테온은 앞에서 재잘거리는 상대를 무시하고 다시 주변을 훑었다. 대충 추임새만 넣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처음엔 의욕 가득하게 이야기하던 남자는 몇 마디 더 중얼거리더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지쳐 고개를 떨궜다. 반테온의 노골적인 거절에 결국 아쉬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잠시 조용해진 옆자리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영 매너가 없는 걸?”

“…….”

이번엔 다른 놈이다. 옆자리가 비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남자가 빠르게 의자를 차지했다. 흘낏 옆을 훑어본 시야에 시원하게 뻗은 목덜미가 보였다. 앉은키만 봐도 자신보다 클 것 같은 상대였다.

아까와 다르게 초면에 반말하는 상대를 응시하자 남자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갔다.

조명 아래 화려한 금발과 짙은 붉은 눈동자는 가볍게 행동하는 남자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다르게 말하자면 가볍고 귀찮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저 녀석은 취향이 아니었어? 괜찮아 보였는데.”

“…….”

“아, 이름을 먼저 알려줘야 하나? 난 로한이라고 불러. 물론 본명은 아니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서 열심히 떠드는 행동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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