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를 일 없을 것 같은데.”
“혹시라도 모르잖아? 오늘 밤 숱하게 부를지도.”
“잘못 찾아왔어.”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육체계 에스퍼보다 작다고 하나 평균 키를 훨씬 웃도는 반테온에게 이상한 욕구를 가지는 놈들이 나타났다.
귀엽고 작은 것들을 두고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테온은 평생 이해하기 힘든 성향이다.
손을 들어 방금 상대가 사라진 쪽을 가리켰다.
“괜찮아 보이는 녀석은 저쪽으로 갔으니 따라가 봐.”
“아, 사양할게. 더 좋아 보이는 걸 찾았거든.”
허락한 적도 없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눈을 맞춘다. 생글거리며 웃는 모습에 심기가 나빠졌다.
“상대가 없다면 나는 어때?”
“내 취향이 아닌 건 확실하네.”
“그거 아쉬운걸. 그런데 내 이름 들었는데 그쪽 이름은 안 알려줄 거야? 아니면 연락처라도 줄래?”
남자는 하나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치근덕댄다. 반가면 그림자 아래로 쭉 뻗은 콧날과 턱선이 보였다. 외모는 멀쩡해 보이는 녀석이니 상대를 찾기 어렵진 않을 텐데, 괜한 수고를 들이고 있었다.
얼음이 반쯤 녹은 보드카를 옆으로 치웠다. 술맛 떨어지는 저녁이다.
“관심 없으니 볼일이나 보러 가.”
반테온의 적나라한 거절에도 로한은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반테온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웃었다.
몸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봐도 옆자리에서 눈을 반짝이는 상대가 영 거슬렸다. 계속해서 꽂히는 시선에 결국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곳에 힘쓰지 말지그래.”
“아니, 정말로 아까워서. 내 어디가 맘에 안 들지? 얼굴은 아닐 테고.”
로한은 지금까지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 없다며 믿기 어려운 듯 되물었다. 어두운 가게 안에서도 환한 금발이 화려하게 흔들렸다. 분명 자신감이 넘칠만한 상대다. 특유의 강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도 그의 당당함에 한몫 보태고 있었다.
“난 작고 귀여운 쪽이 취향이야.”
“덩치가 문제야? 그런 건 불 끄면 보이지도 않을 거야. 예쁜 파란 눈동자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조명은 포기해 줄 수 있어.”
“나보다 큰 놈을 안는 취미는 없어.”
“아하.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안으면 되니까.”
요즘 왜 이리 귀찮고 미친놈들만 주변에 보이는 것일까.
직접적인 거절에도 떨어져 나갈 기미가 없다. 귀를 닫고 모르쇠로 응대하는 상대가 제일 번거롭고 진절머리 났다.
반테온은 절로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속으로 인내심을 다졌다. 머리를 비우러 온 곳에서 더 짜증만 돋게 생겼다.
“여러 번 거절한 것 같은데. 그만 가보는 게 어때? 같이 놀 상대는 많잖아.”
“진심이라니까. 나 원래는 이렇게 질척이는 성격 아니야.”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아니 진짠데….”
원래부터 질척인다고 말하고 붙는 바보 놈이 있을 리가. 반테온은 자신의 말에 진심으로 억울한 눈빛을 보내는 로한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안 일어나면 자리를 옮기는 수밖에. 어차피 오늘 꼬이는 놈들을 보니 즐거운 시간은 글렀고, 적당히 개인실에서 술이나 마시고 돌아가려 했다.
“벌써 갈 거야?”
“…….”
“한 번만 같이 가자. 후회 없게 해줄게.”
“진짜 끈질기네.”
“나 잘한다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흥미로운 일을 발견한 눈빛이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비켜.”
“뭘 좋아해? 술? 섹스? 작은 애가 좋으면 세 명이서 할까?”
“…….”
말을 말자. 대화할수록 더 저질스러운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반테온이 VIP 실로 향하자 반사적으로 로한이 반테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반테온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어깨에 올려진 손목을 틀어쥐고 상대의 상체를 당겨 등에 얹고 그대로 내리꽂았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던 가게에 큰 소리가 울리고 주변인의 시선이 모인다.
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로한의 반가면 너머로 동그랗게 뜨인 눈이 보였다. 반테온은 로한의 가슴팍에 발을 올려 눌렀다. 워낙 체격이 튼튼해 보이니 이 정도로 힘들진 않겠지. 로한은 반항하지 않고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발정 난 개새끼처럼 굴지 말고 꺼져.”
“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넋이 나간 로한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된다. 경비병 몇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소리치려던 경비병은 상황을 파악하고 반테온과 로한 사이를 막아섰다.
경비병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반테온은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귀찮은 놈도 얽히고, 경비병도 늦게 반응했다. 애용하던 가게에 대한 실망감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뒤쪽에 누운 로한을 붙잡는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위층에서 서둘러 내려온 총지배인이 반테온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가면 속 반테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괘, 괜찮으십니까?”
“요즘 관리가 안 되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돌아가실 거라면 가드라도….”
“됐습니다.”
다시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총지배인을 뒤로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문을 벗어났다. 오랜만에 즐기러 와서 이런 일이나 겪다니. 일진이 영 사납다.
반테온은 최근 겹치는 악재에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될 때는 무슨 일을 해도 안 된다더니. 딱 그 꼴이다.
방금 사람을 내다 꽂은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이 정도 동작에 무리가 온 것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방금 행동의 여파가 아니었다.
“제길…….”
낮게 욕을 지껄이며 자신의 손바닥을 지그시 바라봤다. 익숙한 혈관의 팽창과 빠른 순환의 느낌. 손가락 끝까지 펌프질 되는 박동이 시간이 지나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쩐지 질리도록 붙는다 싶더니. 이건 가이딩 한 직후의 반응과 똑같았다.
머리를 식히러 간 곳에서도 에스퍼가 꼬여서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반테온은 방금 본 남자를 다시 떠올려 봤다.
가이드나 일반인이 다른 사람의 발현 여부를 육안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는 상식 속에서 반테온만 가진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반테온은 남들이 읽지 못하는 발현자의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에스퍼가 서로의 기운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뚜렷하게 형체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아는 사람은 자신의 동생과 테아로트밖에 없다. 센터에도 숨기고 있는 비밀이었다.
기운은 상대의 급이 낮을수록 쉽게 보인다. 하지만 지척에서 본 로한 주변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테온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갈무리가 잘되어 있는 기운과 잠깐의 접촉으로 손바닥이 저릿할 정도의 파급력이다.
적어도 A급 중에 상위, 아니면 S급.
기분이 더 더러워진다. 왕국 전체에 5명뿐이라는 S급 에스퍼다. 그 귀한 분이 왜 길가 돌멩이 굴러가듯 발밑에 차이는 건지 모르겠다.
덩달아 주변에 있는 돌멩이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SS급 에스퍼. 가장 번거로운 돌멩이다.
잠시 잊었던 센터의 일이 떠올랐다. 내일 그 SS급이 임시 가이드를 선택하면 한바탕 폭풍이 또 몰아칠 것이다. 안 그래도 시끄럽던 센터가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미리 스트레스 좀 풀까 했는데 이 꼴이다.
반테온은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쉬었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돌려보자 애써 노력했다.
생각만으로 불쾌한 상황이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누가 되든 임시 가이드가 결정되면 요란스러운 물밑 전쟁은 소강될 것이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하루빨리 결판내는 것이 더 좋았다.
가게 앞 공터에 잠시 서서 시원한 밤바람을 맞았다. 차가운 바람이 반테온의 뺨을 식히자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가게 입구로 기사를 불러 센터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중 머리 위에 흐린 달무리가 보인다.
은은한 커튼을 드리운 듯 조용한 분위기다. 조금 전, 가게의 소란이 거짓말인 양 차분한 공간이다.
어차피 계획했던 일은 허사로 돌아갔고, 바람도 시원하니 오랜만에 걷기 좋은 날씨다. 반테온은 잘 정비된 도로를 거슬러 센터로 향하는 지름길로 발을 옮겼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은 발목 위로 올라오는 잔디와 잡풀로 가득했다. 안개가 옅게 낀 돌길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발목 아래로 느껴지는 흙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내일은 비가 올 것 같다.
비 오는 날이 싫지 않았다. 세찬 장대비는 시끄러운 소리도 붕 뜬 분위기를 잡아줄 것이다. 지금 걷는 반테온의 발걸음 소리처럼.
흙길을 걸어가자 눈앞에 센터의 헐거운 울타리가 보였다. 지은 후 한 번도 수리하지 않은 것처럼 녹슬고 성긴 펜스였다. 느슨한 펜스 한쪽을 허리 숙여 통과했다. 산길에 연결된 외곽이라 그런지, 센터 내부에 들어왔음에도 풍경은 그 전과 다르지 않았다.
잔풀이 발목 위로 올라오고, 수풀이 시야를 가리는 좁은 지름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느긋함을 만끽하며 걸었다. 그렇게 여유를 즐기는 중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흐린 날이면 귀찮을 정도로 울어대는 동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개구리도, 산새들도, 심지어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바람에 실려 온 소리는 숲에서 나는 소음이 아닌, 작고 낯선 신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