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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6)화 (6/112)

#6

-…흐…….

아주 가늘고 옅은 소리다. 수풀 흔들리는 소리인지 짐승의 울음소리인지 모를 미세한 음성이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반테온은 가슴팍에 넣어둔 호신용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이미 센터 외곽을 들어왔으니 사람이라면 센터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다른 경우도 예상해야 했다.

왕국의 전력이 모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센터다. 지금까지 침입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이드들이 머무는 숙소를 제외하면 경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점을 노린다면 침입자가 들어오기에 무엇보다 좋은 시설이기도 하다.

“…윽…….”

점차 소리가 커진다. 이제 선명하게 사람의 목소리로 판명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혹시나 밀회를 즐기는 중인가 고민했으나 그 생각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렇게 안개 끼고 물기 머금은 수풀에서 그 짓을 할 만큼 혈기왕성한 놈들…이 맞긴 하지만 센터에는 다른 실내 공간이 많았다. 굳이 축축한 수풀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

“누…구?”

조금 더 가까워지자 상대도 반테온을 눈치챘는지 바닥을 긁는 거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행히 반테온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반테온은 들었던 무기를 다시 가슴팍에 넣고 소리를 향해 다가간다. 시야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풀밭에 누워있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한 눈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남자의 주변을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기류와 갈무리하지 못하는 기운이 반테온을 짓누르듯 다가온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일진이 더럽더니 이 정도로 꼬일 필요가 있을까.

반테온은 드물게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널브러진 사람 앞에 가만히 섰다. 사방에 넘실대는 기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상대의 모습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편한 잠옷 차림이다.

어쩌다가 센터 외곽까지 잠옷 바람으로 흘러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자발적인 행동으로 보이진 않았다.

남자는 반테온에게 누구냐고 묻고 나서 의식을 잃었는지 곁에 다가가도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 흐릿한 실루엣만으로도 무리 없이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델로즈.”

최근 반테온이 겪는 두통의 80% 지분을 차지하는 주범이었다.

눈앞에 남자는 소문으로 듣던 대로 훤칠하게 생겼다. 누워있어도 넓은 어깨와, 각진 턱, 높게 뻗은 콧대까지. 모두 들리는 이야기 그대로였다.

용병대 대장이라기에 인상이 거칠고 지저분할 거로 예상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누가 말하지 않으면 귀한 핏줄이라 여기고도 남을 것이다. 날카롭게 깎아낸 까만 조각상 같다.

조금 전, 대비도 없이 에스퍼에 닿았다가 호되게 고생한 반테온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들어 델로즈의 머리를 눌렀다. 그가 힘주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정신이 들 기색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심정 같아선 여기서 엎어져서 얼어 죽든 말라죽든 그대로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에 반테온은 팔짱을 끼고 델로즈를 지켜봤다.

요동치는 기운은 곧 폭주로 이어질지도 모를 만큼 거세게 움직인다. 곧 델로즈는 자신의 기운에 눌려 폭주할 것이고, 덩달아 가까운 곳에 있는 센터도 모두 휘말린다.

먼 곳에서 아직 불이 켜진 센터의 모습이 보였다. 센터에는 에스퍼 가이드 외에도 수많은 직원이 근무했다. 동시에 상주하고 있는 인원은 수만 명.

SS급의 폭주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모른 척 지나가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성가시게 되었다는 생각에 반테온은 머리를 긁었다.

“진짜 귀찮게 하네.”

역시 존재 자체가 민폐다. 반테온은 투덜거리면서도 델로즈의 옆에 앉았다. 물기 가득한 풀잎이 무릎 주변을 축축하게 적셨다. 살갗에 와 닿는 습기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조금만 하자. 조금만.

이 녀석의 무사 평안을 빌어주며 힘을 쓸 생각 따윈 없다. 기력이 흘러넘치도록 충분해도 쓰고 싶지 않은 상대다. 그러니까 최소한 폭주만 막을 생각이다.

손만 가까이 가져갔을 뿐인데, 델로즈의 기운이 반테온의 팔을 휘감듯 들러붙었다. 목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향해 달리듯 거칠게 돌진하는 기세에 반테온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접촉하지 않아도 이 정도라니.

꽉 다문 잇새로 절로 쓴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제대로 부여잡고 천천히 기운을 진정시켰다. 의식 없는 상대를 가이딩 하는 건 위험한 짓이다. 하물며 급이 이렇게 높으면 순식간에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반테온은 그와 닿지 않은 상태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일반적인 가이딩은 세 단계로 나뉘었다. 표피 접촉과 점막 접촉, 그리고 최후의 방법으로 성관계를 통해 이뤄진다. 반테온은 세 가지 방법 중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하나 남아 있다. 에스퍼의 기운을 눈에 볼 수 있는 반테온만 가능한 방법이다.

에스퍼는 가이드와 같은 장소에만 있어도 진정되는 효과가 있다. 매칭률에 따라 효율은 다르지만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 그걸 이용해서 에스퍼의 기운을 인도한다면 닿지 않아도 가이딩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다행히 반테온과 매칭률이 나쁘지 않은지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도 델로즈의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 정도 효과면 직접 접촉으로 가이딩 하면 빠르게 안정될지도 모르나 여전히 그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폭주 중인 에스퍼와 접촉하는 건 자살 행위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자 가이드가 다가왔다는 이유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팬 놈이 눈을 뜨고 반테온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죽어 가는 놈 살려줬다가 자신이 죽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만. 이 요동치는 기운이 폭주를 벗어날 때까지만 가이딩 하자. 아침에 누군가 발견하면 센터로 데려가겠지. 그 전에 정신이 들면 제 발로 돌아가거나. 그것까지 반테온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하늘을 뒤집어 놓을 듯 요동치던 기운은 어느새 거친 파도로 바뀌고 잔잔한 호수처럼 흐른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델로즈의 손가락이 천천히 꿈틀거리는 걸 확인하고 반테온은 숙였던 허리를 들었다. 이 정도면 내버려 둔다 해도 폭주 위험은 없어 보였다.

오랜 시간 숙였던 몸이 뻐근하다. 약한 현기증도 일었다. 닿지 않았다고 해도 강한 기운을 잠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델로즈가 손으로 반테온의 팔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헉.”

몸속에서 천천히 흘러나가던 기운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마개가 열린 욕조 아래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찰랑거리던 반테온의 병이 순식간에 바닥까지 비워졌다.

눈앞에 시야가 흐려지며 뇌가 녹을 듯 어지럽다. 세상이 돌고 하늘과 땅이 섞였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은 반테온이 가슴팍에 손을 넣자 딱딱하고 매끈한 형체가 잡혔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챙긴 작은 호신 기구다. 강한 전기 자극으로 상대를 기절시키는 미니 충격기다.

‘SS급에게도 통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망설일 새 없이 충격기의 전원을 누르고 델로즈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지지지직.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델로즈의 몸이 작게 경련하더니 반테온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빠진다. 반테온은 서둘러 호신 기구를 회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등 뒤에서 얕게 신음하는 델로즈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테온은 주변으로 기어가 옷가지와 소지품을 챙겼다.

“너… 가이…드….”

델로즈의 목소리가 점차 뚜렷해졌다.

귀신같은 놈. 출력을 최대로 올렸는데 겨우 몇 초밖에 안 통하다니.

반테온은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정신을 차렸어도 몸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사이 도망가야 했다.

움직이기 힘든 건 반테온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벗어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과하게 힘을 뺏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얼핏 뒤를 보자 그사이 다시 정신을 잃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델로즈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악물고 겨우 지친 몸을 이끌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었다. 자신의 숙소가 있는 가이드 동이 시야에 보이자 참았던 숨이 내뱉었다.

어느새 어두웠던 하늘에 붉은빛이 섞였다. 동이 트고 있었다.

“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숙소로 돌아온 반테온은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며 머리에 붙인 가발을 쥐어뜯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자마자 색이 바뀌고 축 늘어지는 가발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큰일 날 뻔했다. 그대로 델로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오늘 밤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겉옷도 벗어 던지고, 거추장스러운 바지도 풀었다. 시야 인식 방해 장치까지 집어 던진 후에야 전신에 힘이 풀렸다.

제대로 잠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지금은 물 한 모금 마실 기력도 남지 않았다.

최후까지 남은 정신으로 침대 위에 환하게 켜진 조명을 눌렀다. 밝은 조명이 암전되는 것과 동시에 겨우 유지하던 정신도 까맣게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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