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헤이- 지각생.”
“…….”
“어제 아주 즐거운 밤을 보냈나 봐. 처음으로 지각도 하고.”
“…시끄럽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시간은 오전을 모두 지난 오후 1시였다. 기운을 쪽쪽 빨린 육체는 기절하듯 잠들었고, 비가 꾸덕꾸덕하게 내리는 날씨 때문에 해도 뜨지 않는 오후까지 깊이 잤다.
뒤따라오며 약 올리는 테아로트를 무시하고 반테온은 자신의 서재에 앉아 몸을 깊게 기댔다. 눈꺼풀이 철근처럼 무겁다.
그런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테아로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야? 이렇게 피곤해하는 건 처음인데.”
“나도 피곤할 때가 있어.”
“너 전에 천년열에 걸렸을 때도 멀쩡한 얼굴로 끝까지 수업하고 응급실 갔잖아.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오전 일정을 날린 게 신기해서 그러지.”
그랬다. 오전 조례를 빠졌는데 센터장까지 괜찮냐고 연락이 왔으니 주변 반응은 오죽할까. 경위서 대신 걱정을 한 무더기로 듣고 온 상황이었다. 실컷 자고 일어났음에도 몸은 물먹은 휴지 덩이처럼 늘어졌다.
이왕 빠진 거 남은 수업도 모두 휴강 처리하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오후 수업 휴가계 좀 대신 작성해줘.”
“쯧쯧. 진짜 펜 들 힘도 없나 보네.”
“세 번째 서랍 안에 빈 양식 있다.”
반테온이 위치를 설명해도 테아로트는 자리에 멍하니 앉은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반테온처럼 몸을 뒤로 기대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거 안 써도 돼. 어차피 오후 수업 전체 휴강이거든.”
“뭐?”
“넌 몰랐겠지만, 오전 수업도 다 휴강이었어. 너 단말기 확인 안 했지?”
그 말에 단말기를 확인하자 짧은 전달 사항이 적혀 있었다. 센터 내 불미스러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3일간 수업을 휴강하고 센터 전체 감사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어쩐지 경위서 쓰라고 안 하더라.”
“저 공지를 보고 그런 걸 먼저 생각하다니. 진짜 대단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입이 멈췄다. 묻지 않아도 뻔했다. 어젯밤에 쓰러져 있던 그 거적때기 같은 SS급의 일이겠지.
“어젯밤에 델로즈가 습격당했어. 미리 약까지 먹이고 제대로 준비한 기습이었나 봐. 에스퍼의 힘을 잠시 차단하는 약이라던데 그것 때문에 어제 연구실이 다 뒤집혔어.”
어쩐지 심하게 불안정하다 싶었는데, 델로즈의 기운을 고의로 흩트려 놓은 것이다. 그제야 어제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누군지 몰라도 델로즈가 임시 가이드를 지정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델로즈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처리하려는 의도였겠지. 어리석은 짓이야.”
“SS급이 약으로 막혀?”
“그러니까 더 심각한 거야. 불법적인 약품을 섞었을 확률이 높다더라.”
반테온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약하게 돌렸다.
“범인은?”
“몰라. 흔적도 안 남아서 곤란한 상태.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던데.”
“한동안 또 시끄럽겠네.”
“오늘 오전에 이미 C동이 박살이 났어. 복구하는 데 5달은 걸린대.”
가장 싫어하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가 길어진다는 이야기에 불편하던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명색이 SS급이라는 놈이 약 하나 못 알아채서 이 사달을 만들다니.
미운털이 한 번 박히니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죄 없이 약을 먹은 델로즈마저 못마땅하게 보였다. 아니, 죄가 없진 않았다. 기습의 또 다른 피해자인 반테온은 어젯밤 기억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 살려주려고 했더니 동의 없이 남의 기운을 맘껏 빨아갔다. 가이드 인권위에 신고했다면 보름은 독방에서 재교육받을 중죄였다.
순식간에 온몸의 기운이 통째로 빠져나가는 느낌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불쾌하다. 어젯밤 도망치기 급급하여 깨닫지 못했던 위기감에 이제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순식간에 주도권을 뺏기는 강제력은 잊기 힘든 감각이었다.
“그래서 델로즈의 임시 가이드 말이야. 지정을 미뤘어. 무기한으로.”
“……그렇겠지.”
이런 사건이 있었으니 일정이 미뤄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임시 가이드를 지정하는 건 섣부른 짓이다. 하지만 무기한이라니. 예상보다 길어진 상황에 반테온의 입맛이 썼다.
“C동을 부쉈으면 힘도 많이 썼을 텐데 빨리 가이드를 지정하는 게 좋지 않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데? 옆에서 봤는데 소름 돋더라. S급이랑 차원이 달라.”
“그 정도인가?”
S급에서 조금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테아로트가 이렇게 표현할 정도라면, 확실히 기존 에스퍼와 다르단 소리였다.
“적이라고 생각하면 절망적일 정도였어. 자연재해 수준이야.”
“하….”
쓸모없이 성능만 좋은 녀석이다. 반테온은 기쁘지 않은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금방 끝날지도 몰라.”
테아로트는 우울한 반테온의 심정과 다르게 가볍게 말했다.
“델로즈가 이번엔 다른 조건을 제시했거든. 좀 더 세부적으로.”
“조건이 뭔데?”
“긴 은발을 가진 여성 가이드라고 지정했어.”
“…은발?”
불길한 예감에 괜히 되물었다. 테아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은발이 귀하긴 해도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조건에 맞는 사람이 대충 센터에 20명 정도 있던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근데 왜 하필 은발일까? 뭐, 이왕 고른다면 이상형으로 고르는 게 좋지. 남자답네.”
반테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테아로트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임시 가이드가 결정되는 건 시간문제라며 기뻐했으나 반테온은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다. 델로즈가 은발을 찾는 이유를 너무 확실하고,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망할 놈.”
“어, 너 방금 욕했어?”
“미치겠네.”
“몸이 많이 안 좋아? 숙소로 돌아갈래? 데려다줄까?”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전기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도 반테온이 분장한 긴 은발을 기어코 기억한 모양이다. 바퀴벌레보다 징글징글한 놈이라 속으로 욕하며 한탄했다.
***
“대체 무슨 변덕입니까.”
“내가 뭘.”
“건물을 박살 냈으면 충분하지. 갑자기 은발은 왜 찾아 뒤지는 건데요.”
델로즈는 부하가 불만스럽게 내뱉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센터에서 정리해 준 파일을 열었다.
“원래 은발이 취향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아니 취향이란 게 있었습니까? 평생 다른 사람 외모에 관심도 없던 분이….”
“시끄러워.”
용병대에 있을 때부터 대원으로 있던 페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페턴은 이번 검사에서 D급 에스퍼 판정을 받아 따라온 귀족의 사생아 출신이었다. D급이면 왕립 에스퍼 센터 중앙부에 들어올 실력은 되지 않으나 델로즈의 수족으로 특별히 입소했다.
모든 이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 왕립 에스퍼 센터에 들어왔지만, 페턴의 위장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용병대에 있을 땐 과묵하고 합리적이던 자신의 대장이 이곳에선 하루가 다르게 사고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는 된다. 설탕에 꼬이는 벌떼처럼 주변을 맴돌며 달려드는 가이드들도 지겹고,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눈깔들은 페턴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대장이 새벽에 흙투성이가 된 잠옷 꼴로 찾아와서 기습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했을 땐 속으로 손뼉 치며 환영하기도 했다.
아예 건물 전체를 날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대장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보복이다. 그걸 알기에 꼬장꼬장한 센터장도 죄송하다 사과할 뿐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않은가. 다짜고짜 긴 은발의 가이드와 매칭을 할 테니 자료를 내놓으라는 대장의 행동에 페턴의 입이 딱 소리 나게 벌어졌다.
임시 가이드도 지정하기 싫다고 시간을 미루고 미루던 분이 무려 정식 가이드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차라리 대장이 평소에도 은발을 선호하였기에 가이드라면 반드시 은발과 매칭 하고 싶다고 남자답게! 화끈하게! 주장했다면 우리 대장 멋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욕구 해소가 필요할 때, 다른 조건 없이 곁에 있던 사람과 밤을 보내던 사람이 딱 잘라 은발, 거기에 쇄골과 가슴 사이 기장이라는 구체적인 머리 길이까지 지정하는 모습이 믿기지 않게 낯설었다.
함께하던 다른 용병대 놈들에게 말하면 페턴이 약이라도 한 게 아니냐고 의심할 것이다.
“도착한 건 이것뿐인가?”
“일단 왕립 에스퍼 센터에서 보낸 건 그 정도입니다. 다른 센터에 있는 자료도 달라고 할까요?”
“아니. 확실히 이곳 사람이야.”
마치 정해진 사람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페턴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되물었다.
“언제 본 사람입니까? 다른 특징이라도 있으면 찾기 쉬울 것 아닙니까. 설마 대장이 기억 못 하는 건 아닐 테고요.”
넘치는 능력만큼 기억력도 괴물 같았으니 잠시 스치듯 본 사람이라도 잊을 리 없었다. 그러나 델로즈의 찌푸린 미간이 깊어질 뿐이었다.
“흐려서 못 봤다.”
“대장이 흐려서요?”
“그 새벽에 봤으니까.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그걸 보고 있을 정신이 어디 있어.”
“아하….”
그 기습이 있던 새벽에 만난 가이드를 찾고 있는 거로군. 생명의 은인이라면 이렇게 애타게 찾을만하다. 드디어 이해되는 대답에 페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