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마운 분이군요. 찾으면 꼭 사례해야겠습니다.”
“아니.”
“네?”
“찾으면… 두고 봐야지.”
델로즈는 자신의 폭주를 막아준 고마운 사람을 떠올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페턴은 괜히 자신의 목덜미가 시린 느낌에 손으로 벅벅 긁었다.
“은인을 뭐 그렇게 살벌하게 떠올립니까.”
“그래. 은인이지. 아주 귀한 분이야.”
델로즈는 자신의 옷깃 사이를 쓰다듬었다. 매끈한 피부 사이에 거칠고 메마른 흔적이 잡혔다. 부상이 있으면 치유해주겠다는 치료계 에스퍼를 거절까지 하면서 남겨둔 상처였다.
“겨우 살려놓고는 충격기로 지지고 사라졌단 말이야. 무슨 이유인지 반드시 들어야겠어.”
“하, 하하… 막상 살려놓으니 무서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알다시피 대장이 그렇게 순하게 생긴 얼굴은….”
“페턴.”
“…맞죠. 이렇게 신사적인 분이 없죠.”
빠르게 말을 바꾸는 페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델로즈는 그런 부하의 심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은발의 가이드를 떠올렸다.
흐린 달무리 너머로 얼핏 보인 실루엣과 뒷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진 걸 보면 무리해서 가이딩을 한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SS 급의 폭주를 막을 정도면 상대도 위험을 감수한 가이딩이었을 텐데, 왜 황급하게 도망친 것일까.
델로즈는 그때의 기억에 입가를 굳혔다. 자신의 몸을 지배하던 감각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 속에 고통 없이 편안한 순간은 없었다. 항상 바늘 위를 걷는 듯 신경이 예민했다. 센터에 와서 가이드를 만나도 잠깐의 평안함이 찾아올 뿐, 원초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은 평생 이렇게 살아야겠지. 조금이라도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아 헤매며 떠돌다가 첫 번째 에스퍼처럼 폭주하고 죽을 거라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겪은 폭주는 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교육을 받을 때 남 일처럼 여겼던 상황은 단순히 말할 수 없는 지옥이었다.
온몸이 폭발할 듯 뜨겁게 팽창되면서 동시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괴로웠다. 바람 부는 소리, 이슬 떨어지는 소리가 굉음처럼 고막을 때려 부쉈다. 목을 넘어가는 침을 삼키는 행위마저 드릴질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이런 것이 폭주라면 길어지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자신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귓가에 천둥이 내려치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밟는 수풀 소리는 부드러웠다. 닿을 듯 말듯 다가온 손가락이 델로즈의 주변을 간지럽혔다. 고통스럽던 모든 감각이 요동치듯 그 사람에게 향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사람이 자신을 구원할 자라는걸.
제발 자신을 잡아 달라고, 이 고통에서 꺼내 달라고. 움직이지 않는 몸뚱어리를 원망하며 애원했다.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자제력을 잃고 매달렸을지도 몰랐다.
닿지도 않은 그의 존재만으로 고통이 무뎌진다. 손가락 몇 개를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영원히 닿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그제야 온몸에 태울 듯 타오르던 불덩이가 꺼졌다.
페턴에게는 전기 충격기로 쓰러진 상황을 억울하게 말했으나 그 부분을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렇게 기절하지 않았다면 가이드의 몸이 쓰러질 때까지 폭포수처럼 기운을 빨아들였을 테니까. 델로즈가 정신을 차린 후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진 가이드나 부상자가 없는지 확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무실에 입원한 가이드는 없었다. 새벽에도 제 발로 걸어서 떠났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상태란 뜻이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은발의 가이드를 찾는다는 소문이 센터에 쫙 퍼졌으니 이미 당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피하는 것일까.
델로즈는 자신의 턱을 괴고 발을 까딱였다. 폭주 직전까지 갔던 몸이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건물을 하나 박살 낸 뒤에도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가득 찬 컵처럼 충만했다.
지금까지 받았던 가이딩과 질적으로 달랐다. 어떤 가이드와 만난 후에도 이렇게 개운하게, 모든 고통이 날아간 순간은 없었다. 그의 인생에 처음 겪는 평안이다.
“그럼 확실한 건 은발인 것과 머리가 길다는 부분밖에 없습니까? 다른 점은요? 안경을 썼다던가 귀걸이를 했다던가?”
“둘 다 없었어.”
“그러면…. 혹시 남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귀족 여성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귀를 뚫었다. 귀걸이를 하지 않은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델로즈는 그 타당한 의견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왜 단언하십니까. 본 거라곤 실루엣이랑 뒷모습밖에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전신도 아니고 반신만.”
페턴이 되물었다. 델로즈는 누운 채로 멀어지는 뒤통수만 봤다고 말했으면서 가이드가 여자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귀족은 남자 중에 머리를 기르는 자도 있으니 따지자면 남자 가이드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사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델로즈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남자일 리가 없지.”
“그러니까 귀를 뚫지 않은 여성이….”
“남자에게 그런 긴 머리가 어울릴 리 없잖아.”
“네?”
제가 방금 잘못 들은 겁니까? 하고 되묻는 페턴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팔짱을 꼈다.
흐릿하지만 델로즈는 자신의 눈에 잠시 스친 모습을 잊지 않았다. 연한 달빛이 역광으로 내려오고, 부드러운 은발이 커튼처럼 드리웠다. 그 사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얼굴은….
“그렇게 빛나는 사람은 처음 봤어.”
“헉.”
“뭘 그렇게 놀라.”
“드디어 우리 대장이…….”
델로즈는 과장되게 눈물을 글썽이는 페턴을 발로 찼다. 아이고, 아이고 엄살을 부리며 바닥을 뒹구는 페턴을 무시하고 델로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들갑 떨기는.”
“안 그러게 생겼습니까. 제 입장이 되어 보십쇼.”
“시끄러워. 잔말 말고 찾기나 해.”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우리 형수님이 될 분인데 제가 꼭 모셔오겠습니다.”
“범인도 좁혀지는 대로 보고하고.”
가이드를 찾는 것도 급하지만, 델로즈에게 약을 먹이고 기습한 놈들도 척살해야 했다.
이미 약이 들어간 음료를 전해준 녀석은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성급히 처리한다고 뒷배를 제대로 묻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 때문에 귀찮게 처음부터 모두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이다.
어차피 고생은 델로즈가 아니라 센터에서 할 것이다. 납득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센터 전체를 엎을 예정이니까.
센터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를 뿐, 귀족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하는 장소 아닌가. 델로즈의 입장에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없앨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의 가이드만 찾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센터를 모조리 밀어버리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다.
델로즈의 입꼬리가 진득하게 올라갔다.
***
침대에 오래 누워있어 찌뿌둥한 몸을 쭉 당겼다. 어깨와 손목까지 돌리자 전신에 혈류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반테온은 이틀의 휴강 후 오랫동안 아껴놨던 연차를 썼다. 일주일이라는 귀한 휴가 동안 잠만 자니 그제야 체력이 회복된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놈이다. 가이딩 한 번에 일주일이라니. 심지어 제대로 진행하지도 않았다.
반테온이 쉬는 사이 센터가 몇 번 뒤집혔다고 한다. 평소 같으면 그 SS급이 무슨 난동을 피우든 느긋하게 천박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방관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기에 반테온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원을 걸으며 산책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델로즈 생각이 가득 찼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은인을 찾는 정도가 아니었다. 운명의 상대라도 찾는 듯 미치광이처럼 주변을 헤집었다. 정신이 없던 상태에서 짧게 만난 가이드를 그리 찾아 헤맨다니 영문 모를 일이었다.
‘혹시 매칭률까지 높은 건 아니겠지?’
불길한 가정이 떠오르자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의 매칭 테스트에서 일관적이던 결과가 반테온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상태가 극악이었으니, 그 평범한 가이딩이 뇌리에 박혔을 거라 마음속으로 애써 되뇌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멀리서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반테온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소델 선생님.”
“다행이에요. 사실 찾던 중이었거든요.”
소델 선생은 손에 쥔 단말기를 내밀었다. 수신자에 반테온이 찍힌 화면이 멈춰있었다. 그 말대로 반테온에게 쪽지를 보내려다 멈춘 것이다.
“방금 센터장님 허락받고 오는 길인데요. 오늘 하루만 3단계 수업 좀 대신해 주세요.”
“전 초급반은 맡아본 적이 없는데 괜찮습니까?”
“음…. 자습이라도 괜찮아요. 제가 너무 급한 일이 생겨서….”
소델 선생은 곤란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 고개 숙였다. 연차를 낸 사람에게 대리 수업 요청이라니, 상당히 무례한 이야기였다. 그걸 아는지 부탁하는 소델 선생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른 초급반 선생님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토벌대 구성한다고 지원한 선생님들이 많으셔서 시간이 비는 분이 없으세요.”
“아, 그랬었죠.”
폐광에 새로 발견된 던전 때문에 활동 가능한 인원이 많이 빠졌다. 학생을 따라간 선생님도 많기에 여유 인원이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