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쉬는 날에 대리 수업을 하는 건 반갑지 않았지만, 센터의 상황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맡은 에스퍼가 없는 반테온은 토벌대 파견 1순위였다. 하지만 잘난 가문 덕에 아무도 반테온에게 토벌대에 지원해달라, 함께 가자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동안 토벌대가 생겨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번 토벌대는 여유 인원을 모두 차출할 정도로 규모가 큰 모양이었다.
비공식적인 가문의 권력으로 센터에서 편안하게 두 발 뻗고 자고 있으니 이 정도 협조는 당연히 감수해야지.
“알겠습니다. 수업 자료를 보내 주세요.”
“죄송해요.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야 해요.”
“그런 사정이면 어쩔 수 없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반테온은 대외적 미소를 띠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소델 선생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다행이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 지금은 임시로 F동에서 수업하고 있어요. 원래 수업하던 C동은 아직 복구 중이거든요.”
“아.”
“그럼 3시부터 수업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소델 선생은 반테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부모님 문제라면 마음이 급한 것도 어쩔 수 없지.
멀어지는 소델 선생과 반대편으로 걸으며 반테온은 자신의 단말기를 꺼냈다. 빨갛게 표시된 일정표를 열자 그 위로 소델 선생님이 급하게 보낸 수업 자료가 갱신되었다.
‘F동 3시 대리 수업’
비어있는 오후 칸에 새로 올라온 일정을 확인하던 손이 멈췄다. 델로즈가 부숴버린 C동에서 진행되던 수업이라는 말에 괜히 근거 없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설마. 아니겠지.
한 동에서 진행되는 수업만 10개가 넘는다. 하필 그 에스퍼의 수업에 들어갈 확률은 계산할 필요도 없이 낮았다.
요즘 너무 예민해진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반테온은 서재에 들러 3단계 교재를 꺼내 챙겼다.
***
“세상에… 반테온 선생님이다.”
“와, 나 처음 봐.”
문을 열자 서로를 마주 보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누군데?”
“있잖아. 에슬란테.”
“아!”
낯설지 않은 반응이다. 지금이야 반테온의 수업에 익숙해진 학생도 많지만, 처음엔 에슬란테 가문의 직계가 선생님을 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새로운 반응에 그때가 떠올랐다.
“조용.”
교탁을 두 번 내려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중에 참기 힘든지 작은 소리로 옆을 보며 중얼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반테온은 처음 들어온 강의실을 훑어봤다. 초급 단계라 그런지 반테온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보다는 나이대가 어리다. 나이가 제일 많은 애가 겨우 20살 남짓이고 대부분 10대 중반이 많았다.
작고 어린것들은 귀여워도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취향은 없었다.
‘재미있는 일은 없겠네.’
반테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책을 펼쳤다. 눈감고도 설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을 차례대로 나열하며 스크린에 펼쳐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97페이지부터 시작한다.”
반테온은 천천히 수업을 진행했다.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평범하게 수업이 진행되자 C동 강의였다는 말에 괜히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된다. 델로즈는커녕 다 어린아이들 아닌가.
수업은 어려울 것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화면을 짚는 지시봉 소리와 차분한 목소리만 강의실을 떠돌고 어느덧 예정된 시간의 절반이 지났다.
-드르륵.
평화롭던 강의실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모든 시선이 입구를 향하고 조용하던 강의실에 숨 막힐 듯 무거운 공기가 더해졌다.
정작 뒤늦게 강의실에 들어온 사람은 태연하게 걸어와 빈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착석했다.
잠시 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쥐색 머리의 남자만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조금… 늦었네요”
반테온이 빤히 응시하자 쥐색 머리는 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조용하게 걸어서 먼저 들어온 사람 옆에 착석했다.
반테온은 뒤늦게 들어온 두 사람을 바라봤다. 늦게 수업을 들어와서 괘씸한 마음에 쳐다보는 게 아니다. 반테온은 속으로 낮게 욕을 지껄였다.
‘어쩐지 불안하더라.’
학생들 사이에 머리 하나는 더 솟아있는 사람은 델로즈와 그의 측근인 페턴이다.
하필 대리 수업을 들어와도 델로즈의 수업에 들어오다니. 일진이 사나워도 보통 사나운 게 아니었다. 조용하던 심장 박동이 빠르게 올라갔다. 티가 나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돌아다녔다. 그날 밤 변장까지 한 상태였으니, 자신을 알아보진 못하겠지.
그날 붙인 긴 머리 탓인지 델로즈는 그때의 가이드가 여자라 굳게 믿고 있었다. 멀쩡한 성별을 오해받고 있단 소식에 기가 막혔으나 반테온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기억은 갈수록 퇴화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때 봤던 정보만 기억할 뿐, 구체적인 이미지나 분위기를 잊게 될 것이다. 인식 방해 귀걸이까지 착용했으니 기억은 빠르게 흐려질 것이다.
그럴수록 반테온과 기억 속 가이드 사이의 거리는 점차 멀어질 것이다.
‘진정하자.’
에스퍼의 감은 짐승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SS급. 만약 델로즈가 자신을 기억한다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반테온을 알아봤을 것이다.
자리에 앉은 델로즈는 무심하게 다리를 꼬고 의자에 기대 있을 뿐, 특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앉은 부하가 서둘러 가지고 온 필기구를 세팅하는 동안 그것조차 귀찮은 듯 먼 곳을 본다. 새로운 선생님의 존재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괜찮을 것이다. 별일 없을 것이다.
여러 번 속으로 되새기며 뻣뻣한 관자놀이를 약하게 문질렀다. 얼굴에 쓴 안경을 더 꽉 눌러 고정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다르게 반테온은 평온한 목소리로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가이드에게도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나 에스퍼처럼 급으로 측정할 수 없다. 상대 에스퍼와의 매칭률에 따라 반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인데….”
평정심을 가장해도 어쩔 수 없이 말끝이 조금 떨렸다.
반테온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자 관심 없던 델로즈의 시선이 움직였다. 흥미 없는 표정으로 먼 곳만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목소리를 따라 반테온에게 향했다.
가능한 델로즈를 바라보지 않던 반테온이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동안, 메마른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선생님은 어때요?”
“매칭 에스퍼 아직 없으시죠?”
소문으로만 듣던 반테온의 출현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학생들은 점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며 질문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에스퍼의 질문에 반테온은 옅게 웃었다.
가이드에게 욕심을 부리는 건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에스퍼의 공통적인 행동이다.
“아쉽게도 아직 매칭 에스퍼를 못 찾았네.”
“매칭 테스트 신청해도 돼요?”
“선생님은 어떤 분들이랑 테스트해 보셨어요?”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지만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선 흔히 일어나는 의문이다. 어린 에스퍼의 눈이 더 반짝이는 걸 보며 반테온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미성년이랑은 테스트 안 해.”
“에이….”
“쳇.”
실망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딱딱하게 긴장됐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럼 다시 수업한다.”
지시봉이 딱딱한 소리를 내며 화면과 부딪혔다. 숨 막히던 긴장감이 잠깐의 농담 덕에 느슨해졌다. 잠시 끊겼던 수업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반테온은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델로즈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다음에 선생님 수업 꼭 신청할게요.”
수업을 마치고 단상 앞으로 다가온 아이 몇 명이 웃으며 재잘거렸다. 사교성 좋은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반테온은 델로즈 쪽으로 흐르는 시선을 애써 자제했다. 학생들을 장벽처럼 두른 채 자연스럽게 교실을 벗어났다.
교실 문을 벗어나 델로즈와 거리가 멀어지자 숨쉬기가 편해졌다.
“A동 가실 거죠? 짐 들어드릴게요.”
대부분 학생은 적당한 거리에서 멀어졌으나, 그중 한 명이 반테온 옆에서 기웃거렸다. 짐이라고 해봐야 교재로 쓴 책 한 권과 단말기. 그리고 지시봉이 전부였다. 성인 남성이 들기에 부담 없는 무게임에도 학생은 반테온을 바라보며 기회를 노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아직 갈무리하지 못한 기운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에스퍼임을 주장하는 중이다. 이런 학생들이 있었다. 유독 욕심이 많고, 반테온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 물론 그런 부분이 귀여울 때도 있지만, 눈앞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적어도 성년은 되어야 건드릴 재미가 있지.
괜히 번거로워질 것 같은 느낌에 단호하게 거절하려 입을 열었다.
“괜찮….”
“내가 대신 들어주지.”
두 사람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든다. 반테온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굳었다.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그 특유의 거만한 말투를 듣자마자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반테온은 자신의 짐을 들어주려는 학생이 반쯤 가져간 교재와 물건을 꽉 챙겨 안았다.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델로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체형 때문에 멀리서 봤을 땐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마주 보니 큰 체구와 특유의 분위기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