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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0)화 (10/112)

#10

반테온은 버릇처럼 그의 주변을 살폈다. 발현자 특유의 붉은 기운이 안정적으로 일렁거렸다.

그의 폭주를 겪은 반테온은 저 에스퍼의 기운이 얼마나 흉포하고 매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며칠 전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센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깔끔한 갈무리라니. 괴물 같은 성장이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하나 더 켜졌다.

“짐은 이게 다인가?”

“괜찮습니다.”

“내놔.”

반테온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델로즈는 가볍게 교재를 뺏어갔다. 제법 단단하게 안고 있던 물건들을 허망하게 뺏기고, 빈손이 되었다. 옆에 붙어있던 학생은 둘 사이에서 곁눈질하며 살피다가 천천히 뒷걸음치며 도망쳤다.

반테온은 교재를 인질 잡힌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델로즈를 따라 원치 않는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왜 자신을 붙잡은 것일까.

소문에 따르면 자신을 진정시킨 가이드를 찾기 위해 매일 데이터실과 센터장실을 엎는 중이라 들었다. 오늘 늦게 수업을 들어온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리 불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 반테온을 알아봤다면, 이렇게 짐을 들어주면서 천천히 접근하진 않겠지.

아니면 이자도 어쩔 수 없이 에스퍼이기에 가이드에게 친절한 것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남자 가이드가 다가왔다고 피떡으로 만든 놈이다. 여자 가이드면 몰라도 반테온에게 친절할 이유는 없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떤 수업을 하지?”

“…….”

그러고 보니 델로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반테온의 눈매가 굳었다. 비슷한 나이의 에스퍼인지라 학생이라도 존댓말로 대답한 반테온과는 상반된 대응이다.

“대답이 느리군.”

“질문하려면 기본 예의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머릿속으론 최대한 얽히면 안 된다, 그냥 넘겨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반테온의 입에선 벌써 딱딱한 말이 나간 후였다.

“예의? …아. 나도 존댓말을 쓰라는 건가?”

“선생님과 학생의 위치에서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가?”

델로즈는 반테온의 요청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반테온도 알고 있다. 자연 발생 에스퍼이며 현존하는 유일한 SS급 에스퍼라면 국왕도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인물이다. 센터 교육을 모두 수료하고 직위까지 받는다면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서겠지.

하지만 그건 그때의 문제였다. 아직 센터를 졸업도 못 한,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자의 방만을 무시할 만큼 반테온의 성격은 관대하지 못했다. 델로즈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반테온을 향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존댓말이라는 걸 써본 적이 없어서 못 하겠는데.”

“그럼 제가 그 질문에 답할 이유는 없겠군요.”

상대가 지키지 않는 예의에 장단 맞출 필요는 없었다.

반테온이 자신의 짐을 돌려달라는 뜻으로 델로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당한 요구를 알아들었음에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테온의 대답을 듣고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턱을 쓸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불쾌하게 반테온을 훑었다.

“딱 한 대면 죽을 것처럼 생겨서 성질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여전히 반테온의 물건은 델로즈의 손에 쥐어진 상태였다.

“할 말 없으면 돌려주십시오.”

“뭐, 나도 그쪽이 좋아서 잡은 건 아니고. 뭐 하나만 물어보지.”

선을 긋는 반테온의 태도에 델로즈는 잘됐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지금까지 얌전하던 분위기가 거짓인 양 거칠고 제멋대로인 기운이었다. 그날 밤 자신의 기운을 태풍처럼 휩쓸던 흉흉한 기색에 반테온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해치려는 건 아니고 말이야. 너 혹시 형제가 있나?”

“무슨 말입니까?”

“남자 형제는 필요 없고. 누나나 여동생. 친척도 상관없어.”

잔뜩 경직됐던 반테온의 어깨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이건 무슨 뜬금없는 질문일까. 어이없는 그와 반대로 델로즈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대답을 듣기 전엔 짐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태도에 반테온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남동생밖에 없습니다.”

“그렇군.”

“왜 그런 걸 묻습니까?”

“머리카락 색은 가족 내력인가?”

반테온의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돌아온다. 도저히 상종 못 할 대화 매너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질문을 듣고 나서야 델로즈의 의도를 눈치챘다.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가족 중에 저 말고는 가이드가 없습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반테온이 그가 찾는 장본인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비슷한 머리카락 색에 끌려서 다가온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델로즈는 자신을 구한 가이드가 여자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확신이 깊었다.

자신이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은 반테온은 팔짱을 끼고 델로즈를 바라봤다. 제삼자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의 가이드를 하루빨리 찾으시길 바랍니다만 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같군요. 그럼 제 물건은 돌려주십시오.”

“흐음…….”

그 단호한 말에 델로즈는 조용히 생각에 잠길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미동이 없었다. 먼저 지친 반테온이 다시 재촉했다.

“듣자 하니 긴 머리의 여자분이라던데요.”

“맞아.”

깔끔한 긍정이 돌아온다.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여자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반테온도 궁금할 지경이다. 물론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걸 알면서도 이유를 물었다.

“위험한 상태라고 들었는데, 제법 정확하게 기억하나 봅니다?”

“예뻤거든.”

“네?”

순간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예뻤어. 징그럽게 사내자식이 내 눈에 좋아 보일 리 없잖아.”

앞에서 대놓고 예쁘다고 들은 반테온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자신의 얼굴이 잘난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극찬을 듣는 일도 흔히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내야 하는 건지. 묘하고 복잡한 심경이 섞인다. 그와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어이없음이 몰려왔다. 겨우 보기에 예뻤다는 이유로 여자라고 확신해서 범위를 줄이다니.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과 별개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생각이 반테온의 표정에 드러났는지 델로즈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난 남자랑 가이딩 못 해.”

“네?”

“전에 남자 놈이랑 잠시 가이딩 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아서 멈췄다. 이번엔 전혀 불쾌하지 않았어. 사내놈과 기운이 얽히는데 그렇게 편안할 리 없지.”

이건 또 무슨 차별주의자 같은 말인가. 가이딩에 성별을 따지는 것만큼 편파적이고 촌스러운 것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반테온은 이내 델로즈가 평민 출신이라는 걸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매칭률만 맞으면 성별을 상관하지 않았다. 부모 양쪽이 동성인 경우도 흔했다. 기호의 차이는 있어도 거부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와 다르게 평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뤘다. 동성의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서 자식을 만드는 기술은 평민이 이용하기엔 큰 비용과 시간을 요구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평민 중 동성 간의 관계에 거부감을 느끼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이딩에 불쾌감을 느낄 정도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여자 가이드를 지목했었군.’

델로즈는 센터에 온 후 처음부터 여자 가이드를 지목했다. 반테온의 조건과 멀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후궁 선발하듯 조건을 붙이는 태도가 아니꼬웠는데, 그럴 만한 이유였다.

단순히 거부감이 아니라 가이딩에 토할 정도의 불쾌감을 느낀다면 당연히 반려되어야 하는 사항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뜩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은 델로즈와 가이딩이 가능했던 것일까.

반테온은 처음 델로즈를 만났던 밤을 떠올렸다. 폭주 직전의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기에 델로즈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잘 통했던 것일까?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멀쩡한 몸 상태에서 테스트한다면 반테온과 델로즈의 가이딩은 불가능할 확률이 높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못 박았던 델로즈의 출신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만약 반테온이 그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남자를 혐오하는 저자가 기분 나빠할지 몰라도 가이드로 삼겠다는 망언은 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 가이드를 혐오한다고 들었으나 설마 목숨을 구해준 상대를 해치진 않을 테니까.

반테온의 가장 큰 걱정은 혹시라도 델로즈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부분이 해결되자 가슴에 짐 덩이처럼 내려앉았던 무거운 추가 조금 가벼워졌다.

마지막 확인을 위해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그 가이드가 남자라면 어쩔 겁니까?”

“남자?”

반테온의 질문에 델로즈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불쾌한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내가 정신없는 틈에 징그러운 사내놈이 손댔다면 적당히 정리해야지.”

“…그 가이딩이 없었으면 위험한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이진 않을 생각이야.”

조금 전 가벼워졌다고 생각한 추가 몇 배가 되어 다시 반테온의 심장을 내리찍었다. 그런 심정도 모르고 델로즈의 기운은 더 흉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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