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리고 생각할수록 이상하단 말이야.”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야심한 시간에 가이드가 홀로 외부에 있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약을 먹인 놈들과 한패거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겠지.”
야심한 시간에 그저 단순하게 밤놀이를 나갔던 반테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채 델로즈는 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자 가이드라면 범인이라 하여도 데리고 살 테지만, 남자라면 봐줄 필요가 없지. 뭐, 죽이지 않아도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많이 있으니까.”
델로즈가 쥐고 있는 자신의 교재 표지가 구겨졌다. 두꺼운 가죽으로 제본한 표지는 얇은 종이처럼 찌그러졌다. 마치 남자 가이드가 맞다면 이렇게 만들겠다는 듯 살벌한 기세였다.
그의 말대로 통금이 훨씬 지난 시각 벌점을 감수하고 센터를 나갈 가이드는 없었다. 센터의 노골적인 특혜를 받는 반테온이 아니라면 말이다.
창백하게 질린 반테온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손끝이 차갑다. SS급이 작정하고 자신을 의심한다면 과연 센터는 어디까지 그를 보호할 수 있을까.
정체를 밝히고 자유로워지겠다는 생각은 고이 접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렇군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 생각보다 오래 잡고 있었군.”
반테온을 찾아온 용건을 모두 마쳤는지, 델로즈는 들고 있던 물건을 순순히 넘겼다. 방금까지 가볍게 들었던 교재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반테온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힘 빠진 다리를 움직여 애써 올바르게 걸었다. 코너를 돌아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겨우 벽을 짚으며 숨을 내쉬었다.
델로즈는 그런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반테온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망했다.
평소라면 쓰지 않을 거친 감상을 내뱉으며 반테온은 책상 위에 물건을 거칠게 내려놨다. 시야를 가리는 안경을 내려놓고 뻐근한 눈가를 눌렀다. 따뜻한 손바닥으로 미간과 관자놀이까지 쓸어 누르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최근 들어 이렇게 원치 않는 일에 휩쓸려 두통을 달고 있는 시간이 자주 있었다. 모두 델로즈가 원흉이었다.
살려줬으면 그냥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살아야지. 초면에 제멋대로인 말투부터 건방진 태도까지 모두 다 엉망이다. 천박하고 거칠고 더는 상종하기 싫은 존재였다.
“이제 어떡하지.”
입 밖으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단순히 델로즈에게 발목을 잡히기 싫다. 남자 가이드라고 피해를 볼까 봐 걱정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대로 반테온이 그 가이드라는 걸 들킨다면, 약을 먹인 자들과 한패로 의심받을 것이다. 도저히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가이딩이 불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테온을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
지금은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이니 그렇게 단정 짓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깨달을 것이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에 남자와의 접촉에 불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만약 남자까지 포함하여 조사하게 되면 수사망은 바로 좁혀진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 예쁘기에 여자라는 생각도….
“…….”
반테온의 성인이 된 뒤에는 그런 적이 없지만, 어릴 땐 여자 같다 혹은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럴 때마다 듣기 싫어 거부하던 단어였다. 그런데 예쁘다는 말에 안도감을 가질 일이 생기다니.
세상은 살아봐야 안다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런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반테온은 또다시 덮쳐오는 현실감에 굳은 얼굴로 턱을 괬다.
‘매칭, 아니 임시 에스퍼라도 만들어야 할까?’
센터에 입소한 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건 질색이라 지금까지 거절했으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니 갖은 생각이 들었다. 외부 활동을 하는 에스퍼를 따라 센터를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적당한 에스퍼가 떠오르지 않았다. 반테온과 비슷한 나이대의 에스퍼는 이미 자신의 파트너를 만나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반테온이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머릿속을 정리했다. 서재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고 달이 천천히 떠오를 때, 단말기가 반짝이며 알림이 들어왔다.
반테온은 기력 없는 손짓으로 단말기 화면을 켜고 내용을 확인했다. 개인 쪽지를 확인하자 새로 온 메시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간 소델 선생님의 연락이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반테온이 대리 수업을 승낙해 준 덕분에 부친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으며, 며칠 뒤 정리하고 올라가면 꼭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반테온은 답장할 기운도 없어 단말기를 툭 소리 나게 던졌다.
가족을 보살피러 간 소델 선생을 원망하면 안 되는 거지만, 애초에 대리 수업만 아니라면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다. 델로즈가 고급반 수업을 듣기까지 적어도 몇 년은 걸렸다. 센터는 넓었고 반테온은 정해진 공간 외엔 이동하지 않으니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델로즈가 고급반으로 올라오는 몇 년간 가이드 없이 생활할 순 없다. 그사이 포기하고 적당한 가이드와 매칭 했을 가능성도 컸다. 결국은 대리 수업이 문제였다.
아니. 그 전에 대리 수업이 반테온에게 넘어올 만큼 과도하게 인력을 차출해 간 폐광 토벌대부터 잘못됐다.
“아.”
한 가지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을 스친다. 반테온은 다시 단말기를 들고 지나간 공지 사항을 찾아 눌렀다.
토벌대에 지원하면 된다. 매칭 에스퍼를 찾지 않으면서 몇 달간 센터를 떠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었다.
노후화되어 버려진 서쪽 폐광은 건조하고 탁한 공기 때문에 그동안 지원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도피처로 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반테온은 제법 긴 공지를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형식적인 인사말로 시작된 공지 아래쪽에는 토벌대를 모집하는 조건과 시기가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다행히 아직 모집 기간이 남아 있었다.
반테온은 단말기에 저장된 주소록을 눌러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몇 번의 통화음이 흐르고 단말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그 험난한 폐광에 홀로 가기엔 신경 쓸 것이 많으니, 좋은 짐꾼을 챙겨야 했다.
***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내가 뭘.”
“원래 토벌대 같은 거 딱 질색했잖아.”
“그랬었나?”
“뭐가 그랬었냐야!”
테아로트가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다 큰 어른이 뭐 하는 짓이냐고 탓하기엔 양심에 가책이 1g 정도 남아 있기에 반테온은 그저 차만 마실 뿐이었다.
전 임무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음 토벌에 나서게 되었으니 많이 억울할 것이다. 가끔 어린아이처럼 구는 태도와 다르게, A급의 테아로트는 어려운 임무에 반드시 필요한 귀한 인력이었다. 위험 등급이 높은 임무일수록, 돌아오면 긴 휴가가 주어진다. 테아로트는 높은 등급의 임무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휴가를 즐기던 중이었는데 반테온이 그걸 시원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의 상황이 더 급하다.
“다음에 보상할게.”
“뭘로?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진짜 무슨 일로 여길 지원한 거야?”
테아로트는 당장 날아간 휴가보다 반테온이 토벌대에 지원한 이유가 더 궁금했다. 반테온은 훈련생 때 필수로 따라갔던 던전을 제외하면 자의적으로 토벌대에 지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간이로 지은 거대한 천막에서 생활하는 것도 질색하지 않았던가. 덥고 춥고 씻기도 불편한 공간은 반테온에겐 최악의 장소였다.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정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인 거 알지?”
“대체 넌 말투가 그게 뭐야.”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봐 말이 곱게 나오는지!”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테아로트의 말투는 언제나 엉망이지만 관대하게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전부터 토벌대 에스퍼 팀장의 호출을 받고 신나게 구른 테아로트의 어깨를 토닥였다. 원래도 딱딱하던 그의 어깨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뒤늦게 합류한 인원이기에 새벽부터 남들의 두 배는 굴러야 했다. 테아로트는 등에 파스를 붙이고 그 위를 탁 소리 나게 두드렸다.
“이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나 혼자 신청할 걸 그랬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까보다 테아로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매번 감시역이니 파수꾼이니 욕하더니 이럴 때 두고 가기만 해봐. 진짜 화낼 거야.”
단호한 테아로트의 말에 반테온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반응이 좋은 그를 놀리기 위해 또 감시하려고 왔냐. 어디에 보고하는 거 아니냐. 놀리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은 해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테아로트는 친동생보다 친근한 친구였다.
“넌 매칭 가이드 안 만들어?”
“네가 에스퍼 정하고 나면 결정할 거다.”
“난 매칭 안 할 거라니까?”
“그럼 나도 평생 임시 가이드랑 살겠지.”
고지식한 녀석.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테아로트의 말에 쓰게 웃었다. 먼 과거 둘이 함께 에스퍼로 발현해서 모험 다니자 약속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씁쓸한 이야기다. 반테온은 당연히 자신이 에스퍼가 될 거라 믿고 자라왔다. 에슬란테 가문 사람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에슬란테의 핏줄이 가장 짙은 아이. 최소한 B급 이상의 에스퍼가 되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