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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2)화 (12/112)

#12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반테온은 에슬란테 가문에서 처음으로 가이드로 발현하였다. 세상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에슬란테 가문의 첫 번째 직계가 가이드라니. 반테온과 가문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이드의 인권은 점차 좋아지고 있긴 했지만, 과거에 비교했을 때 이야기였다. 반테온이 발현할 때까지도 가이드는 에스퍼의 부속품으로 여기던 사회 인식이 만연했다.

그땐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심정으로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달력을 두 번 바꾸고 나서야 긴 방황을 겨우 정리하고 센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 긴 시간 동안 테아로트는 매일 반테온을 찾아와 그의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 반테온이 만나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까지 기다렸다.

몇 년 뒤, 테아로트는 에스퍼로 발현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끓어오르는 열에서 겨우 깨어난 테아로트는 반테온을 찾아왔다. 에스퍼로 발현한 그의 얼굴은 온통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기쁨으로 축하해야 할 날에 테아로트는 그렇게 울면서 반테온 앞에 무릎 꿇었다.

차마 닿지도 못하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꺽꺽대며 울던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했다.

‘미안해… 미안….’

‘네가 왜 미안한데?’

‘나 혼자 에스퍼가 돼서….’

울음에 젖어 뭉개진 발음으로 그렇게 한참을 오열하던 테아로트는 반테온에게 맹세했다.

‘아무도 너를 가이드라고 휘두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오롯이 너를 위하는 에스퍼가 나타날 때까지 지켜 줄게.’

‘바보야. 나는 에슬란테야. 가이드라고 해도 날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린 반테온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열이 오르니 헛소리하는 거라며 테아로트를 다독이며 뒤늦게 따라온 시종에게 그를 부축하게 한 뒤 내보냈다. 한참을 들썩이며 멀어지는 등 너머로 갈무리되지 않은 기운이 슬프게 흘렀다.

그 후 반테온은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따라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테아로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반테온은 혼자서 조금 울었다. 친구의 마음이 고맙고, 눈에 보이던 그의 기운이 서글프게 부러워서.

오랜 과거를 생각하던 반테온이 지금의 테아로트를 바라봤다. 어릴 땐 나름 귀여운 면도 있었는데, 이젠 능글맞은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다른 가이드들에게 원망 듣겠다. 멀쩡한 에스퍼 하나를 평생 떠돌게 했으니.”

“별로? 다른 가이드들에게 인기 없거든.”

“그럴 리가. 멀쩡한 A급이 인기가 왜 없어.”

짝 소리 나게 테아로트의 등을 두드렸다. 넘치게 겸손한 소리였다. 능력도 좋고, 가문도 흠잡을 곳 없으며, 매너도 좋은 편이다. 가이드에게는 최고의 상대였다.

테아로트는 전혀 아픈 기색 없이 목덜미만 긁적였다.

새벽부터 훈련한다고 투덜거리던 테아로트도 달랬으니 반테온의 용건은 끝났다. 파스 찌꺼기를 휴지통에 던져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에 일거리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방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테아로트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괜찮은 가이드 있으면 어서 매칭 해. 난 이제 괜찮으니까.”

“…….”

평소 말이 많아 문제던 테아로트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특유의 능글맞은 눈빛 너머로 짙은 기색이 스친다. 스스로 피우는 고집을 남이 어찌 꺾을 수 있을까. 반테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된 산길은 거칠었다. 기어를 끝까지 넣은 군용차들도 힘겹게 올라갔다. 잔뜩 깔아놓은 쿠션이 무색하게 온몸이 덜컹거렸다.

“승차감 최악이네.”

“이 정도면 무난한 편이야. 차가 들어가는 길이잖아. 짐을 지고 걸어야 하는 곳도 있어.”

“끔찍하다.”

“그러니까 어쩌다 여기 신청했냐. 진짜 안 알려줄 거야?”

“…….”

차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반테온은 그저 입을 닫고 창밖만 바라봤다. 말하느니 앓고 말지. 답답한 테아로트가 재차 질문했으나 창가에 스치는 바람 소리처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테아로트는 이내 포기하고 어깨를 떨어뜨렸다.

창문 너머로 수풀이 빠르게 지나갔다. 두 사람이 다양한 이야기를 토로하는 사이 달리던 군용차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다.

“드디어 도착했네.”

완전히 멈춘 차량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어서 문을 약하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테온이 잠금을 열고 문을 밀자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어 걸쇠로 고정했다.

반테온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두피에서 몇 센티미터 되지 않게 바짝 자른 머리와 살짝 어두운 피부는 누가 봐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외형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문장을 확인하고 반테온은 천천히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환영합니다. 이곳의 작전 대장을 맡은 소텐루라고 합니다. 반테온 에슬란테 님 맞으십니까?”

“반갑습니다.”

소텐루가 내민 손을 맞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뒤따라 내린 테아로트도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건넨다.

“이런 곳까지 와주시다니. 처음 명부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제야 오게 돼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언제나 고생 많으십니다.”

사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그 모습에 비스듬히 서 있던 테아로트가 급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리려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와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반테온 님이 직접 오신 덕에 사기가 많이 올랐습니다.”

“저라고 뭐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우선 토벌대를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소텐루 대장은 토벌대를 살펴보기 좋은 장소를 소개한다며 앞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따라가자 그의 말대로 토벌대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지대에 도착했다.

“저곳이 작전 사령부입니다. 주변에는 편의 시설이 있습니다. 저기 반대편에 작은 천막들이 보이십니까?”

소텐루의 손끝을 따라가자 사령부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가 보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4평 정도의 크기를 가진 천막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한쪽에 살짝 떨어진 천막을 가리키며 저곳이 반테온이 머물 곳이라 설명했다. 나름 신경 썼으나, 보급이 충분하지 못한 토벌대 사정 탓에 불편할지도 모른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센터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테온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소텐루가 한숨을 쉬며 안심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테아로트가 해줄 겁니다.”

단단하게 각 잡힌 태도로 경례한 소텐루는 군인답게 정갈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테아로트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자마자 부려 먹네. 저 아저씨가.”

“아는 사이?”

“전에 같은 임무를 맡은 적이 있어서 잘 알지. 그나저나 네 태도가 바뀌는 건 언제 봐도 적응이 어렵단 말이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뭘 새삼.”

평소엔 단답형으로 짧게 말했으나 공적인 자리에선 완벽히 비즈니스적인 가면을 끼고 예의를 갖췄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처세술이다.

공적인 곳이나 사적인 곳이나 한결같이 가벼운 테아로트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난 못해. 토벌대 시설이야 거기서 거기긴 한데. 궁금한 곳 있어?”

“씻는 곳. 천막 안에 개인 샤워실이 있진 않을 것 아냐.”

“역시.”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격답다며 테아로트가 앞장섰다.

임시 천막으로 만들어진 숙소와 다르게 본부 시설물들은 제대로 된 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반테온은 콘크리트와 비슷해 보이는 특이한 재질을 벽을 눌러봤다. 제법 딱딱한 것이 제대로 된 건물이다.

그 건물 사이를 돌아서 이동하자 파란 마크의 문이 보였다.

“여기네. 보통 숙소 구역과 가까운 곳에 배치하거든. 어디 보자,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테아로트가 벽에 귀를 대고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센터는 청력이 뛰어난 에스퍼들을 고려해서 건물을 지을 때 방음 시설을 철저하게 설치했다. 그와 다르게 임시 건물은 설비가 그렇게 섬세하지 않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테아로트의 표정이 변했다. 곤란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지금은 사람이 있는 것 같네.”

미리 안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과 함께 탈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음에 살펴보자 마음먹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물기가 털며 안에서 나온 사람은 문 앞에 선 두 사람을 보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놀란 건 그만이 아니었다. 반테온도 예상 못 한 인물의 등장에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다. 욕실에서 나온 주인공은 종종 센터에 있을 때 자신과 어울리던 케슬란이었다. 제법 사랑스러운 외모와 반테온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귀여워 자주 쓰다듬던 제자였다.

“서, 선생님?”

“오랜만이네.”

“맞다. 아, 선생님이 지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보고 싶었어요!”

케슬란은 달아오른 얼굴로 꼬리를 흔들 듯 반테온을 반겼다. 양손을 벌려 붙으려는 행동을 테아로트가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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