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핏줄이 가이드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는 하나 완전히 상관없는 건 아닌 건가.
혹시라도 이 정도 능력이 에스퍼로 발현되었다면…….
반테온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털어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는 게 이득이었다.
아직 가이드 중에는 부상자가 없으나 탈것에 실려서 도착하는 에스퍼들이 하나둘 늘고 있었다. 불안정한 기운은 가이딩으로 조절할 수 있으나, 신체가 다치고 부러지면 모두 소용없는 짓이다. 부상자가 늘수록 토벌대의 방어선도 위험해진다.
빈 병상의 개수가 줄어들수록 토벌대의 분위기도 날이 선 듯 예민해졌다. 그러나 좋은 일도 있었다. 어느덧 폐광의 중반 부분까지 탐사대가 진입하였고, 토벌대 대장인 소텐루와 테아로트까지 선두에 나섰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였다.
지원을 받고 도착한 3조의 상황을 좋지 않았다. 에스퍼들의 붉은 기운이 엉켜서 방을 채우고 있었고, 반대로 가이드들의 기운은 미세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을 살피던 반테온은 탈진한 가이드들을 토닥이며 숙소로 돌려보냈다.
반테온은 챙겨온 겉옷을 옆으로 치우고 앉았다. 가이딩할 준비를 하며 소매를 걷자
지원을 요청한 사람이 반테온을 보고 곤란해하며 작은 방을 가리켰다.
“그… 지금 정리된 가이딩실이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가이딩은 예민한 작업이다. 가이드의 감정 흔들림, 미세한 조절로 많은 변수가 발생했다. 소음을 차단하는 가이딩실에 에스퍼와 가이드 단둘이 들어가 서로의 기운에 집중하며 가이딩 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원칙은 평균적인 상황일 때 지키는 것이다. 이미 퇴근 시간은 넘은 뒤고, 남아 있는 에스퍼의 수가 많았다. 두 발로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차라리 나았다. 벽에 기대앉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추가로 가이드가 몇 명이 지원 올지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면 밤을 새워도 힘들었다. 내일은 또 새로운 환자가 나타날 것이다.
가이딩실을 준비한다고 지체되는 시간도 아까웠다.
“괜찮습니다. 여기서 바로 하겠습니다.”
“여기서요?”
반테온의 눈에 가장 불안정하게 보이는 에스퍼에게 손짓하며 장갑을 벗었다. 예상치 못한 가이딩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한 전파가 흘러 기운을 차단하는 장갑이었다. 센터 소속 가이드라면 평소에 항상 착용해야 하는 장갑을 벗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네…… 넵”
냉큼 달려오는 에스퍼와 손을 맞잡았다. 모든 사람의 기운이 섞여 있는 외부에서 단 한 사람의 감각을 잡아서 정돈하는 일은 많은 집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테온에게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느껴지는 감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기운에 집중하면 되니까.
붉은 기운을 매끄럽게 이끌면서 천천히 가이딩을 시도하자 요동치던 에스퍼의 기운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경악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반테온은 눈에 띄게 안정된 기운을 살피며 다음 사람을 지목했다. 그러는 사이 기다리던 에스퍼들이 쭈뼛대며 자기들끼리 알아서 줄을 섰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상태가 나쁜 에스퍼는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달이 떠오르기 전에 끝날 것 같았다.
내일 좀 몸살이 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반테온은 팔을 걷어붙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일은 반테온의 예상과 비슷한 시간에 끝났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달을 보기 전에 업무를 끝낸 반테온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로 답했다.
“반테온 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거예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테아로트가 본다면 기겁할 대외용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감동한 표정으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센터에 있을 때 반테온 님 수업 들었어요.”
“저도요.”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반테온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나 보다. 두 학생은 신나서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반테온이 직접 가이딩을 해준다는 소식에 3차 토벌대에 자원하겠다는 사람이 빗발쳤다고 했다.
가이딩 받은 에스퍼의 간증 글까지 퍼지자 자비를 털어서라도 합류하겠다는 사람도 생겼다는 에피소드도 전했다. 과장된 묘사에 가볍게 웃자 두 사람은 진짜라며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그러고 보니 3차 토벌대 소식은 있습니까?”
“아! 소식은 있는데요. 아마 1차, 2차처럼 대대적인 파견은 아닐 것 같아요. 더는 센터를 비울 수도 없으니까요.”
“일정이 되는 S급이 파견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생각했던 폐광은 예상보다 마물이 많았다. 숫자뿐만 아니라 점차 난이도 높은 개체가 나타나자 부상자의 수도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S급의 파견은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러면 곧 해결되겠군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S급이 온다고 바로 해결될까요? 여기에 A급도 몇 명인데. S급 한 명 온다고 상황이 나아질지…….”
센터에 평생 머문 사람들도 한 번 보기가 힘든 것이 S급 에스퍼였다. 말로만 들었을 뿐 S급의 능력치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반테온은 괜찮을 거라며 사람들을 다독였다.
“S급이 온다면 해결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앗, 저 비상 알림 떴어요. 다녀올게요.”
“저도 비상이네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대화하던 학생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작별을 고했다. 반테온은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여 대답했다. 다급하게 사라지는 가이드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다.
밖에서 환자를 끌고 이동하는 요란한 철제 바퀴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이 들렸다. 이 상태라면 조만간 탈진한 가이드와 상처를 입은 에스퍼로 토벌대가 마비될지 모른다.
오늘따라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음 도착했을 때 상쾌하던 공기엔 어느새 매캐한 탄내와 먼지가 섞여 날린다. 덩치 큰 마물 들의 포효 소리로 아침을 맞이하는 일상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저 도피처로 여기고 합류한 토벌대다. 실제로 이곳에서 현실을 겪으니 반테온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상보다 열악하고, 생각보다 치열하다.
실제로 피가 튀고 사람이 쓰러지는 상황이다.
“…쯧”
괜스레 속이 쓰리다. 왜 토벌대에 지원하냐는 테아로트의 질문에 가볍게 변명한 적이 있었다.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고.
반테온은 평생 정의감이랑은 먼 삶을 살아왔다. 자신은 존재하고 후손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의무를 다한다고 여겼다. 에스퍼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이 핏줄을 후대에 이어주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라고 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단말기에 퇴근 알림이 울린다. 추가 근무 시간을 표시하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오늘처럼 다른 조에 지원을 나갈 경우 업무 실적이 두 배 높게 측정된다. 더불어 센터로 돌아간 후 휴가도 늘어난다.
그걸 알면서도 파견 업무 일지를 찍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반테온은 그대로 화면을 닫았다. 그의 단말기에는 정규 근무 스케줄만 체크된 채 종료된다.
방금 만난 가이드의 바람대로 어서 추가 지원군이 와야 했다.
뭉친 목을 돌리자 뻐근하게 돌아갔다. 오늘따라 눈도 건조하게 시리다. 평소보다 무리한 영향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일지 몰랐다. 반테온은 생소한 감각에 눈썹을 찡그리곤 자신의 천막으로 향했다.
전장은 평소 강한 에스퍼에게 회의적이던 반테온마저 S급의 도착을 바라게 되는 장소였다.
누구든 어서 이 상황을 지원해줄 사람이 와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아늑한 자신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
드디어 약속한 추가 인력이 도착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기다리던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군용차는 단 한 대뿐이었다. 추가 인력이라고 말하기엔 비루한 숫자였다.
“3차 토벌대 소속인 페턴입니다. 그, 비록 두 명뿐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센터에서 도착한 군용차 주변으로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며 흔들리는 성냥들처럼 머리가 솟아났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3차 토벌대의 등장이다. 당연히 사람들의 모든 이목을 집중되었다. 반테온이 방문했을 때도 주변을 서성거리는 인원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이 모였다.
동물원 구경하듯 모여든 사람들이 민망했는지 소텐루가 머쓱하게 웃었다.
“소란스러워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자제시켰는데…….”
“아뇨, 아뇨, 이해합니다. 워낙 사람을 몰고 다니는 분이시라. 익숙합니다.”
“시끄럽다.”
“……나쁜 분은 아니십니다.”
소텐루 대장은 정중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는 사람은 이 많은 사람 중 그 혼자였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미 반짝이는 시선으로 3차 토벌대를 바라봤다. 동경과 경외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숨길 수 없이 쏟아진다.
S급이 지원 올 것이란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많은 인원이 투입될 수 없는 폐광의 특성상 전력이 뛰어난 한 명이 단독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예상은 정확히 일치했다. 다만 기다리던 S급이 아니라, SS급이 찾아온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