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테온은 암담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몰려있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봤다. 델로즈 주변을 돔처럼 감싸고 있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머리 하나는 높은 그의 흑발이 보였다.
센터는 무슨 생각으로 초급 교육도 제대로 수료하지 않은 에스퍼를 현장으로 보낸 것일까. 옆에 동행하는 가이드도 없었다. 아직 임시 매칭 가이드를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상황이 아무리 급하다 해도 위험 부담이 있는 자를 이곳으로 보낼 정도는 아니었다.
반테온은 깊은 한숨을 쉬며 바닥을 바라봤다. SS급 등장을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우울하게 흙바닥을 긁는다.
“SS급이래! 나 처음 봐!”
“미쳤다. 토벌대 신청하길 진짜 잘했어.”
진귀한 풍경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향한 시선을 따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 구더기 피하려고 왔더니, 그 구더기가 따라왔다. 심지어 센터보다 더 부딪힐 위험이 큰 곳으로.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보다 더 최악의 경우였다. 센터에선 거주하는 동이 달라 마주칠 일이 적었으나, 이곳은 하나의 건물에서 대부분의 활동이 이뤄진다.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될 확률이 높았다.
반테온은 단말기를 들어 일정을 확인하고 수정을 눌렀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해결책을 빠르게 마련해야 했다.
‘2조는 선발대가 될 가능성이 크고. 얼마 전에 돌아온 4조가 안전하겠군.’
델로즈와 최대한 부딪히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얼마 전 복귀한 4조는 부상자도 많고 가이딩 해야 할 대상도 많았다. 다른 가이드들에겐 기피 조이나, 반테온에게는 최적의 장소다. 당분간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계획했다.
남은 인생을 저당 잡히느니 잠시 몸이 힘든 게 나았다.
달력에 남은 기간을 모두 4조에 배정 요청하고 확인을 눌렀다.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델로즈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사람들이 물고기 떼처럼 유유하게 따라 이동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푸른빛이 도는 흑발이 우뚝 솟아있었다.
눈에 잘 띄니 피하기는 좋겠네.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어디를 가도 저런 관심을 끌고 다니겠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신경 쓴다면 델로즈와 반테온이 겹칠 일은 없을 것이다.
등 뒤에서 델로즈를 향한 환호 어린 함성이 들린다. 이곳은 이미 축제의 분위기다. 마물을 모두 처리한 듯 기쁘게 환호했다. 홀로 장례식에 온 기분을 느끼던 반테온은 죄 없는 하늘만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긴, 장례식도 축제라면 축제겠지.
반테온은 무덤에 걸어가는 심정으로 자신의 천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릿속 생각이 복잡한 반테온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새로운 토벌대를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반테온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것을.
***
“여길 지원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네가 있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안 했을 거다.”
“매정하기는.”
정신이 없어서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4조는 추가로 파견된 에스퍼로 이뤄진 부서였다. 하필 테아로트가 조장으로 있는 곳이다.
테아로트가 얼마 전 폐광에 갔던 사실을 알고 있으니 충분히 기억할 수 있었는데. 델로즈에 관한 생각에 빠져 까맣게 잊었다.
“우리 조가 막 복귀해서 일이 제일 힘들 텐데. 심지어 자원이라면서?”
“시끄러워.”
“진짜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로 한 거야?”
믿을 수 없다며 호들갑 떠는 테아로트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물론 반테온의 손바닥만 아플 뿐이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들리는 이야기도 그렇다니까? 너 자발적으로 추가 근무도 했다면서?”
“그랬지.”
“소문이 장난이 아니야. 귀족의 모범이고, 가이드의 교본 같은 분이라고. 세간의 평이 거의 성자 수준이던데?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잖아.”
이래서 테아로트와 같은 조에 배치되기 싫었다. 원래도 한없이 가벼운 녀석이나, 나름의 사회적 지위는 가지고 있는 테아로트다. 그런 녀석이 반테온과 있을 때만 이렇게 수다쟁이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신기한 눈빛으로 이쪽을 흘낏거리는 시선들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제발 입방정 좀 떨지 말라고 팔을 밀어도 눈치 없는 테아로트는 웃으며 치근덕댄다. 나름대로 애교 부리는 동작이지만, 머리 하나는 더 큰놈이 붙으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저리 꺼져. 가이딩도 못 받는 놈이.”
친척 간의 가이딩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왕국이 개국했던 초창기에는 근친혼을 허용했었다. 에스퍼가 태어날 확률을 높이기 위한 권장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몇 대가 지나자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유전병과 질병들이 항상 귀족들의 어깨 뒤를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평균 수명이 50을 넘기기 힘들어지고, 에스퍼의 질도 하락하자 왕실에서는 4촌 이내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더불어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기 쉬운 가이딩도 금지되었다.
“아쉽다. 우리 반테온 선생의 가이딩이 그리 수준 높다던데. 친척이라서 기회가 없네.”
“친척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말 섞고 있을 일도 없었을 거다.”
“차갑다. 차가워.”
투정 섞인 하소연을 무시하고 오늘 업무를 볼 가이딩실로 들어갔다. 가지고 온 물건을 대충 정리했다.
“저리 가. 정리하는데 걸리적거린다.”
물건을 치울 때마다 눈치 보며 한 걸음씩 움직이던 테아로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가이딩실이 필요한가? 들리는 전설에 의하면 반테온 님은 사람들이 가득한 방 안에서도 에스퍼 한 명 한 명에게 정밀한 축복을…….”
“진짜…….”
여기까지 따라 들어와 깐죽거리다니. 반테온은 들고 있던 담요를 테아로트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돌로 맞아도 아프지 않을 놈이 담요를 정면으로 맞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흑흑. 너무해. 난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우는 연기할 거면 눈에 침이라도 발라라.”
“아, 그건 더러워서 싫어.”
정색하며 말하는 녀석을 진심으로 때려주고 싶었다. 때려도 손해인 걸 알기에 반테온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속을 식혔다.
평소라면 자신이 테아로트를 놀리고 즐기는 위치였지만, 요즘 들어 상황이 자꾸 다르게 흘러갔다. 어쩔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 대신 억지로 둘러댄 핑계를 놓칠 테아로트가 아니다. 반테온이 생각해도 본인답지 않은 행동이니까.
“그런데 진짜야? 네 성격에 길거리에서 가이딩을 했다고?”
“길거리가 아니라 대기실이야.”
“그게 그거지. 뭐.”
테아로트의 반응도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지금 토벌대에 반테온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게 퍼지고 있었다. 당사자도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살이 붙고, 과장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커지는 과정을 직접 겪은 반테온도 놀랄 지경인데, 갓 파견에서 돌아온 테아로트 입장에선 경악스러울 것이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위험하다던데.”
“전에도 말했지만, 걱정 안 해도 돼.”
“정말?”
“…….”
“반테,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어느덧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테아로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봐온 만큼 서로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평소엔 단순해 보이는 이 녀석은 반테온이 괜찮다는 말을 간단히 믿고 넘어갈 상대가 아니었다.
긴 침묵 동안 흔들림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테아로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다음에 말해줄게.”
“약속했다?”
“그래.”
“속이면 진짜 화낼 거야.”
“그러던가.”
“뭐…… 그럼 이번만 관대하게 넘어가 볼까.”
반테온이 재차 확답하자 그제야 테아로트의 표정이 풀린다. 부모님 같은 짓 끝났으면 어서 사라지라는 자신의 축객령에 테아로트는 느릿하게 가이드실을 나갔다.
나가는 순간까지도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이제야 겨우 조용해졌군.’
소란스러운 녀석이 사라지자 언제나 조용하던 작업 분위기로 돌아온다.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오랜만에 편하게 대화하니 전장에서 굳었던 몸이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귀찮다고 타박하지만 이럴 땐 도움이 되는 녀석이다.
반테온은 업무를 진행할 작업 일지와 단말기를 펼쳤다. 오늘 가이딩 해야 할 상대는 총 8명.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였다.
반테온은 단말기를 들어 추가 인원 받을 수 있다고 표시했다. 일을 더 하는 건 기쁘지 않으나 델로즈를 피하려면 이곳에 박혀 있는 편이 좋았다. 1:1로만 만나는 가이딩실이니, 전적으로 반테온이 만날 사람을 조절 가능한 공간이었다. 여기라면 델로즈와 마주칠 일이 없겠지.
이렇게까지 피해야 하는 현실에 쓰게 웃음이 난다. 첫 번째 명단을 검은 펜으로 대충 표시했다.
***
반테온이 가이딩을 모두 마쳤을 때, 어느덧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은 평지보다 산속에 빨리 찾아온다. 붉은색마저 완전히 산을 넘어간 길에 올라서자 짙은 나무 향이 맡아졌다. 서둘러 숙소 쪽을 향하는 대신 반테온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걸었다.
다들 평소보다 퇴근을 빨리했는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던 본부는 오늘따라 군데군데 어두운 창문이 보인다. 대신 숙소 쪽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