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델로즈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과 별개로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줄을 당긴 듯 팽팽했던 분위기가 하루 만에 느슨해졌다. 천막 방향에서 작은 소음도 들렸다. 기뻐하며 술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모두 다 기쁨에 젖었지만, 반테온은 반대였다. 축제의 분위기에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질 뿐이다. 반테온은 평소 걷던 길 대신 사람이 적고 외진 길을 찾아 걸었다.
원하는 대로 조용하고 한적한 길을 걸어가자 자신의 숙소가 멀리서 보였다. 반테온에게 특별한 숙소를 구해주려다 거절당한 소텐루은 그의 천막을 사람을 드나들지 않아 조용한 외곽 쪽에 마련해줬다.
개인적으로 가져온 조명까지 설치하자 공간이 제법 아늑하게 꾸며졌다. 그런데 평온하고 한적한 그 공간에 낯선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반테온보다 작은 남자의 그림자였다. 이곳에서 반테온을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처음 보는 방문객을 경계하자 상대방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선생님.”
“케슬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약한 조명 아래서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초대장 없는 손님은 케슬란이었다. 경계를 푼 반테온은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요즘 뵌 지 오래된 것 같아서요. 실례일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늦은 시각에 말없이 찾아온 건 충분히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평소와 어딘가 다른 모습에 말끝을 흐렸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럽던 케슬란의 모습이 아니라, 슬프고 위태로운 느낌이 풍겼다.
토벌대에서 힘든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교육생의 신분을 벗어나 참가하는 첫 토벌이었으니, 심적으로 압박을 느낄 수도 있겠지.
“왜 힘든 일이라도 있어?”
분명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이 분명한데, 케슬란은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반테온이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의사라도 부를까?”
“…….”
평소 조잘거리기 바쁜 케슬란은 입을 무겁게 꽉 다물었다. 낯선 분위기였다. 반테온이 연하를 좋아하는 건 언제나 가볍고 밝고 즐겁기 때문이었다. 갓 성인이 된 케슬란은 언제나 그 조건을 잘 맞춰 주는 아이였다.
이런 무거운 상황은 질색이다. 반테온의 인상이 살포시 찌그러지려 하자 눈치를 살피던 케슬란이 입을 열었다. 가까이 있는 반테온에게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선생님. 혹시 안에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안?”
반사적으로 케슬란의 시선을 따라가자 자신의 천막이 보인다. 밤중에 자신의 천막에 들어가고 싶다니. 그걸 이해하고 나서야 케슬란의 모습이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씻고 온 것인지 곱슬한 갈색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느슨한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평소보다 더 어리고 말랑해 보였다. 코트 안에 옷감도 얇았다. 추운 산속의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비누 향을 풍기면서 이 야심한 밤에 단둘이 천막에서 할 이야기라면…… 뻔하겠지.
케슬란이 노골적으로 반테온의 팔뚝을 손으로 쓸며 몸을 붙인다. 아직 살갗에 남아 있는 비누 향이 주변에 가득 풍겼다. 노골적인 신호였다.
케슬란은 반테온이 제법 오래 귀여워한 에스퍼였다. 지금까지 만난 에스퍼들은 보통 몇 달 정도 돌봐주고 귀여워하다 보면 자신이 애완동물 취급받는다는 걸 눈치채고 알아서 떠나갔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과 맞는 가이드를 만나면 아쉬워하면서도 반테온에게서 쉽게 물러섰다. 확실치 않은 상대에 기대는 것보다 조금 부족해도 자신만을 위한 가이드를 찾아가는 것이다.
케슬란은 제법 오랫동안 반테온의 집무실을 종종 찾아왔다. 성인이 된 직후부터 왔으니 벌써 1년이 넘어갔다.
성관계는 규칙 위반이라는 이유로 가볍게 손장난을 치거나 희롱하면서 귀여워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적은 처음이다.
“잠시면 돼요. 선생님.”
“너…… 아니다.”
좀 오래 가지고 놀긴 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몸이 달아 찾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반테온은 자신의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희롱하고 즐기다가 다가오면 밀어내는 짓도 일 년이면 너무했지. 반응이 재밌어서 어느새 선을 넘었을지도 몰랐다.
이곳은 토벌대였다. 아직 센터의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이고, 다른 이의 입에 들어가면 좋은 평을 받기 힘들 상황이다.
하지만 곤란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혹하는 마음이 갈등했다.
조용히 천막 문을 열자 습기와 흙냄새가 섞인 밖의 공기와 완전히 다른 환경이 펼쳐졌다. 24시간 완벽하게 제습되는 마석과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는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반테온의 천막은 밖에서 봤을 땐 조금 더 깔끔하고 꾸며진 공간 정도로 보이나 안은 달랐다. 본가에서 공수해온 온갖 귀한 마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일회용으로 쓰긴 아까운 것들이나 반테온에게 그런 건 돌멩이와 같은 가치였다.
잠시 예상 못 한 내부 풍경에 놀라 멈췄던 케슬란은 이내 반테온의 손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손이 따뜻했다. 반테온이 내려다보자 케슬란이 말간 뺨을 동그랗게 접으며 웃었다.
순수한 얼굴과 달리 눈동자 깊이 진한 소유욕이 번들거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매칭률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야.”
“당연하죠. 그렇게 욕심이 많진 않아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었다. 반테온의 매칭률은 시스템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테온과 그의 가문이 결정한다는 것을. 케슬란도 바보가 아니니 그와 반테온의 매칭률이 조작되었다는 건 눈치챘을 것이다.
이렇게 둘이 밤을 지낸다고 해도 널 에스퍼로 맞을 생각은 없다는 단호한 표현에 케슬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저 원하는 것은 지금 순간뿐이라는 듯, 눈을 휘며 웃던 케슬란은 걸치고 온 코트를 벗었다. 그 모습에 반테온은 옅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에 체모가 옅고 하얀 케슬란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의복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지금 케슬란이 입은 옷은 목적을 완전히 상실한 꼴이다.
“이리와 봐.”
의자에 앉은 채 다가오는 케슬란의 허리를 쓸었다. 작게 긴장하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귀여운 녀석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말캉거리는 감촉이 혓바닥에 슬며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반테온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동하지 않을 리가 없지.
지난번 야센에서 허탕 치고 얼마 뒤에 이곳으로 왔으니, 벌써 몇 달째 강제 금욕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벌대에서 해결할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몇 달은 수절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취향인 상대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 다가오는데 거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센터 규칙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사라진다.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소텐루 대장의 배려로 반테온의 천막은 외진 곳에 있었다. 반테온과 케슬란 둘만 조용히 한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평소라면 들키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긴 금욕 생활과 최근 추가 근무로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한쪽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케슬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아직 남자의 향이 나지 않는 체향을 음미하며 긴장으로 굳어진 케슬란의 등허리를 건드렸다. 매끈한 손길 아래 살짝 불거진 척추뼈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튀어 오르는 작은 몸. 금세 달아오르는 목덜미. 잘게 떨리는 허벅지.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고 온몸이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꽉 쥐고 괴롭히고 싶다. 동그란 눈가가 열기와 눈물로 짓무를 때까지 울리고 싶었다.
자신의 팔을 더듬으며 파르르 떨리는 가는 손가락을 잡고 키스했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 사이로 까만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이래도 괜찮을까 고민하던 마음이 아주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반테온은 눈을 접어 웃으며 케슬란의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긴장하지 마.”
“선생님…….”
당장이라도 울듯 애절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케슬란의 몸을 눕힌다. 베개 위로 옅은 갈색 머리가 펼쳐지고, 발갛게 달아오른 케슬란의 상체가 꿀처럼 번들거렸다. 그 중앙에 핑크빛으로 봉긋한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닿지 않은 깨끗한 모습 그대로.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절경이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그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말캉하고 촉촉한 감촉을 즐기며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 입술 사이에서 말캉한 혓바닥이 나와 그런 반테온의 손가락을 사랑스럽게 핥았다.
기특한 녀석.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을 미끄러트려 상체를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무릎으로 케슬란의 허벅지를 밀어 벌리자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이미 열이 몰린 허벅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을 천천히 내려, 무방비하게 노출된 속옷 위를 천천히 쓸었다.
“흐…….”
옅게 뱉은 숨이 사랑스럽다. 반테온의 시선이 짙어졌다. 케슬란이 팔을 올려 반테온에게 내밀었다. 어깨를 쓸며 목을 찬찬히 감아오는 하얀 팔뚝에 고개를 내어준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에 다가갔다.
두 사람의 틈이 조금씩 사라지고, 반테온이 입을 벌려 케슬란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작작 하지그래.”
“……!”
두 사람의 뒤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