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7)화 (17/112)

#17

반테온의 아래에 누워있던 케슬란이 다급히 몸을 일으켜 이불을 잡았다. 알몸인 자신이 아닌 멀쩡히 옷을 차려입은 반테온을 보호하듯 장벽처럼 이불을 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테온은 머리끝까지 덮인 이불을 손으로 내리고 나서야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만 들어도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는 상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남자. 델로즈가 천막 문을 열고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이죠?”

델로즈를 노려보던 케슬란이 낮아진 음성로 으르렁거린다. 먹이를 뺏긴 어린 사자처럼 거칠게 성난 목소리다.

“이 밤중에 예의가 없네요.”

“서로 매칭도 아닌 거로 아는데. 규칙 위반 아닌가?”

델로즈가 왜 달이 중천에 뜬 이 시각에 반테온의 천막으로 온 것일까.

폭주가 있었던 그날 밤을 제외한다면, 델로즈와 반테온 사이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렇게 밤늦게 찾아올 이유는 더더욱 없다. 혹시라도 그때의 가이드가 반테온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 아닐까. 그런 불안이 스쳤다.

두 에스퍼 사이엔 흉흉한 기류가 증폭되었다.

“그쪽이 규칙을 말할 처지는 아니겠죠. 제가 아는 그쪽 상대만 다섯이 넘는데.”

“그건 그렇지.”

“알면 어서 꺼지…….”

“그런데 너와 내가 같은 입장일까?”

A급. 그것도 갓 A급이 된 어린아이와 태생이 SS급인 델로즈다. 델로즈가 그런 행동을 했어도 센터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비교할 수 없는 차이에 케슬란은 이를 악다물며 델로즈를 노려봤다.

“이불 속에 계신 귀한 분이라면 몰라도 넌 들키면 곤란할 텐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케슬란.”

분위기가 더 사나워지기 전에 케슬란의 이름을 불러 멈췄다. 애초에 체급부터 다르다. 케슬란이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반테온의 만류에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케슬란은 풀이 죽어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반테온에게는 언제나 착하고 귀여운 강아지 같은 케슬란이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화나면 주변을 살피지 않는 면이 있다. 이미 테아로트에게도 이를 세운 전적이 있다. 그때는 반테온이 테아로트를 달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상대가 나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과 얽혀서 피해 보는 건 피해야 했다.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선생님…….”

“이번 일은 미안하다. 내가 자제해야 했는데.”

“……아니에요.”

침대에서 터덜터덜 내려온 케슬란은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대충 걸쳤다. 가벼운 옷차림을 가리기 위해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더니 반테온에게 다가왔다. 머뭇거리던 케슬란은 상처받은 얼굴을 애써 감추며 웃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다음에……봐요.”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처량한 모습이다. 보기만 해도 측은함이 드는 행동에 손을 뻗고 싶었으나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불청객 때문에 꾹 눌러 참았다. 반테온이 머뭇거리자 반대로 케슬란이 다가와 약하게 포옹했다.

그것까지 거절할 수 없어 케슬란을 가볍게 안아 토닥였다. 작게 반테온의 뺨과 목 사이에 키스하는 행동을 모른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만 돌아가 봐.”

케슬란은 가벼운 눈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이제 천막에는 반테온과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델로즈만 남았다.

반테온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돌돌 말린 이불을 걷어냈다. 뒤늦게 자각하니 웃긴 꼴이다. 옷을 벗은 케슬란 대신 옷을 다 챙겨 입은 채 이불에 싸여 있었다니.

반테온이 흐트러진 복장을 제대로 갖추는 동안 델로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온 용건도, 이유도 말하지 않았다.

결국, 반테온이 먼저 불청객에게 이유를 묻는다.

“무슨 일로 온 겁니까.”

“남자 새끼끼리 뒹구는 걸 보러 온 건 확실히 아니지.”

“연락도 없이 온 사람 잘못이죠.”

“매칭도 아닌 놈들이 발정 나서 엉켜있을 줄 알았나.”

델로즈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당장 쫓아내고 싶은 상대지만, 방금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수습은 해야 했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했다. 그의 말대로 반테온에겐 작은 훈계로 끝나겠으나, 케슬란에겐 아니니까.

“문제 될 일은 없었으니 그냥 돌아가시죠.”

“하긴 문제가 되기 전에 내가 방해했지. 이거 사과해야 하는 건가?”

“필요 없습니다.”

비꼬는 말에 감정적으로 답해봐야 소용없다. 반테온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델로즈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천막에 기댄 채 긴 다리를 꼬았다. 나갈 생각도 없는 태도에 반테온이 한 번 더 용건을 물어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작게 문질렀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날파리가 붙어있군. 전에도 하나 떨군 것 같은데. 그쪽은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제법 능력이 좋은가 봐?”

전이라면, 대리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왔을 때 이야기인 듯했다. 어린 학생 한 명이 교재를 대신 들어준다고 실랑이하던 상황이 떠올랐다.

“원래 학생들은 선생님을 좋아하니까요.”

“요즘 아이들은 선생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나? 뭐…… 나야 워낙 못 배우고 자라서 잘 모르겠군.”

델로즈는 그 말을 끝으로 팔짱을 풀며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성큼 반테온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곤 고개를 내밀어 반테온의 얼굴 가까이에 댔다.

“좀 곱다고 해도 영락없이 사내놈인데 말이야.”

거리가 가까워지자 반테온의 눈에 미세하게 그의 기운이 보였다. 멀리선 보이지 않던 붉은 아지랑이가 압도적으로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델로즈의 기운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럼 이건 위협을 하기 위한 것일까. 반테온은 가늘어진 눈으로 델로즈의 심중을 파악했다.

그러나 기운이 넘치는 것 외에 어떤 위압적인 행동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마치 자신의 흉포한 기운을 갈무리하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몇 달은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상태 같았다. 가이딩 하겠다는 사람이 센터에 넘칠 텐데, 왜 이런 꼴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반테온을 살피던 델로즈가 드디어 용건을 꺼냈다.

“그쪽이 여기서 가이딩을 가장 잘한다고 소문이 났길래 왔다.”

“제가 말입니까?”

“뭐, 가이드의 모범이니, 귀족의 표본이니 그런 말이 돌던데.”

제기랄.

반테온은 속으로 작게 욕을 내뱉었다. 품위 없는 행동이라는 자각은 있으나, 속으로라도 뱉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퍼지는 소문을 무시했더니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과찬입니다.”

“그런 것 같긴 해. 비매칭 에스퍼를 몰래 건드리는 자가 가이드의 모범일 리는 없잖아.”

“고발이라도 하실 겁니까?”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생각은 없어.”

규칙 운운하던 모습과 달리 그는 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바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그 말에 수려한 반테온의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당연한 말이다. 다른 에스퍼가 찾아왔다면 이런 바보 같은 문답을 한참 진행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상대는 달랐다. 남자 가이드와 가이딩을 하면 구역질이 난다는 자가 왜 반테온에게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남자 가이드도 괜찮으신가 봅니다.”

“아니. 여전히 토악질 나.”

“그러면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반테온이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저는 남자입니다라는 몸짓에 델로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맞아. 그렇지.”

“그러면 이만 돌아가십시오.”

“분명 남자인 걸 아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델로즈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앞, 조금만 더 움직이면 숨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반테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설마 자신이 새벽에 가이딩한 사람이란 걸 들킨 걸까. 혹시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와중에도 델로즈의 표정은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이상하게 그쪽이랑은 가능할 것 같아서.”

“…….”

튀어나오려는 숨을 애써 삼켰다. 다행히 들킨 건 아니었다. 그저 짐승 같은 촉으로 반테온을 찾아온 것뿐이다.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반테온은 의연하게 대꾸했다.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굳이 남자 가이드와 시도해 볼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반테온과 가이딩이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수치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굳이 남자 가이드와 테스트해 필요가 있냐는 뜻이다. 그 말에 델로즈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여유 없고 초조한 얼굴이다.

“맞아. 그랬었지.”

델로즈가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혼자 자아 성찰할 거면 반테온의 천막이 아니라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델로즈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이상하게 누구와도 가이딩이 되지 않아.”

“네?”

“그날. 폭주가 있었던 날 이후……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률이 나오지 않는 상태다.”

반테온의 눈이 크게 떠진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반테온은 지금까지 경계하던 사실을 잊고 델로즈를 멍하니 바라봤다. 가이딩이 되질 않는다니.

“처음엔 폭주 후유증인지 알았는데, 그 뒤 모든 가이딩이 효과가 없더군. 재테스트 결과도 같았어.”

“……매칭률이 떨어진 겁니까?”

“아니. 비발현자와 테스트한 것 같이 0%가 뜨더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