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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19)화 (19/112)

#19

“뭐? 아니. 뭐야 여자 가이드라면서!”

“조용히 해. 아직 당사자도 모르고 있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아니 그래 어쩐지 비슷한 사람도 없더니…….”

수긍하면서도 이해를 못 해서 의아한 표정을 짓는 테아로트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었다. 밤중에 폭주 직전의 델로즈를 발견한 것, 인식 방해 장치 덕분에 들키지 않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푸는 내내 테아로트의 바보 같은 얼굴이 굳었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델로즈가 본능적으로 천막을 찾아온 이야기까지 간단하게 전했다.

“일단은 그렇게 된 거다.”

“그래서 관심도 없던 토벌대로 피신 오고, 이제는 폐광에 따라가겠다고?”

“그래.”

“아오…….”

테아로트는 거친 손길로 머리를 헝클었다. 붉은 기가 도는 짙은 머리가 엉망으로 휘날렸다. 믿기 힘들 것이다. 당사자도 어이없는 상황인데, 방금 들은 제삼자가 이해할 리가.

하지만 반테온은 사실만을 말했다. 믿고 아니고는 테아로트의 판단이었다.

“당분간 옆에서 가이딩이 가능한지 살펴볼 예정이야.”

“대체 왜? 어차피 피하던 중이면 잘된 거 아냐? 알아서 죽을 거잖아.”

“응?”

돌아온 반응은 반테온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반테온의 말을 믿지 못하거나, 만약에 믿는다면 당연히 델로즈를 가이딩 하고, 폭주를 막자고 주장하리라 믿었다.

양심이란 건 태어났을 때 탯줄과 함께 잘라버린 반테온과 달리 테아로트는 꼬박꼬박 임무를 수행하면서 위험한 일도 도맡아서 처리했다. 말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테아로트는 단호하게 답했다. 함께 활동하는 파견 대원이 모두 죽고 대륙이 또 갈라지는 한이 있어도 반테온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이다.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반테온이 되물었다.

“너답지 않은 반응인데.”

“너 그놈이랑 매칭 할 거야?”

“음…….”

고민하던 내용을 정곡으로 찔렸다. 그 점은 반테온도 고민한 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다시 한번 들으니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델로즈의 상태가 왜 갑자기 그렇게 변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해결도 불가능했다. 만약 이번에 델로즈에게 자신의 가이딩이 통한다는 사실이 들킨다면, 새로운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 델로즈에게 묶일 확률이 높다.

매칭 가이드로 묶이면, 지금처럼 위급 시에만 가이딩 하는 상황과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 에스퍼의 임무에 함께 파견되어 몸 상태를 전담하게 된다. 이번 토벌대에도 매칭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들은 별도의 임무와 숙소를 배치받았다.

별도의 숙소를 배치받은 이유는…… 매칭 파트너 간에는 효율성을 고려하여 성관계로 가이딩 하는 경우가 보편적이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끔찍하네.”

“그런데 왜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언제부터 양심이 그리 멀쩡했다고 그래.”

“…….”

아무리 생각해도 테아로트의 의견이 옳다. 발목 잡힐 바에 버리고 도망치는 게 반테온다웠다. 그런데도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테아로트는 자신의 설득을 통하지 않자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당장 저 조는 내일 폐광으로 출발할 거다. 너 진짜 폐광 갈 거야? 네 성격에?”

간이 천막에도 온갖 편의 시설과 마석을 잔뜩 갈아 넣었으면서 그 좁고 퀴퀴한 폐광에 갈 수 있겠냐는 물음이다. 반테온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테아로트다운 질문이다.

반테온은 아파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물었다.

“한 번 탐사 가면 며칠이나 걸릴까?”

“……미치겠다.”

구체적인 시기를 묻는 말에 테아로트의 표정이 더 찌그러진다. 평소라면 반테온도 자신의 이런 행동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의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 예언한다면, 술에 취했냐고 발로 차버렸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규모가 다르다. 대륙의 절반이 날아갈 상황에서 시도해 보지도 않고 발을 뺄 순 없었다.

테아로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지라고 바닥만 바라보며 심란한 걸음으로 서성거렸다. 땅이 패도록 돌아다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기운 없이 내렸다.

“이번에 돌아오면 두 명 다 센터로 귀환 요청 넣을 거다.”

“너도 폐광에 같이 가게?”

이번엔 테아로트의 눈썹이 격하게 올라갔다. 순식간에 사나워진 표정으로 반테온을 응시했다.

“그럼 널 두고 내가 혼자 여기서 쉬라고?”

“뭐… 위험하잖아.”

“그걸 아는 녀석이 그런 결정을 하냐? 내가 늙는다 늙어.”

평소엔 나이 들었단 말에 기겁하면서 이럴 땐 잘도 써먹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은 죄가 있는 반테온은 묵묵히 테아로트의 등을 토닥였다. 그 어설픈 위로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테아로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짐이나 챙겨둬. 현장에서 필요한 물건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

“고맙다.”

“말로는…….”

테아로트는 끝까지 툴툴거리면서 사라졌다. 천막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냐는 듯 재차 질문을 남겼다. 결국, 5번이나 더 묻고 나서야 미련이 뚝뚝 흐르는 몸짓으로 완전히 천막을 나갔다.

***

녹이 슬어 버려진 곡괭이. 휘고 끊긴 지 오래된 철도와 빈 철수레. 인적이 사라진 지 오래된 폐광의 모습을 바라봤다. 돌 조각과 먼지가 날리는 휑한 공터였다. 발밑에는 부식된 가죽 조각이 듬성듬성 밟혔다.

아직 마물이 주로 서식하는 장소로 이동하기 전인데, 그늘 없이 내리쬐는 햇볕이 강렬했다. 과거 제법 큰 광산이었는지, 이런 땡볕을 견디며 며칠을 이동해야 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군용차로 이동하면 금방인 거리다. 하지만 진동에 예민한 마물도 있기에 군용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없어서 일정 구간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더운 낮에는 그늘막에서 대기하고 밤에 움직인다는 작전 명령이 내려왔다.

반테온이 서 있는 반대쪽에서 사람들이 그늘막을 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천에 연결된 줄을 당기고 있었다. 단순한 육체노동은 대부분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이 동원되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멍하니 기다리는 동안 바람에 날려온 모래 가루가 입에 들어가 버적거린다. 불쾌한 감각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저기서 체력 아껴놔.”

어느새 다가온 테아로트가 반대쪽으로 손짓한다. 그곳에는 그늘막을 기다리며 임시 정착지를 꾸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로 안전한 곳에 배치되는 가이드들이 대기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머리 하나 툭 튀어나온 델로즈가 보였다.

쏟아지는 태양 빛이 그의 머리에 반사되어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가기 싫다…….”

“가까이 가야 볼 것 아냐. 얼른 끝내고 철수해야지.”

“주변에 가이드가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살펴봐. 하필 저기 있어서 귀찮게 하고 있어.”

“델로즈가 가이드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가이드들이 다가간 거야.”

테아로트는 배급된 임시 거처 배치도를 펼쳐서 보여줬다. 그의 말대로 델로즈의 주변은 에스퍼에게 할당된 자리였다. 그 주변에 가이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미 가이딩이 힘들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으니까. 혹시라도 델로즈의 가이딩이 가능하면 복권 맞는다고 생각하고 머무는 거지.”

“복권이 아니라 저주야.”

“너나 그렇지. 다른 사람 눈에는 금덩이로 보일 거다.”

“휴…….”

원망 어린 눈빛으로 델로즈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SS급 에스퍼를 원하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이랑 얽혀서 이 고생을 해야 할까.

델로즈는 며칠 전 천막에서 봤을 때와 모습이 조금 달랐다. 임무에 투입되면서 제대로 된 제복을 갖춰 입고, 평소 자유롭던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그래도 꾸미고 정돈된 모습을 보니 원래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느낌은 적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잘난 얼굴이었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나 에스퍼 중에 그런 성격은 흔했다. 여성 가이드에게는 친절한 성격이라고 하니, SS급이라는 타이틀 외에도 인기가 많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 뭘 해. 어차피 반테온에겐 강아지 불알만큼 필요 없는 장점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참으며 다가갈 시도를 하는데, 반대편에서 델로즈가 고개가 움직인다. 천천히 올라온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곧바로 반테온 쪽을 향했다.

“저 녀석 방금 여길 본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설마 이 거리에서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을 테고.”

거리만 문제가 아니다. 거추장스럽게 불어대는 바람으로 마스크를 낀 얼굴이 따갑도록 모래와 마른 풀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대피소가 있는 부분은 좀 덜해도, 멀리서 대화하는 테아로트와 반테온의 목소리가 들릴 환경은 아니었다.

“자기 이야기 하는 걸 눈치챘나? 감은 귀신 같은 놈이네.”

“……반테. 저 녀석 웃는 것 같은데?”

“뭐?”

거리가 먼 만큼 반테온의 눈에는 실루엣만 보일 뿐, 구체적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에스퍼이기에 눈이 좋은 테아로트만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놈 여기로 오는데?”

“설마.”

테아로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델로즈가 주변에 붙은 사람들을 모두 떨쳐내고 걷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자 델로즈의 방향이 좀 더 확실해진다. 정확하게 반테온과 테아로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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