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테아로트가 몸을 숙여 반테온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지금 기운은 어때 보여?”
반테온이 상대의 기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센터에서 테아로트만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묻는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 거리에서 그걸 어떻게 알아.”
“나야 모르지. 본 적이 없는데. 원격 안 돼?”
“이 능력이 무슨 망원경도 아니고…… 너도 느껴지긴 할 거 아냐.”
“난 한 번도 저놈의 기운 비슷한 것도 느낀 적이 없어서.”
예상도 못 한 이야기에 눈이 크게 뜨였다.
반테온은 다른 사람의 기운을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상대의 기운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에스퍼끼리는 서로의 힘의 크기를 본능적으로 가늠했다. 짐승의 감 같은 것이다.
반테온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예민한 테아로트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니.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하여도 그 정도로 성장이 빠를 리가.
“뭐?”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사람도…….”
“남 뒤에서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실까.”
어느새 다가온 델로즈가 두 사람 정면에 마주 섰다. 그제야 웃고 있다던 그의 표정이 한눈에 보였다.
바보 같은 테아로트. 이건 웃고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손봐 놓을까 고민하는 표정이잖아.
살벌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는 델로즈에게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개인적인 대화입니다.”
“사람을 그리 바라보면서 말이지.”
“기분 탓이겠죠.”
어설픈 변명보다는 잡아떼는 편이 효과가 좋은 법이다. 반테온이 모르쇠로 대답하자 델로즈의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그렇게 말한단 말이지…… 뭐, 그렇다고 해두지.”
관대하게 넘어가 준다는 태도에 배알이 꼬였다. 왜 잘 있는 사람 옆에 와서 마음대로 관용을 베푸는 건지 모르겠다. 델로즈를 보며 말한 건 사실이나, 그를 보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델로즈는 그 사람 중 굳이 가장 먼 곳에 있는 상대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중이었다.
옆에 서 있던 테아로트가 팔꿈치로 반테온을 꾹꾹 찔렀다.
기분 나쁜 것과 별개로 반테온에게는 델로즈는 살펴볼 좋은 기회였다. 재빠르게 가까이 다가온 델로즈의 기운을 살폈다.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던 테아로트의 말과 다르게 반테온의 눈에는 그의 기운이 생생하게 보였다.
‘역시.’
그의 기운은 얼마 전 천막에서 봤을 때와 비슷해 보인다. 여전히 매칭 가능한 가이드를 찾지 못했는지, 흉흉하게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테아로트가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어느 정도 살피고 테아로트를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반테온이 스캔을 끝낸 것을 확인한 테아로트가 말했다.
“용건이 없으시면 비켜주시죠.”
“아, 그쪽도 있었군.”
델로즈는 그제야 테아로트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한다. 티 나게 고의적인 태도였다. 불쾌할 법도 한 말이지만 테아로트는 미동도 없이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아직 저희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말이죠.”
“뭐 별로 영양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던데.”
“…….”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간의 대화를 빠르게 되짚었다. 다행히 문제가 될 내용은 없었다.
델로즈가 이 정도 거리에서도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모두 단말기 쪽지를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귀신같이 불편한 놈이다.
테아로트는 그 대답에 기분이 상한 듯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뚝을 톡톡 쳤다.
“에스퍼 귀 좋은 거야 유난스러운 것도 아닌데, 굳이 들은 티를 내야 합니까?”
“들리는 걸 어떡하나.”
“그래도 불문율이라는 게 있죠. 저라고 안 들려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닙니다.”
델로즈가 그 말에 처음으로 테아로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하…… 그러고 보니 네가 그 괴짜 에스퍼군.”
“…….”
“가이드만 매칭 하면 S급이 될 수 있는 걸 굳이 거부하고 A급에 남아 있다던데. 여기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나 보지?”
“적당히 하시죠.”
테아로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델로즈의 시선이 조용히 반테온을 향하다가 다시 테아로트를 향했다.
“주인님을 영 잘못 고른 것 아닌가? 목줄 잡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잖아.”
“당신…….”
“똑같은 게 달린 놈에게 아양 부리는 심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지만 말이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반테온이 발끈하려는 테아로트의 앞을 막아섰다.
“저와 테아로트는 친척 사이입니다. 억측은 불쾌합니다.”
“아…… 친척?”
왜일까. 해명했음에도 델로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마치 테아로트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옆에 선 테아로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매번 바보라고 놀렸더니 진짜 바보가 됐나 보다. SS급 앞에서 힘을 줘서 어쩌자는 건지.
손끝으로 테아로트의 팔뚝을 툭툭 치자 잔뜩 들어간 힘이 조금 빠진다. 치켜 올라갔던 눈썹도 제자리로 내려온다. 도발을 넘긴 테아로트는 다시 평소같이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목줄 쥘 주인 없는 건 똑같은 것 같은데요.”
“스스로 목줄 차고 흔드는 개새끼랑은 사정이 다르지.”
“그래서 지금 상태가 아주 만족스러운가 봅니다?”
다시 둘 사이에 기세가 사나워졌다. 평온한 표정으로 서로를 죽일 듯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서 반테온은 밀짚 자루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저걸 말려야 하는데, 점점 대화가 끼기 싫은 방향으로 흐른다. 팔짱을 낀 채 두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테아로트와 신경전을 하느라 정신이 팔린 델로즈를 보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말리는 척 닿아보고 가이딩이 되는지 살피면 반테온의 목표는 달성된다.
하지만 저 귀신 같은 놈이 순간적인 가이딩을 놓칠 리가 없었다. 조금 더 전투 상황이나, 자고 있을 때나…… 그런데 자고 있을 때 다가가는 게 가능한 것일까.
반테온은 그제야 원초적인 고민에 빠졌다. 곁에 남아 테스트한다는 생각은 좋았으나 정말로 어떻게 알아보지?
델로즈에게 걸리지 않고 가이딩이 가능한지 알아봐야 한다는 큰 난제를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눈썹이 찌푸려졌다.
바보같이 그걸 파악하지 못했다니. 테아로트 옆에 있으니 바보가 옮은 것 같다.
숨을 크게 내 쉬고 씁쓸하게 웃었다.
테아로트를 저 무의미한 싸움에서 빼낸 뒤, 조금이라도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반테온이 둘을 말리려고 입을 열었다.
-쾅!
멀리서 거대한 모래폭풍이 굉음과 함께 일어났다.
“샌드웜이다!”
“전투태세를 갖춰! 비전투원은 후방에서 대기!”
멀리서 전방 주시를 하던 소텐루의 목소리가 크게 퍼진다. 땅 아래로 이동하는 샌드웜이 인기척을 느끼고 땅 위로 치솟았다. 5층 건물만큼 거대한 몸체가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전투 1조 소집!”
“……귀찮게.”
전투 1조는 델로즈가 속한 곳이었다. 그는 작게 혀를 차고 반테온과 테아로트 쪽을 흘낏 바라봤다. 그러곤 내키지 않는단 표정으로 뒤돌아선다. 눈앞에 있던 델로즈의 등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건물만 한 샌드웜 사이로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델로즈의 뒤로 다른 전투 인원들이 능숙하게 대열을 맞췄다.
“어디 실력이나 볼까.”
테아로트는 여유롭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샌드웜은 사막에서 나타나는 마물이었다. 아무리 이 광산치고 낮은 지대에, 사막 옆에 붙어있다고 해도 여기까지 나타나다니.
“여기 왜 샌드웜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던전이지. 마물 게이트가 열려있으니 별의별 놈이 다 나와. 저번 달엔 세이렌도 봤다고.”
바다에서 서식하는 마물이 나타날 정도면 상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책에서 본 적은 있으나 눈앞에서 마물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더 크고, 징그러운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샌드웜은 얼마나 강하지?”
“뭐, 독도 없고, 근거리 타입이라 공격력이 세진 않은데…… 껍데기가 짜증 나게 단단하지.”
“그럼 피해는 적겠네?”
“그건 아니야. 샌드웜에 당해서 죽을 확률보다 뒤집은 땅에 파묻혀 압사당할 확률이 높거든. 한 번 나타나면 야영지는 포기해야지. 특히 여긴 자갈이 많은 흙이니까. 자갈이나, 돌멩이 같은 게 튀어서 다칠 확률도 있어.”
시선을 돌리자 겨우 완성한 그늘막과 임시 야영지가 보인다. 곧 쑥대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그 사이로 제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살피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로 갈까?”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아. 샌드웜은 발소리로 사람을 추적하니까.”
그래서 저렇게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 있는 것이군. 반테온도 그대로 서서 1조가 전투하는 쪽을 바라봤다. 샌드웜이 흙바닥을 헤집으니 두더지가 지나가는 길처럼 볼록해지며 대량의 흙먼지가 솟았다.
실루엣도 보기 힘들 정도로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테아로트는 한 손으로 반테온의 시야를 살짝 가렸다.
“흙 튄다.”
“델로즈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뭐…… 컨트롤은 그저 그런데…….”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답하는 테아로트의 목소리는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