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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21)화 (21/112)

#21

“힘이 저 정도로 차이 나니 컨트롤 따윈 필요 없네. 그냥 다 부수고 있다.”

“금방 끝나겠네.”

“와 샌드웜 껍데기를 단번에 깨? 아주 막 터지는구나.”

눈앞이 안 보여서 다행이다. 거대 지렁이같이 생긴 놈이 터지는 모습은 딱히 보고 싶은 광경이 아니었다. 반테온은 작게 혀를 찼다.

마물을 처리하는 방법도 본인답게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시야를 뿌옇게 가린 흙먼지 너머로 가장 거대한 샌드웜이 쓰러지는 실루엣이 보였다.

“거의 잡아가나 보다.”

“빨리 끝났네.”

“응 나타났을 때 6마리였으니 보자. 하나, 둘……셋…….”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사체를 세던 테아로트의 행동이 멈췄다.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며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왜? 문제가 있…….”

“조심해!”

허리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몸이 공중에 들리고 시야에서 땅이 멀어졌다. 테아로트는 반테온을 안아 들고 빠르게 튀어 올랐다.

그 반동에 날아온 자갈이 뺨을 스치고서야 반테온은 일어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의 발밑,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이빨을 징그럽게 벌린 새끼 샌드웜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본능적인 혐오감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으…….”

“얼굴 가리고 있어.”

제법 굵은 자갈이 스친 건지 뺨에 미지근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손으로 뺨을 쓸자 붉은색이 묻어 나온다. 그래도 상처가 깊은 건 아닌지 고통은 없었다.

아니 당장 앞에서 꿈틀거리는 샌드웜 때문에 고통을 느낄 새도 주어지지 않았다. 둔해 보이는 몸집과 다르게 샌드웜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방향을 틀었다. 정면으로 마주 보자 사람 몸통만 한 주둥이가 까맣게 벌어졌다.

테아로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린 샌드웜이라면 그 혼자 해결하지 못할 정돈 아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안긴 반테온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마스크로 반쯤 가린 얼굴이 유독 하얘 보였다.

이대로 품에 안은 채로 샌드웜을 처리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안전한 곳에 옮겨두기엔 샌드웜의 속도가 만만치 않다.

혹시라도 숨은 마물이 한 놈 더 있다면, 반테온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지원군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테아로트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눈앞에 빛이 쏟아졌다. 사방을 둘러싼 흙먼지를 뚫으며 노을빛이 새어 들어왔다. 본래 그 자리를 가로막고 있던 샌드웜의 거대한 갑주가 반으로 쪼개지며 굉음과 함께 땅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자꾸 신경 쓰이게…….”

델로즈가 역광을 지고 걸어 나왔다. 단정하던 제복이 선홍빛으로 물들었고,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델로즈는 소매를 걷고 벌겋게 변한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젖은 장갑이 질척하게 바닥에 들러붙는다.

그러는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올곧게 반테온을 향한다. 정확히는 마스크와 모자 사이 작게 긁힌 상처를 끈질기게 응시했다.

자갈에 긁힌 상처보다 그 눈빛이 더 따가웠다. 알 수 없는 부담감에 반테온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을 안고 있던 테아로트의 품에서 내려와 두 발로 땅을 디뎠다. 왠지 땅이 흔들거리는 느낌에 테아로트의 한쪽 팔을 급하게 다시 잡았다.

“잠시 눈 뗀 사이에 이런 꼴이라니.”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냐. 괜히 둘이 이야기한다고 멀어지더니 꼴좋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은 인사를 건넸다. 태도가 불량한 것과 별개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테아로트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겠지만, 더 큰 피해를 막은 건 델로즈 덕이었다.

“하지만 둘이 대화한 건 사적인 일입니다. 안전 영역을 벗어난 것도 아니니 그 쪽에게 이야기 들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영지 외곽에 있었으나, 안전 범위로 정해진 구역 안이다. 샌드웜이 그곳에 나타날 것이란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고, 그걸로 반테온이 타박들을 이유는 없었다. 따지자면 샌드웜의 등장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었다.

“…….”

단호한 말에 델로즈는 기분 상한 표정으로 반테온을 바라본다. 아직 테아로트를 잡은 팔을 특히 유심히 지켜봤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안겨 다니기나 하고…….”

델로즈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자기 몸 하나 보호하기 힘들면 이런 곳을 따라오지 말아야지.”

“말이 심하잖아.”

“내가 틀린 말 했어? 가이드 한 명 안고 좋다고 도망 다닌 주제에.”

델로즈의 말에 가만히 있던 테아로트가 분개했다. 지금까지 꼬박꼬박 하던 존댓말도 버렸다. 테아로트는 분노한 표정으로 한 발짝 나서며 델로즈에게 다가갔다.

“모두 다 너 같은 줄 알아? 가이드는 샌드웜과 스치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해.”

“그럼 샌드웜을 빨리 처리하면 되겠군. 네놈도 혼자 처리 가능할 것을 그리 소중하게 안고 다닐 필요 있어?”

“가이드의 보호는 에스퍼의 최우선 지침이다. 그것도 모르는 놈은 가이딩 받을 자격이 없어.”

“그딴 보호 안 해줘도 서로 가이딩 해주려고 하더군. 누구랑은 다른 몸이라서 말이야.”

재수 없다.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델로즈라면 가이딩을 해주고 싶어 하는 가이드가 줄을 서겠지. 가이드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사람들이 넘칠 것이다.

테아로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바뀐다. 가이드에 대한 모욕은 에스퍼들이 가장 참기 힘든 종류의 언사였다.

“당신. 그러다가 언젠가 크게 후회할 거다.”

“꿈이 크군.”

“가이드를 가볍게 여기지 마.”

“조언 참 고맙군.”

“테아로트. 그만해.”

더는 말을 섞어서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반테온의 만류에 두 사람의 행동이 멈춘다. 테아로트는 작게 짜증을 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델로즈의 시선이 다시 반테온을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델로즈의 손이 움직였다.

커다란 손은 망설임 없이 위로 올라와 반테온의 뺨 주변을 스쳤다. 매만지듯 가벼운 행동이었다. 반테온의 몸이 갑작스러운 접촉에 반응도 채 하지 못하고 빳빳하게 굳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놀란 심장에 질문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손을 회수한 델로즈는 방금 행동이 없었던 듯 자연스럽게 뒤돌아섰다.

“치료나 받아.”

그 말이 끝이었다. 다가왔을 때처럼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두 사람은 넋이 나간 듯 바라봤다. 델로즈가 보이지 않게 되자 테아로트가 반테온의 팔을 툭툭 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단말기를 쥔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 반테온의 단말기가 울린다. 개인 쪽지였다.

[반테. 저놈 왜 저래? 눈치챈 거 아냐?]

합리적인 추론이다. 심지어 당사자인 반테온도 설마 하는 생각을 잠시 할 정도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것이 산처럼 많다.

[그건 아닐 거야.]

[그렇지? 널 그 가이드라고 예상하면, 그렇게 가이드를 가볍게 말할 리가 없지.]

아무리 무뢰한이라 해도 자기 가이드를 앞에 두고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리 없다. 게다가 반테온이 그 가이드라고 확신한다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문은 계속해서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대체 왜 저러냐고.]

[글쎄.]

[미치기라도 한 거야? 진짜 내가 미치겠네.]

[그걸 나라고 알겠어?]

그 이유는 반테온이 가장 알고 싶었다.

***

유능하신 SS급의 활약 덕에 야영지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토벌대 정착지와 다르게 공개된 공간에 침낭과 모닥불을 지핀 임시 야영지 구석으로 이동했다.

반테온은 주변을 살피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냈다. 다른 이가 들을 수 없게 차단막을 펼치자 테아로트가 감탄했다.

“이 귀한 걸 이렇게 막 쓰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쓸데없는 말 할 시간 없어. 임시라서 유지 시간 짧다.”

“좋아. 그럼 어떻게 그놈을 가이딩 해보냐가 문제인 거지?”

막상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 생각했지, 정확한 가이딩 방법을 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놈 꼭 가이딩 해야 해? 오늘 보니까 뭐 잘 지내던데.”

“그건…… 그렇지.”

“재수 없어서 도와주기도 싫더라. 그냥 폭주하게 내버려 두자.”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만약 죽는 사람이 델로즈 혼자라면 당장 동의하고 철수해버렸을 텐데. 얽힌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러고 보니 기운이 전에 봤을 때처럼 엉망이라고 했지?”

“그래.”

“그럼 토벌대 다른 가이드들과도 다 실패했단 뜻이군.”

델로즈가 그렇게 반테온의 천막을 떠나고 며칠 후, 토벌대에는 델로즈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혹시나 자신은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토벌대에 있는 가이드들이 한 번씩 찾아가 그의 손을 잡아봤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남자 가이드는 철저하게 거부했다고 들었다. 남자 가이드와 접촉한 건 반테온이 유일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약하게 돌렸다.

머리가 복잡한 건 테아로트도 마찬가지였다.

“하, 생각할수록 머리 아프다. 일단 들키지 않고 가이딩 하는 게 문제지?”

“그래. 나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잠시 닿을 기회만 있으면 돼.”

“그 귀신같은 놈에게 숨기긴 힘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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