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가장 가능성이 큰 방법은 전투 중에 슬쩍 시도해보는 것이다. 다른 에스퍼와 기운이 섞여 있고, 쉽게 변화하니 들킬 확률이 낮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은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기운이 눈에 보이는 반테온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러나 전투 중인 에스퍼 곁에 있을 수 있는 가이드는 그의 매칭 가이드거나 같은 조의 가이드뿐이다. 반테온은 그 어디에서 속하지 않았다.
“1조는 델로즈를 제외하고 전부 매칭 가이드가 있어. 2조도 종종 합동해서 움직이는데 거긴 아는 사람이…….”
“그러고 보니 2조에 케슬란이 있잖아.”
“아? 그 꼬맹이?”
출발 전 명단에서 케슬란의 이름을 확인했었다. 매칭 가이드도 없고, 반테온과 합도 괜찮으니 잠시 그의 임시 가이드로 따라가기 적합했다.
드디어 찾은 해결책에도 테아로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게…… 좀 곤란한데.”
“무슨 일 있어?”
“케슬란은 부상으로 이번 작전에서 빠졌거든.”
“뭐? 대체 어쩌다가.”
며칠 전에 천막에서 함께 있었던 반테온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천막에서 본 날 이후엔 별다른 출동도 없었다.
전투도 없는데, A급 에스퍼가 갑자기 다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테아로트는 그런 의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작전에 투입되기 싫어서 다친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다친 척한다고 작전에서 제외할 정도로 관리가 허술할 리 없잖아. 케슬란이 그럴 성격도 아니고.”
“글쎄. 난 그 녀석은 원래 마음에 안 들어서.”
케슬란이 반테온과 붙어있을 때 종종 찾아와서 훼방 놓은 사람다운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반테온의 주변에 언제나 어리고 귀여운 에스퍼 학생들이 붙어있다는 걸 알면서, 테아로트는 유독 케슬란만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별다른 이유 있겠어? 어설프게 돌아다니다가 발이나 미끄러졌겠지.”
테아로트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A급이 발이 미끄러져서 다치다니,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던 테아로트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짝 소리 나게 손뼉 쳤다.
“아, 방법 있다.”
“뭔데?”
“가이드조 조장 자리가 잠시 비어있잖아. 그걸 맡으면 소텐루 대장이랑 그놈 곁에 자주 갈 수 있을 거야.”
테아로트의 제안에 반테온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가이드조 조장이라니. 말만 들어도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운 자리다.
불만스러운 반테온과 달리 테아로트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다른 놈 임시 가이드를 하는 것보단 좋을걸?”
“그건……그렇지. 어쩔 수 없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함께 와주신 것만 해도 영광인데, 이런 자리까지 맡아주시다니요.”
“아닙니다. 빨리 말씀드려야 했는데, 생각이 많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가이드조 조장을 맡을 적당한 인물이 없어서 골머리 썩히던 소텐루는 반테온이 조장 자리에 지원하자 반색하며 기뻐했다. 반테온은 불만이 가득한 속과 달리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직위를 맡는 건 처음이라, 잘할지 걱정됩니다.”
“말이 조장이지 사실 부탁드리기 힘들 정도로 잡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 관리하고, 보고하고…….”
“일에 중요도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선 뭐든 중요하죠.”
“역시 반테온 님.”
존경의 눈길이 피부를 뚫을 듯 쏟아졌다. 반테온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살짝 고개를 돌리고 미리 작성한 가이드들 배치도를 전했다.
“아, 고생하셨습니다.”
명단을 받아 든 소텐루가 첫 장을 보고 손가락을 움찔한다. 제일 상단에 적힌 반테온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1조의 가장 최전방. 델로즈와 가까운 자리였다.
“솔선수범해주시는 건 좋지만…… 첫 동행에 이 자리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초반에 선두에 서려는 겁니다. 깊게 들어가면 그땐 경력 많은 가이드로 대체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음…….”
소텐루는 고개를 깊게 숙이고 고민에 잠겼다. 반테온이 선두에 서준다면 분명 사기는 오르겠으나 상처를 입으면 곤란했다. 토벌대 대장인 자신은 반테온의 안전에 책임을 다해야 했다.
소텐루는 한가지 묘책을 떠올리고 뒤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 방향에는 나무에 기대서 대기 중인 델로즈가 서 있었다.
“델로즈 님! 잠시 괜찮으십니까?”
델로즈가 고개를 돌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도 소텐루의 부름에 맞춰 다가왔다.
긴 보폭을 이용하여 직선으로 걸어온 델로즈는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아, 델로즈 님 여기는 새로 오신 가이드 조장이십니다. 성함은 반테온 에슬…….”
“알아.”
델로즈는 예의 없게 대화를 끊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소텐루는 말이 끊기는 상황이 익숙한지 개의치 않고 용건을 말했다.
“혹시 델로즈 님의 임시 가이드 자리에 반테온 님을 넣어도 되겠습니까?”
“네?”
대답을 한 건 반테온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소텐루의 예고 없는 행동에 반테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델로즈 곁에서 기회를 노려야 하는 건 맞으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임시 가이드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델로즈도 마찬가지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소텐루와 반테온을 번갈아 봤다.
“개인 사정으로 델로즈 님의 임시 가이드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1조의 가장 최전방보다는 거기가 안전할 테니 거기에 계시면…….”
“괜찮습니다.”
반테온은 델로즈가 대답하기 전 바로 말을 잘랐다. 개인 사정이라. 가이딩을 할 수 있는 가이드가 없기에 델로즈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하필 그 자리에 배치되게 생긴 반테온은 강하게 거절했다.
“여기 올 때 이미 위험은 감수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물이 나타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하.”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한 델로즈가 턱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귀한 분이 다치면 안 되니 보호 좀 해달라 그거군.”
델로즈의 시선이 빠르게 반테온을 훑는다. 그리 고운 시선은 아니었다. 아래부터 위까지 순식간에 지나간 눈빛은 잠시 반테온의 뺨에 있는 상처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뭐. 상관없어.”
“임시 가이드들에게도 개인 가드가 붙으니 괜찮습니다.”
대답을 무시한 채 소텐루에게 이야기했다. C급 이하의 에스퍼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고 가이드를 보호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로도 충분하다는 말에 소텐루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경험이 부족한 에스퍼들이 많습니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저도 토벌대 경험은 적으니 함께 배우면 될 겁니다.”
소텐루는 반테온의 거절에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강경한 그를 설득하는데 델로즈가 맘에 차지 않는 듯 바라봤다.
“알아서 마물 밥이 되겠다는데. 내버려 두지그래.”
“델로즈 님…….”
거친 언사에 당황한 소텐루가 델로즈를 만류했다. 빈정거리는 델로즈의 말에 울컥한 반테온이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가이드 보호에 관심 없는 사람보단 C급이 옆이 안전할지 모르죠.”
“뭐?”
“어제 말했잖습니까. 가이드 보호 따위 안 해도 가이딩 해줄 사람 넘친다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옆에 있습니까.”
그제야 어제 자신의 발언을 떠올린 델로즈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 듯 달싹거리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서.”
“좀 그런 편입니다.”
지지 않고 대답하자 델로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래,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델로즈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더니 소텐루를 바라봤다.
“내 임시 가이드 자리에 반테온 에슬란테를 적어놔.”
“델로즈 님. 반테온 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델로즈는 소텐루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반테온의 코앞에 섰다.
“이렇게까지 무시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팔자에도 없는 남자 놈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해볼 테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붙어있으라고.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델로즈는 그 말을 끝으로 반테온의 답도 듣지 않은 채 뒤돌아 나갔다. 델로즈의 위압감이 사라지자 소텐루 대장이 질린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양쪽 사이에 끼어 곤란한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아…….”
절로 나오는 게 한숨이고, 느는 게 주름이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텐루를 마주 봤다. 괜한 소텐루의 오지랖 때문에 반테온 입장만 더 곤란해졌다.
그래도 그의 앞에서 짜증을 낼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애써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 말대로 하셔도 됩니다.”
“짧은 시간 겪었지만, 말은 좀 거칠어도 나쁜 분은 아니셨습니다.”
“압니다.”
안다고 대답은 했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소텐루에게 예의를 갖춰 대답하며 반테온은 복잡한 머리를 굴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잘된 일이다. 바라던 대로 델로즈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1조의 가장 최전방에 서는 것보다 훨씬 성공 확률은 올라갔다.
그런데 왜일까. 일은 쉬워졌음에도 자꾸 가슴 한편에 석연치 않은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