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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23)화 (23/112)

#23

오래된 폐광 속은 좁고 습했다. 많은 사람은 한 줄로 길게 이어서 이동하다 보니 마음대로 쉴 수도, 앉을 수도 없는 행군이었다.

산소도 부족하여 중간중간 공기 정화 마석으로 버텨가며 이동해야 했다. 반테온은 물 쓰듯 쓰던 마석도 다른 사람에겐 귀했기에 보급품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가진 것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삼키며 남들의 페이스에 맞추는 것은 반테온에겐 고역이었다.

청결 부분도 끔찍했다. 겨우 챙겨온 물로 얼굴을 씻고 양치를 하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 열악한 환경과 다르게 광산 토벌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중간중간 상식에 어긋난 말도 안 되는 마물의 출현에 소란스러워질 때도 있었으나 처리가 어려운 놈은 없었다.

“여기 그렘린의 둥지가 보입니다!”

“2조는 천장을 주시해. 속도를 유지한다.”

“델로즈 님. 여기 좀 처리해 주십시오.”

“쯧…… 여기 가만히 있어. 페턴.”

“네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델로즈는 마물 처리에 애먹는 조원들을 도와주며 행군 속도를 높이는 주요한 톱니 역할을 해냈다. 넘치는 능력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력을 보강하고 있었다.

반테온은 바닥에 편하게 앉아서 잠시 이동을 멈춘 토벌대를 찬찬히 살펴봤다. 다들 지친 표정이나 다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없었다. 주변 따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거란 생각과 달리 델로즈는 주변에 잘 융합되고 있었다.

용병대 대장이었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델로즈는 주변 사람을 챙기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고 거칠게 말하면서도 어려운 곳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해결했다. 아랫사람들의 평이 좋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힘들진 않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옆에서 그의 용병대 부하였던 페턴이 말을 걸었다. 반테온에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다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델로즈는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페턴을 반테온 곁에 붙였다.

페턴은 D등급 에스퍼였다. 센터에서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으나 그의 특화 기술은 방패였다. 일시적으로 주변을 보호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저희 대장님이 좀 유별나지요.”

“아닙니다.”

“그래도 반테온 님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사람을 옆에 잘 두지 않으시는 분이라.”

“그렇습니까?”

영혼 없이 되묻자 페턴의 시선이 짧게 반테온의 머리 쪽을 향했다.

“진짜 은발 패티시라도 생긴 것인지…….”

작은 소리지만 가까이 있던 반테온의 귀엔 똑똑히 들렸다.

“은발을 좋아하나 봅니다.”

“아, 아뇨. 원랜 취향 자체가 없던 분이신데. 아, 혹시라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대장이 좀 고지식해서 남자는 질색하는 분이시라.”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오죽하면 가이딩도 꼭 여성분께 받겠다고 우기시고…….”

과거를 떠올리며 진절머리난다는 듯 몸을 잘게 떨던 페턴이 반테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실례가 되는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반테온 님께선 저희 대장님 가이딩이 가능하십니까?”

“저도 어렵습니다.”

“아, 역시…….”

페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델로즈의 불안정한 상태는 가까이 있는 페턴이 가장 잘 알았다. 항상 함께하던 대장에게 떨어진 시한부 선고에 제일 낙심한 것도 그였다.

반테온이 임시 가이드로 이름을 올리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며칠간 지켜보며 그 기대감이 천천히 사라졌다. 델로즈는 다른 남자 가이드를 대하듯 반테온과 닿는 상황을 피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최대한 닿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별도의 가이딩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묵묵히 반테온의 안위만 챙길 뿐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면 에스퍼와 가이드가 아니라 마치 부잣집 도련님과 그를 모시는 호위 같은 모습이었다.

실망한 페턴과 다르게 반테온의 심정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힘을 맘껏 쓰고 있는 델로즈의 기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완벽하게 수평을 맞춘 수면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옆에서 쭉 지켜보는 동안 델로즈가 접촉한 가이드는 없었다. 유일하게 곁에서 24시간 지내는 반테온을 제외하고는.

가까운 거리에서 며칠 지냈을 뿐인데 기운이 다시 안정되다니.

이쯤 되면 확신이다. 굳이 직접 닿아서 가이딩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과거 폭주의 밤 무슨 일이 생겼는진 몰라도 반테온만이 델로즈의 가이딩이 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상황을 파악했으니 테아로트와 다시 합류해서 상의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해야 했다. 저놈에게 묶여 가이딩을 할 것인지, 아니면 죽든 말든 무시하고 일상을 즐기든지.

폭주로 피해 입을 사람들 때문에 고민할 뿐, 마음 같아서는 100% 후자를 고르고 싶었다.

델로즈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말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다치지 않게 모셔보겠다는 표현처럼 이동하는 내내 반테온을 살폈다. 친절하게 말을 걸거나 챙기지는 않아도 그의 시선은 줄곧 반테온을 향하고 있었다.

그 좁은 갱도를 이동하면서 반테온의 제복엔 작은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 걸까.’

델로즈의 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본인일 것이다. 가이딩을 직접 받지 않아도 상태가 나아졌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 단순히 남자 가이드가 싫기에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목숨과 직결된 문제였다.

델로즈는 가이딩 가능한 가이드가 없다는 위험성에 이 먼 폐광까지 발령받아 쫓기듯이 밀려왔다. 가이드만 찾는다면 이딴 곳에서 썩을 필요가 없었다.

왕국의 중심에서 당당하게 직위를 받고 약속된 미래를 즐기면 된다. 그걸 알면서도 델로즈는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끝난 것 같습니다.”

페턴의 말대로 멀리서 걸어오는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하고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반테온과 반대로 검붉은 마물의 피가 잔뜩 엉겨 붙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도 쭉 뻗은 목선과 짙은 눈빛이 강렬하게 시선을 끈다.

걸을 때마다 그 모습을 향해 사람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며칠간, 아니 처음 델로즈의 전투를 봤을 때부터 인정했다.

숱한 에스퍼를 보고 S급인 동생을 가까이에서 봤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마치 뛰어난 에스퍼를 보는 것이 아닌, 애초에 사람과 다른 새로운 종을 보는 느낌이다.

“다친 곳은 없겠지?”

“돌 조각 하나 튄 것도 없습니다.”

“그래야지.”

델로즈는 긴장을 풀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모습은 마치 가이딩 받는 에스퍼의 느낌과 비슷했다.

옆에 앉은 반테온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려는 듯 고요한 태도였다.

차라리 그냥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긴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폭주를 막은 가이드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가이딩이 가능하단 사실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혹시…….”

가이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냐고 물어보려던 반테온의 입이 닫혔다. 편안하게 쉬고 있던 델로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테온 위로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던졌다. 피가 엉겨 붙어 엉망이 된 재킷에 놀랄 틈도 없이 광산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모두 자리에 엎드려. 방어막을 켜!”

거대한 진동 소리 사이로 비명 같은 소텐루 대장의 명령이 들린다. 모든 사람이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1인당 하나씩 나눠준 응급 실드 마석을 꺼냈다.

반테온도 가슴팍에 넣어둔 마석을 떨리는 손으로 꺼내 작동시켰다. 순식간에 불투명한 동그란 막이 생기면서 그의 주변을 감쌌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동이 점차 거세진다. 막 위로 돌조각이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광산에 들어온 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방어막이 얼마나 버텨줄까. 긴장감에 침이 마르는 순간, 정면에 서 있는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방어막도 없이 제자리에 굳게 서서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고 있었다.

델로즈라면 광산이 통째로 무너진다고 해도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석상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제길.”

낮게 지껄이는 욕설이 들린다. 입술을 살짝 깨문 그는 반테온의 주변으로 다가와 몸을 숙였다.

“왜…… 이런 겁니까?”

“아직 핵은 한참 멀었을 텐데. 뭔가 건드렸어.”

핵?

들은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브리핑 때도 광산에 핵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비정상적으로 마물이 소환되는 상황이고, 새로운 던전이 생긴 걸지도 모르니 조사해서 처리하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던전에 핵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반테온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에도 진동은 점차 거세졌다. 떨어지는 돌조각이 방어막에 튕겨 나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던 방어막이 점점 투명하게 변했다.

완벽하게 투명해져서 기능이 사라지기 전에 반테온은 몰래 숨겨온 방어 마석을 하나 더 꺼내려 몸을 움직였다. 장갑을 낀 손으로 가슴팍을 뒤지자 미끄러운 마석이 잘 잡히지 않았다. 입으로 장갑을 물어 빼고 다시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 순간 전신이 흔들렸다.

반테온이 마석을 찾는 것보다 델로즈의 행동이 빨랐다. 바닥에 엎드린 반테온의 어깨 아래로 손을 넣더니 순식간에 들어 올려 품듯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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