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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24)화 (24/112)

#24

지금까지 델로즈는 곁에 있으면서도 반테온과 접촉한 적이 없었다. 처음 닿는 감촉에 놀라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 진동이 더 거세졌다. 이제 시야가 보이지 않을 만큼 돌덩이가 떨어지고 앞길이 완전히 막히는 순간 발아래가 무너졌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옭아맨 델로즈의 손을 꽉 쥐었다.

“……!”

자신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는 두꺼운 팔뚝이 느껴졌다.

무너지는 땅 아래로 반테온의 몸이 그대로 추락했다.

***

똑. 똑.

웅덩이 위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석회질 섞인 물이 만들어낸 석순과 종유석이 흐린 시야로 희미하게 보였다.

온몸이 근육통이 난 것처럼 경직되고 아팠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기억을 더듬었다. 광산을 무너트릴 듯 흔들리던 진동 사이에서 아래로 추락하던 순간이 어렴풋이 떠올렸다.

“…….”

그렇다면 여긴 광산 아래인 것일까. 공기가 건조하고 숨쉬기 힘들었던 폐광과 다르게 공기가 맑았다. 비에 젖은 흙냄새 같은 것이 나며 손 아래 푹신한 촉감이 들었다.

습하고, 시원하고, 푹신한…….

푹신? 머리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반테온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자 자신을 쭉 지켜보고 있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깼나?”

“뭡니까. 이게…….”

푹신하다고 느낀 건 델로즈의 허벅지였다. 바닥에는 그의 커다란 재킷을 깔고 델로즈의 다리를 베고 누운 자신의 꼴에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머리가 징 울렸다.

“으…….”

“조심해. 머리를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여긴 어딥니까?”

“광산의 바닥. 가장 아래쪽.”

델로즈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주변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거대한 동굴이었다.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으로 간신히 시야를 판별할 수 있었다. 손바닥이 닿은 바닥은 물기로 축축했다. 이끼로 미끄러운 돌 바닥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가요?”

“알아서 잘 살아있겠지. 그것보다 다친 곳은?”

그 말에 반테온은 자신의 몸을 살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둔하고 뭉친 감각 속에서도 특별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이 떨어진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추락했음에도 놀랍도록 멀쩡한 상태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떨어지면서 델로즈가 보호해 준 것 같았다.

바닥이 무너졌다고 하나 델로즈라면 충분히 떨어지지 않고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테온을 챙기기 위해 함께 여기까지 떨어진 것이다.

“왜 조용하지? 어디 다친 건가.”

“아뇨. 괜찮습니다.”

순수하게 감사 인사를 하기엔 그동안 쌓인 골이 깊었다. 무뚝뚝한 대답에도 델로즈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델로즈는 옷에 묻은 것을 대충 털더니 몸을 풀었다. 떨어진 높이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반테온은 자신의 상태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찢어진 장갑 사이로 손바닥이 드러나 있는 걸 발견했다. 가이딩 차단 효과가 있는 장갑 사이사이로 살색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떨어질 때 이 손으로 델로즈를 잡았던 것 같은데.

긴박했던 순간을 떠올릴수록 입매가 굳었다. 착각이 아니다. 분명 그때 그의 몸에 맨손이 맞닿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델로즈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들켰을까?’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굳은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벽을 잡고 일어나 바닥을 딛자 왼쪽 발아래에서 진한 고통이 올라왔다.

“윽.”

발바닥과 발목 주위에 전기가 통하는 듯 짜릿한 통증이 일며 절로 신음이 났다. 입술을 꽉 물며 버텼다.

“왜 그러지?”

“발목을 조금 접질린 것 같습니다.”

이 넓은 동굴 가운데서 하필 발목을 다치다니. 시야도 밝지 않은 상황에서 좋지 않은 상태였다. 곤란함에 미간이 좁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본 델로즈는 작게 혀를 차더니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그러곤 반테온의 발목을 예고 없이 잡더니 이리저리 살펴봤다.

델로즈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상의 아랫부분을 찢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갈라진 복근이 보이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반테온의 발목을 강하게 묶었다. 발바닥부터 발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발목이 움직이지 않게 싸맨 뒤에야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반테온이라도 인사를 생략하기 어려웠다. 정중한 반테온의 인사에도 델로즈의 표정을 풀릴 줄 몰랐다.

“약해 빠져서는.”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죠”

억울한 마음에 볼멘소리로 덧붙였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발목만 다친 정도면 양호한 것 아닌가.

하지만 델로즈는 건성으로 위를 살펴보더니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저 괴물 같은 놈은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높이겠지.

반테온은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상황을 파악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단지 이 습한 동굴에서도 옷이 멀쩡한 걸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위로 보이는 구멍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까만색이었다. 두 사람만 떨어진 것이 다행일 정도로 지름도 넓었다.

반테온의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높이지만, 델로즈라면 동굴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젖은 옷을 탈탈 털며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럼 어서 올라가죠.”

“올라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델로즈의 고개를 기울인다.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위에 사람들도 걱정되니 어서 합류해야 합니다.”

가장 강한 전력이 전선을 이탈하였으니 남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구멍 아래로 흙더미가 떨어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광산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예상 못 한 마물이 나오기 전에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당연한 말임에도 델로즈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저길 어떻게 올라간다는 거야.”

“그쪽이라면 가능할 것 아닙니까?”

“나 혼자일 때 이야기지.”

그 말엔 반테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델로즈의 힘은 분명 육체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그 외 능력, 특히 염동력도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건물도 통째로 부수고 옮기는 수준인데, 사람 한 명 끌고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저 그렇게 무겁지 않습니다.”

“무거운 게 문제가 아니야. 딱 푸딩 같아서는. 이걸 들고 어떻게 올라가.”

푸딩이라니. 처음 듣는 표현에 반테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벽에 조금만 부딪혀도 으깨질 것 같은데. 저 좁은 틈으로 올라가다 다치면 어떻게 할 거야.”

“…쓸리는 정도로 문제 되진 않습니다.”

델로즈는 자신을 무슨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올라가면서 조금 부딪히고 쓸린다고 큰일 날 문제도 아니었다. 그 말에 델로즈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지?”

목소리엔 감추지 못한 짜증이 스며 있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안전한 곳에서 곱게 지내도 부족한 판에 토벌대를 따라오고 선두를 자청해? 귀한 몸이면 마물이 알아서 피할 것 같아?”

“다른 사람도 다 하는 일입니다.”

정석에 가까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델로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귀한 분답게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지내면 되잖아. 들어보니 이런 곳에 올 필요도 없는 사람 같은데.”

이건 비꼬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의문이 들어서 묻는 것일까. 말의 뜻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 무슨 의도로 이야기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반테온이 한쪽 발목에 쏠린 무게 때문에 비틀거리며 벽을 짚자, 델로즈가 두꺼운 손으로 반테온의 팔목을 잡아 고정한다. 단순히 고정하는 행동이 아니라 가능한 손바닥이 많이 닿도록 팔목을 잡는 손길에 델로즈를 올려다봤다.

델로즈의 금빛 눈동자가 동굴 안에서 어둡게 빛났다. 그의 주변에 거칠게 일렁이던 붉은 기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확실한 변화에도 델로즈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놀라지도 않는 모습에 확신했다. 그는 이미 반테온과 가이딩 가능하단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델로즈가 사납게 웃었다.

“역시 효과가 좋군.”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100% 확신한 건 아니었어.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더군. 자꾸 남자 놈이 신경 쓰여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

“조금 전, 떨어지려는 널 잡았을 때.”

원래도 가깝던 거리가 더 줄어들었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뒤로 더 물러서고 싶었지만, 등 뒤엔 거대한 바윗돌이 버티고 있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눈 안에 별이 튀는 것 같더군. 떨어지는 동안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말이야.”

거짓 하나 없이 진실을 말하는 시선. 반테온은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본인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귓가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와 가이딩이 가능한 건 너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참 안됐군요.”

“잘 아는군.”

델로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말을 이었다.

“넌 남자도 좋아하는 놈이라 상관없을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짜로 참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 튀어나오려는 말을 속에 눌러 담았다. 델로즈가 반테온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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