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쩔 수 없군.”
크게 한숨을 쉰 델로즈가 말했다.
“너도 잠시만 협조해. 어차피 평생 가이딩 할 생각 없으니까.”
“임시 가이드 계약을 하자는 뜻입니까?”
“그래. 내가 찾는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만 너에게 신세 지겠단 말이다.”
찾고 있는 가이드. 아직 델로즈는 자신의 폭주를 막은 가이드를 찾고 있다. 그나마 티끌만큼 남은 희망이었다.
반테온은 보이지 않게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반테온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아니다. 반테온과 가이딩이 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 밤의 가이드와 자신을 연결하진 못한 것 같았다.
얼굴이 굳은 채 침묵을 지키는 반테온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델로즈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본다.
“남자 놈이랑 정식 계약할 생각은 없으니, 허튼 기대하지 말고.”
누가 할 소리를. 반테온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델로즈를 바라봤다.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임시 가이드 제안을 순순히 수락하자 델로즈가 이채 서린 눈으로 반테온을 바라봤다.
“보통 나와 계속 가이드를 하려고 노력하던데. 넌 그렇지 않군.”
“전 필요 없습니다. 그쪽도 제가 반갑지 않은 것 아닙니까?”
“흠…….”
모든 사람이 원하는 자리를 거부하니 의심스러울 것이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직시하던 델로즈가 물었다.
“잘난 가문이니 굳이 SS급이 없어도 된다는 거겠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네.
그 질문에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 반테온은 그저 먼 곳만 바라봤다. 자신의 말을 무시당한 델로즈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반테온을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일 뿐, 대답을 원한 말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곳이야. 한쪽은 차지하고 싶어서 금덩이처럼 원하고, 한쪽은 돌덩이보다 귀찮게 바라보고.”
비아냥거리는 델로즈의 소리가 들린다. 묘하게 센터와 귀족에 적대감을 가진 말이었다. 물론 델로즈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센터 사람들을 거부하는 건 이해되나, 귀족 전체에 적대감을 가지는 이유는 궁금했다.
“이곳이 그리 불편하면 떠나도 되지 않습니까?”
에스퍼와 가이드는 센터 소속이 되는 것이 왕국의 법이다. 하지만 SS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떠난다고 하면 누가 강제할 수 있을까. 새로 왕국을 세운다 해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예정이다. 내 가이드만 찾으면.”
“…….”
“걱정하지 마. 너는 아니니까.”
절대로. 절대로 그날 델로즈를 구한 가이드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 반테온은 다시 한번 속으로 굳게 마음먹었다. 반테온은 안락하고 편안한 문명 세계를 떠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반테온이 그 가이드라는 걸 알면 데리고 나가기보다, 자신을 폭주시킨 자들과 한패 아니냐고 협박할 확률이 더 높았다.
“임시 가이드 계약에서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미리 말해.”
“업무적인 관계 외엔 피해주셨으면 합니다. 피차 그쪽도 원치 않을 것 같으니.”
“좋군. 다른 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반테온은 딱히 델로즈에게 원하는 게 없었다. 그저 자신과 최대한 보지 않고 살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쪽은요?”
예의상 의견을 물어보자 그 모습을 곰곰이 바라보던 델로즈가 말했다.
“앞으로 델로즈라고 불러.”
“네?”
“언제까지 그쪽이라고 부를 거지? 이제 가이드도 하기로 했으니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그 말에 반테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의도적으로 이름 부르는 것을 피하던 것을 정곡으로 지적당했다.
확실히 가이드를 맡기로 한 상황에서 상대를 그쪽이라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예의라곤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상대의 지적이라 맘에 들진 않지만, 기분 나쁘다고 같은 급이 될 순 없었다.
내키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알겠습니다. 델로즈.”
“말을 놔도 상관없다.”
“사양하겠습니다.”
둘이 손잡고 오붓하게 친목을 다질 것도 아닌데, 말까지 놓을 생각은 없었다. 말을 놓는 순간부터 참지 못하고 막말이 나갈 것 같은 이유도 있다.
“그럼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제 자야겠군. 해가 지고 있어.”
동굴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이 어느새 더 약해졌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와 땅바닥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이 어두웠다. 델로즈는 시야에 불편함이 없는지 성큼성큼 걸어 한쪽에 자신의 겉옷을 펼친다. 그리고 반테온에게 다가왔다.
“잡아.”
발목이 불편한 반테온을 배려하듯 내민 손을 잡았다. 혼자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니 반갑지 않은 도움이라도 받아야 했다.
반테온의 무게가 실리자 델로즈는 어렵지 않게 그의 몸을 반쯤 들어 이동한다. 자신의 발로 걷고 있지만, 무게는 모두 델로즈가 가져간 것 같았다.
델로즈가 자리 잡은 곳은 웅덩이 사이에서도 드물게 마르고 단단한 땅이었다. 델로즈가 이끄는 대로 미리 깔아놓은 그의 겉옷 위에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이곳에서 자야 했다.
위로 가는 걸 포기했으니 다음 날 해가 뜨면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다.
내일은 발목 상태가 조금 나아져 있길 바라며 눈을 붙이는 데 뒤에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뭡니까?”
“이런 곳은 밤에 추워.”
당연하다는 듯 반테온의 등 뒤에서 단단한 팔이 튀어나와 지탱한다. 어미 새가 끌어안는 듯한 자세에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사람보고 연약하다고 하더니 진짜 물에 젖으면 큰일 나는 종이 인형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남자는 질색이라면서요.”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이 정도 접촉은 일상이다. 괜히 오해하지 마.”
오해는 무슨. 당장 항의하고 싶었다. 분명 반테온은 성별은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취향은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크고 사나우면 반테온 쪽에서 사양이다.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괜…….”
“괜히 감기 걸려서 번거롭게 굴지 말고. 너랑 달리 좋아서 남자랑 붙어 자는 게 아니니까.”
그 말에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발목을 다쳤는데, 거기에 감기까지 걸리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지금도 그의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에서 더 번거로워질 테니까.
딱 붙은 몸이 부담스러워 조금의 틈을 벌리기 위해 몸을 움직여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도 말이다. 마치 따뜻한 돌덩어리 같았다.
“바스락거리지 좀 마. 고양이 새끼도 아니고.”
“…….”
푸딩이니, 고양이 새끼니. 대체 다 큰 성인 남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진심으로 각막을 바꿔보고 싶을 지경이다.
뭐 쿠션으로 쓰이길 자청한다면 마음껏 이용해주마. 머리 하나는 큰 덩치에 안겨 자는 상황이 반갑진 않아도 딱딱한 돌벽보다는 나을 테니까.
조금만 이대로 있다가 델로즈가 잠이 들면 떨어져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테온은 작정하고 무게를 실어 기댔다. 제법 무거울 텐데도 델로즈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어두운 시야를 대신해서 낮게 흐르는 물소리, 작은 호흡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오늘은 왠지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
반테온이 눈을 감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잠들기 어려울 거란 예상과 다르게 그는 규칙적인 호흡을 내쉬며 깊게 잠들었다. 그런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완전히 해가 진 어두운 동굴 속, 자신의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델로즈의 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그는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품에 있는 약한 것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한쪽 팔을 올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반테온은 긴 속눈썹을 찡그리며 몸을 뒤척였다.
자신의 몸은 며칠을 자지 않고 움직여도 피로 따위 느끼지 않았다. 혼자라면 벌써 동굴 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을 테지. 하지만 이 몸뚱어리는 다르다.
아직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이 보였다.
겨우 손톱보다 작은 돌조각에 찢겨 피가 나고 다친다. 왠지 모를 짜증이 속에서 치솟았다.
델로즈는 비발현자의 몸이 익숙했다. 용병대에서 페턴을 제외하면 모두 비발현자였으니, 일반적인 사내놈은 질리도록 많이 봐왔다. 델로즈가 아는 남자들은 며칠을 씻지 않고 누런 이를 빛내며 웃는 징그러운 것들이었다.
상처 입고 피를 토해도 신경 한 톨 쓰이지 않는 놈들이다. 그런데 왜 이 녀석만 다를까.
가이드라서 그런 것일까.
올린 팔을 반테온의 얼굴 가까이 옮겼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반테온의 뺨에 살포시 닿았다. 지문에 닿는 피부 결은 말도 안 되게 부드럽다. 이런 낯간지러운 접촉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가이드라서 그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이렇게 혼란스러울 이유가 없다.
머릿속을 괴롭히던 두통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신경질적으로 귓가에 울리던 이명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어떤 순간보다 평화로운 기분임에도 망할 본능에 휘둘리는 감각은 기쁘지 않았다.
델로즈는 뚫어지게 반테온의 얼굴을 바라봤다. 델로즈의 금색 안광이 동굴 속에서 홀로 반짝인다. 그 시선은 달이 질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
반테온이 눈을 떴을 땐 몸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편안한 진동에 눈을 뜨자 시야에는 델로즈의 날카로운 턱선이 보였다. 왜 눈앞에 이런 것이 있을까.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제야 현실이 파악된다. 델로즈가 양손으로 반테온을 안고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