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뭡니까?”
“이제 깼나 보군.”
어느새 동굴은 바위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밝아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겁니까.”
“한 2시간 정도?”
해가 떴으면 깨우면 된다. 힘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왜 사람을 짐짝처럼 안고 가는 것일까. 짐짝이라 표현하기엔 양손으로 공손하게 들고 있긴 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다른 건 아니었다.
“내려주십시오.”
“왜?”
“일어났으니까요. 이제 제가 걷겠습니다.”
“그 발로?”
델로즈가 고갯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반테온이 몸을 틀어 발을 보자 어제보다 더 부어오른 발목이 보였다.
눈을 뜨고 잠시 느끼지 못했던 열감이 뒤늦게 지끈거리며 올라왔다.
“둔해 빠져서는. 밤사이 붓는 것도 모르고.”
뼈가 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챙겼던 비상약은 떨어질 때 물에 빠졌는지 모두 녹아버렸다. 인정하긴 싫어도 델로즈의 말대로 둔하기 짝이 없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모르고 잤다니.
“사내놈이 너무 약해.”
“…….”
진심으로 반박하고 싶어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어차피 먹히지도 않을 말이다. 평소엔 다칠 일도 없는데 왜 하필 델로즈를 만날 때마다 긁히고 붓는 것일까. 그의 이미지 속에 반테온은 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종이 인형처럼 각인되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반테온도 반박할 말이 없긴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상황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뼈가 상한 게 아니니 하루 이틀이면 나을 겁니다. 오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야지. 딱딱한 사내놈을 며칠이나 업고 다니는 취미는 없으니까.”
“…….”
같은 말을 해도 참 예쁘게 한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를 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델로즈는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을 힘들이지 않고 걸어갔다. 평지를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로 걸어가자 정면 멀리서 작은 빛이 보였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 밖으로 나가는 틈을 발견한 것이다. 주변 돌을 쏟아지지 않게 걷어내자 드디어 환한 햇살과 수풀이 가득한 산길이 보였다.
사방으로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주변을 살폈다. 사람의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험한 산길 중간이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어도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왔다는 사실만으로 해방감이 들었다.
델로즈는 햇빛의 방향과 주변 식물을 살폈다.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것 같군.”
거친 손으로 울창한 수풀을 익숙하게 걷어 치웠다.
“왕국 쪽에선 자라지 않는 식물이야. 산맥 중앙을 가로질러 빠져나왔어.”
원래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던 곳은 첫 번째 에스퍼의 폭주로 두 조각 나버렸다. 대륙의 중앙이던 왕국 남부는 사람이 건널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대륙의 동쪽은 바다. 서쪽은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왕국이 생기기 전, 이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남부의 왕국들은 모두 사막이 생길 때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대 문명이란 이름으로 종종 유물이 출토되지만, 그 후손으로 알려진 자들은 없었다.
탐사했던 광산은 남부와 서부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동굴에서 방향을 잃고 서쪽을 향해 쭉 걸어온 것이다.
다시 반테온을 안고 이동하던 델로즈는 적당한 바위 위에 반테온을 올려 앉혔다. 그리고 부어오른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구조 요청 가능합니까?”
비상시 들고 다니던 신호탄은 이미 물에 젖어 제 성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단말기 역시 떨어질 때 충격으로 부서진 지 오래다. 멀쩡한 건 원래 물에 불려 먹는 육포 조금 정도다.
그것도 두 사람이 이삼일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델로즈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쪽은 멀쩡한 보급품이 없는 모양이다.
반테온의 발목을 묶은 천을 천천히 풀었다. 물기에 젖어 축축한 천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윽…….”
그동안 느끼지 못한 고통이 몰려온다. 한눈에도 자두만큼 부어오른 발목이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가 어지럽다.
“열도 있군.”
델로즈의 큰 손이 반테온 얼굴 절반을 덮었다. 자신의 허리춤에 매인 벨트를 뒤적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던졌다.
“약도 다 젖었어. 큰일이야.”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면 염증이 생겼다는 뜻이다. 진통제나, 항생제를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점차 붉어지는 반테온과 반대로 델로즈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갑작스러운 조난으로 모포도, 담요도 없었다. 델로즈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천 조각으로 반테온의 발을 감쌌다. 움직이지 못하게 여러 번 묶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모닥불을 피우지.”
마물 게이트와 연결된 광산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동굴 속에는 마물이 없었으나 언제 또 나타날지 몰랐다. 불을 피우면 위치가 발각당할지 몰랐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결해.”
마물 따위를 걱정하다니. 쓸데없는 이야기라며 일갈했다. 델로즈는 익숙하게 주변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차곡차곡 쌓인 나뭇가지와 마른 잎사귀 사이로 타닥거리는 불티가 생기더니 이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습도 높은 동굴에서 이슬에 젖어 눅눅해진 옷들이 불 앞에서 빠르게 건조된다. 환한 모닥불로 얼굴은 더 붉어졌으나 속에서 올라오던 열 기운은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녹이는 온기에 긴장을 풀고 바위에 등을 기대자, 델로즈가 못마땅하단 듯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속옷도 젖었을 테니 겉옷을 벗어.”
“네?”
“겉만 말려봤자 소용없을 거다.”
그 말을 증명하듯 델로즈는 자신의 옷을 차례대로 벗기 시작했다. 굴곡진 상체 근육을 드러낸 채, 아무렇지 않게 바지 버클을 풀고 있었다. 반테온은 아무 곳에서나 옷을 벗는 델로즈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왜 벗기 힘든가?”
“아뇨…….”
“발목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면 말해. 그 정돈 도와줄 테니까.”
어느덧 바지를 벗어 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선 델로즈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델로즈의 말이 옳았다. 젖은 속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겉옷을 말려도 한기가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섣불리 자신의 옷에 손이 가지 않는다. 이 외진 곳에서 속옷 차림으로 저자와 둘이 마주 보고 있어야 한다니. 반테온은 내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겨우 재킷을 벗어 모닥불 옆에 바르게 폈다.
재킷 안에 입은 하얀 티셔츠는 습기에 젖어 반테온의 상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힐끔. 델로즈가 그 모습을 훑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왜 사람 몸을 저렇게 바라보는 것일까. 남자 몸이라면 질리도록 봤을 사람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반테온의 몸은 겉으론 가늘어 보여도 단련을 꾸준히 한 덕에 잔근육이 많은 편이었다.
델로즈는 반테온이 티셔츠를 벗지 않자 의아한 듯 말을 걸었다.
“그것도 벗어.”
“이건 입고있어도 마를 겁니다.”
상체엔 한 벌뿐이니 충분히 모닥불에 마를 터였다. 몸에 달라붙어 반투명하게 보이는 티셔츠를 잡고 팔락이니 델로즈의 미간이 좁혀졌다.
“차라리 벗는 게…….”
“네?”
“……아니다. 마음대로 해.”
상체는 해결했고. 하의를 벗으려니 생각보다 문제가 많았다. 벨트는 진작에 풀어서 던졌지만, 발목 부분에 매듭이 단단하게 묶인 바지는 벗기 어려웠다. 몸을 숙이면 발목에 무게가 실려 더 무리가 갈 터였다.
버클을 푼 바지를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부터 힘들었다. 바스락거리며 몸을 들어도 엉덩이 아래 깔린 천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 좀 도와주십시오.”
“…….”
“아까부터 왜 멍하게 있습니까. 도와준다면서요.”
“그래.”
먼저 도와준다고 해놓고 막상 옷 시중들 상황이 되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델로즈는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로 다가와 반테온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발목에 꽉 묶인 매듭을 풀고 바짓단이 넓어지자 그대로 아래로 당겼다. 그러나 바위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바짓단 아래를 당긴다고 옷이 벗겨질 리 없었다.
“밑에만 당긴다고 바지가 벗겨질 리 없잖습니까.”
옷 벗는 법도 모르냐고 타박하자 델로즈는 더 심란해진 표정으로 반테온의 허릿단을 잡았다. 버클이 풀어진 바지 앞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반테온의 몸을 들었다. 체중이 한쪽으로 쏠리며 반테온은 어쩔 수 없이 델로즈의 팔에 몸을 기댔다.
조심스럽게 바지를 내리고 발목까지 통과시킨 델로즈는 바로 한 걸음 멀어졌다.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잘못 생각했어.”
이성애만 고집하는 사람 중에선 남자랑 닿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 것일까. 그의 표정은 편해질 기색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반테온을 안고, 업고 다녔으니 불만이 쌓일 만도 하지. 반테온이 델로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겉옷을 다 벗은 반테온은 다시 느긋하게 바위에 기댔다.
어울리진 않지만, 델로즈는 나름 반테온을 보호하고 있었다. 업고 안고 다니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모닥불에 몸이 녹자 천천히 마음도 느긋해졌다. 반테온이 델로즈에게 신세를 진 건 확실하다. 물론 거친 말 때문에 고마움을 느끼기보단 원망이 크지만.
모닥불 맞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비스듬히 앉은 델로즈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