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고생하셨습니다.”
“뭘?”
“온종일 업고 다닌다고요.”
“겨우 그 정도로.”
별것 아니라 말하면서도 델로즈의 표정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보니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언제나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과 다르게 느긋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네?”
느긋하게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반테온은 몸을 일으켰다.
“넌 언제 발현한 거지?”
“평범합니다. 그냥 16살 때 가이드로 발현했습니다.”
“그렇군.”
다시 조용해진 델로즈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언제 발현한 겁니까?”
“나?”
흔한 질문에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델로즈가 답했다.
“기억나지 않아.”
“네?”
“유년기 기억이 없다. 그냥 기억하는 순간부터 에스퍼였다.”
드물게 발현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기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일이 년 사이엔 다시 돌아왔다. 능력이 뛰어난 만큼 후유증도 남들보다 강하게 겪는 것일까.
“그럼 가족은…….”
“그런 걸 가진 기억은 없군. 그 뒤론 먹고 살려고 무작정 용병이 되었으니까.”
그러면 성인이 돼서 발현했다는 뜻일까. 일반적으로 15살부터 발현하는 걸 생각하면 늦은 시기였다.
“그럼 지금까지 가이드 없이 몇 년을 버틴 거죠?”
“7년 정도 됐군.”
그냥 에스퍼들도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 긴 기간을 가이드 없이 홀로 지냈다면 고통도 엄청났을 것이다. 아득한 기간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힘드셨겠습니다.”
“처음엔 몰랐으니까.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뭐, 에스퍼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크게 필요하단 생각은 없었지.”
델로즈의 말대로라면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 고통을 안고 살아온 것이다. 평탄한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그리 힘들다 여기지도 않은 것이다.
“덕분에 지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군.”
“차이가 크게 납니까?”
“가이드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한심한 놈들이 이해될 정도로.”
델로즈는 처음 센터에 와서 느낀 것을 이야기했다.
“처음 센터를 오니 모두 우습기 그지없더군. 에스퍼라는 놈들은 가이드를 향해 눈이 시뻘게져 있고. 가이드는 종마 고르듯 품질 좋은 에스퍼를 찾고 있었어. 모두 한심해 보였지. 나에겐 모든 가이드가 똑같았으니까.”
델로즈는 모든 가이드에게 60% 정도의 매칭률이 나타났다. 그 정도 수치라면 A급 에스퍼 기준으로 만성 두통과 맥박이 고동치는 느낌을 항상 느끼며 사는 상태라고 했다.
일상생활은 가능하나 지속적인 불편함을 품고 있는 상태. 등급이 높을수록 상황이 나빠진다고 하니 델로즈는 더 심각한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으나 반테온과 델로즈의 매칭률은 높을 것이다.
이미 동굴에서 특별한 가이딩 없이 반테온의 기운이 안정되었던 사실만 봐도 결과가 확실했다. 반테온이 가이딩 하려는 시도 없이 닿은 것만으로 이미 변화가 나타났다.
의식 없이 둘 사이에 가이딩이 가능하다면 이미 매칭률이 80% 이상이다.
‘80% 이상이라….’
그 정도 매칭률이면 에스퍼도 비발현자와 똑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들었다. 델로즈는 지금이 처음으로 아무런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일 것이다.
남의 일이라면 손뼉 치며 축하해 줄 상황이다. 평생 고통받던 사람이 안식을 찾았다는데, 거기에 비아냥거릴 정도로 삐뚤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자신이기에 반테온의 입맛이 썼다.
불씨가 죽어가는 모닥불에 새로운 땔감을 넣었다. 마른 낙엽 몇 움큼을 추가하자 낮아진 모닥불이 높아졌다. 강해진 열기 때문인지 얼굴에 붉게 열이 오른다.
옆에 널어놓은 잘 마른 재킷을 어깨에 둘렀다. 밤이라 그런지 오한이 드는 느낌이다.
“대충 방향은 알 것 같으니 내일부터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
“구조 요청도 보내야 할 테고….”
델로즈의 말이 점점 작게 들렸다. 마이크를 물속에 넣은 것처럼 몽롱하게 번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기댔다. 딱딱한 바위에 지탱한 고개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워지고 일렁이는 불꽃이 점점 어두워지며 눈을 감았다.
***
덥다. 갑갑하다. 거대한 알에 갇힌 듯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알 속에 갇힌 듯 답답한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는 팔의 감각에 눈꺼풀을 슬며시 올렸다.
눈앞에 풍경은 잠들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새벽 해가 천천히 뜨고 있는 흐릿한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분명 잘 마른 흰색 티셔츠 위에 재킷을 두르고 잠이 들었는데, 지금 자신의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옷 대신 거대한 팔뚝이 가슴팍에 올려진 상태였다.
“이게 무슨…….”
델로즈가 알을 품는 어미 새처럼 반테온의 몸을 꽉 껴안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던데, 그 말처럼 반테온을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 안으로 경악을 삼켰다.
그 들썩거림에 뒤로 미동이 느껴졌다.
“깬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등 뒤에서 자신을 맨몸으로 끌어안은 델로즈가 불편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다 내린 것 같군.”
반테온이 놀라든 말든 델로즈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에 시야가 반쯤 가려진 반테온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걷어 치웠다.
그런 행동에도 델로즈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반테온의 몸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들린 반테온이 어이없는 얼굴로 델로즈를 바라봤다.
“밤새 열이 많이 났다.”
“문제가 있으면 사람을 깨우면 안 됩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을 깨우면 될 것을. 동굴 안에서도 그렇고 매번 자신에겐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손을 대고 옮겼다. 그 태도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땀에 젖은 몸이 끈적하다. 즐겁지 않은 환경에 반테온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깨워도 안 일어나더군.”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는 델로즈도 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땀에 반쯤 젖은 상체가 번들거렸다. 허리선부터 복근까지 완벽하게 꽉 짜인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요동친다.
밤새도록 벗은 상태로 살을 맞대고 있었단 사실에 몸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옷이 벗겨진 상체에 한기가 들었다. 발목은 더 축축했다. 불쾌한 감각에 아래를 바라보니 물에 잔뜩 젖은 하얀 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어제 모닥불에 열심히 말린 델로즈의 상의였다.
열을 식히려고 한 건지, 차가운 물에 젖은 천이 반테온의 발목에 붕대처럼 돌돌 감겨 있었다.
“발목도 괜찮은 것 같네.”
반테온의 발목에 감긴 셔츠를 대충 치운 델로즈가 그 안을 살폈다. 뼈를 다치지 않아서 그런지. 어제 퉁퉁 부었던 발목은 어느 정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 붓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으나 조심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밤사이 병간호를 한 델로즈의 꼴도 그리 좋지 않았다. 같이 땀을 흘렸기 때문에 머리는 젖어 있었고 피곤한 듯 눈 아래가 어두웠다.
SS급이 하룻밤을 새운다고 티 나게 피곤할 리 없다. 반테온이 모르는 사이 마음고생을 한 흔적이었다. 침을 삼키는 반테온의 입 안이 썼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는 속마음과 다른 말에 나왔다.
“씻고 싶습니다.”
델로즈와 같은 몰골일 몸을 수습하고 싶었다. 어제 모닥불에 빠짝 말린 것이 소용없게 흠뻑 젖어있었다. 델로즈는 새벽 내 타고 옅은 불씨가 남은 모닥불 위로 모래를 부어 껐다.
그 말과 동시에 델로즈는 벗어둔 옷을 챙겨 반테온의 몸을 안아 올렸다. 이제 안겨서 옮겨지는 것도 익숙하다. 반테온은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뺐다. 그런 태도가 만족스러운지 델로즈는 힘찬 걸음으로 전진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와 그 아래 넓게 계곡물이 보였다. 반대편 나무가 희미하게 보이는. 호수처럼 넓은 계곡이었다. 잔잔하게 물이 흘러간다. 그린 듯이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반테온은 나무를 짚고 서서 처음 보는 풍경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설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장소였다. 맑은 물에 발목을 담그려는 순간 옆에서 물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튀었다. 옆에 서 있던 델로즈가 물에 뛰어든 것이다.
“들어올 거면 얼른 들어오지.”
불쾌하게 얼굴에 튄 물방울을 닦아냈다. 갑자기 물벼락 맞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것도 모른 채, 델로즈는 머리끝까지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잘 짜인 근육 위에 맺힌 물방울이 태양 빛을 받아 반짝였다.
신났구나.
씻고 싶다고 말한 반테온보다 더 즐기는 모습이다. 이내 반테온도 천천히 물속에 몸을 담갔다. 생각보다 수심은 깊지 않았다. 허리춤까지 몸을 담그고 아래를 바라보니 발가락까지 선명하게 보일 만큼 맑았다.
물결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시원한 물에 얼굴을 씻었다. 땀에 번들거리던 몸이 개운해진다. 땀에 젖은 머리를 물에 담갔다. 차가운 물에 천천히 적응하자 속까지 개운해진다.
물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털자 반테온의 은발에서 맑은 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성가시게 들러붙은 잔머리를 깔끔하게 쓸어 넘기고 물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어깨까지 물에 담그고 천천히 흐르는 물결을 느꼈다. 일렁이는 움직임에 따라 몸도 여유롭게 흔들렸다. 느긋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