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두 사람이 그러는 와중에도 이쪽을 끈덕지게 바라보던 사람들은 델로즈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 3층 배정된 방에 도착했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자마자 델로즈가 들고 있던 반테온을 침대에 던지듯 내려놨다.
무어라 항의하기도 전 내동댕이쳐진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겨우 시야가 돌아와 고개를 들자 델로즈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 말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억울한 마음에 반테온도 지지 않고 델로즈를 노려봤다. 반테온이 한 행동이라곤 계산하려고 돈을 꺼낸 것과 냉큼 들려온 것밖에 없었다.
눈을 마주친 델로즈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뭐가 문제입니까?”
“그 존댓말 좀 집어치울 수 없어?”
“이제 말투도 불만입니까?”
“아니…… 진짜 이걸 뭐라고 말해야…….”
말주변 없는 델로즈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방을 서성였다. 좁은 여관방을 정신없이 오가며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듯, 분이 차오르는 듯 여러 가지 감정이 담고 서성거렸다. 방을 세 바퀴 돌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는지 숨을 내쉬고 걸음을 멈췄다.
큰 결심을 한 듯 비장한 눈빛으로 반테온을 응시했다.
“평민은 너처럼 정중한 존댓말을 쓰지 않아.”
거칠게 머리를 헝클이더니 말했다.
“나이가 비슷한 상대에게 그렇게 존댓말을 쓰는 건 마을에서 남창밖에 없단 소리다.”
거칠게 항의하려던 반테온의 동작이 멈췄다. 그제야 계단을 올라오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 이해되었다. 남들 시선에는 대낮부터 여관을 찾은 남창과 구매자로 보였던 것이겠지. 그러니 그런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순식간에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얼굴 가득 열이 몰렸다.
“이렇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존댓말을 쓰면 오해받기 딱 좋지.”
“…그 정도로 약하게 생기진 않았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눈곱만큼도 모르고 사는군.”
누가 하고 싶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거칠고 예의 없고, 누구보다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주제에 이런 지적이라니.
“거울을 봐. 너처럼 생긴 사람이 이런 마을에 있다면 어떻게든 덤빌 놈들이 한 부대는 넘을 거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남창처럼 생겼다는 무례한 말에 경악했던 반테온은 애써 숨을 골랐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반박했다.
“남자한테 관심도 없다면서 잘도 아는군요.”
“그래. 그딴 더러운 짓거리엔 관심조차 없었지.”
델로즈는 사나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반테온 앞으로 다가갔다. 위협적으로 가까워지는 거대한 체구에 눌리지 않은 척 애써 의연한 척했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가까이에서 더 명확하게 보였다. 금색의 눈동자가 새벽처럼 빛나며 반테온을 내려다봤다.
“이젠 어떤 느낌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단 말이야.”
델로즈의 말에 반테온은 이를 악물었다.
관심이 없던 사람이 봐도 알 정도로 남창처럼 생겼다는 뜻일까. 그렇게밖에 이해되지 않는 말에 반테온은 불쾌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맞닿을 듯 가까이 온 델로즈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이 무례한 자와 일 초도 더 함께 있기 싫었다.
“지금이라도 방을 하나 더 잡죠.”
“안 돼.”
반테온은 델로즈의 단호한 거절을 무시한 채 방문을 향해 나갔다. 빠른 속도로 걷던 반테온의 손목이 강하게 틀어 잡혔다. 두꺼운 델로즈의 손아귀에 잡힌 팔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창이라 오해받고도 같은 방을 쓰란 겁니까?”
“누가 겁도 없이 골드를 꺼낸 바람에 위험해졌거든.”
이 외진 마을에서 거액을 꺼냈으니 밤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충분히 이론적으로 맞는 말임에도 억울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민들의 마을에 처음 와서 그들의 생리를 모르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반테온은 그저 하얗다는 이유로 상대를 희롱하는 저급한 작자들의 생리 따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는 반테온을 지나친 델로즈가 문을 열었다.
“어딜 갑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할 일이 있으니까.”
그대로 델로즈가 방을 나서고 계단을 저벅저벅 내려가는 무거운 발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낡은 나무문 사이로 소음이 들렸다. 무언가 나뒹굴고 깨지는 소리와 멱따는 돼지 소리가 울린다. 소란은 길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정리되고, 잠잠해진 공간 사이로 나무 계단이 삐걱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델로즈는 자신을 바라보는 반테온을 흘낏 바라보더니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물 흐르는 소리와 그 사이 참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테온은 델로즈가 방에 들어왔을 때를 똑똑히 봤다. 나름 가린다고 가린 것 같지만, 제복 곳곳에 작게 튀어있는 핏방울은 놓치려야 놓칠 수 없었다.
잠시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나온 델로즈는 소파에 대충 기대어 앉았다.
“밑에 사람들을 어떻게 한 겁니까?”
“센터와 연락 가능한 마을까지는 아직 며칠 더 걸릴 거다. 그때까지만 참아.”
묻는 말과 전혀 다른 내용이 돌아왔다. 반테온의 질문에는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미 소리로도 충분히 파악 가능한 상황이기에 반테온도 포기하고 침대에 기댔다.
혹시 반테온을 남창 취급한 것에 대신 나서준 것일까? 웬일로 저놈이 기특한 짓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찰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깔이 불쾌한 놈들이 있어서 정리했을 뿐이야. 네 말대로 오해받고 잘 순 없으니까.”
반테온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델로즈를 바라봤다.
그럼 그렇지. 그저 남창과 자는 놈이란 오해를 받기 싫어서 다녀온 것이다. 반테온에게는 참으라더니. 정작 본인은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엎고 온 것 같았다.
반테온은 델로즈가 앉아있는 방향 반대로 등을 지고 누웠다.
알고는 있었지만, 함께 지낼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다.
***
방으로 올라온 식사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질이 낮은 재료를 숨기기 위해 양념과 향신료에 졸이고, 과하게 구운 요리였으나 음식 솜씨가 좋은지 제법 먹을 만했다. 뭘 먹어도 불어 터진 육포를 먹은 후라 좋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과일까지 제대로 챙겨진 식단에 만족하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배가 부르고 몸이 편안해지니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점이 보였다. 방에 준비된 침대는 성인 남성 두 명이 눕기에는 터무니없는 넓이였다.
스프링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매트리스를 손으로 꾹꾹 누르는데 옆에서 담요를 펼쳐 소파 위에 까는 델로즈의 모습이 보였다.
“뭘 그리 보지?”
“소파에서 잘 겁니까?”
“둘이 자기엔 불편하니까.”
분명 방금까지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래도 한 명이 소파에서 잔다면 반테온이 자는 것이 맞았다. 반테온에게도 좁아 보이는 소파에서 델로즈가 자려면 반쯤 앉은 자세로 자야 하니까. 온종일 업혀 다니고, 안겨 다닌 반테온보다 체력도 많이 소모됐을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가 맞았다.
이건 상대가 마음에 들고 아니고를 떠나서 예의의 문제였다. 온종일 신세 지고 침대까지 뺏을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
“자리를 바꾸죠. 계속 걸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일도 아니야.”
알아서 침대를 양보해준다면 고맙게 받으면 된다. 여관에서 준비해준 따뜻한 물에 몸도 편안하게 녹았고, 딱딱하긴 해도 침대에 누워 자면 오랜만에 숙면할 수 있겠지.
그래도 남아 있는 양심 한 조각 때문에 한 번 더 물었다. 자신이 소파에서 자도 괜찮다는 반테온의 말에 델로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픈 가이드를 이런 곳에 재울 정도로 정신없진 않아.”
그 말을 끝으로 델로즈는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언제는 가이드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더니 그나마 조금 사람이 됐나 보다. 웬일인가 싶으면서도 그 배려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먼지 쌓인 이불을 털어 침대 위에 바르게 폈다.
“내일 힘들 테니 어서 자.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진짜 좋은 짓을 하면서도 정떨어지게 말하는 놈이다. 조금 괜찮나 싶으면 꼭 기대를 깨버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낡은 스프링이 삐걱거리며 힘겹게 움직인다. 목을 받치는 베개도 딱딱한 나무 톱밥이 채워진 허름한 주머니였다.
침대에서 보이는 창 너머로 알알이 박힌 별들이 보였다.
언제나 가로등과 비상 전력이 돌아가는 센터 내부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별을 보는 게 오랜만이란 생각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자세히 바라볼수록 보이지 않던 별빛이 계속 나타나 반짝거렸다.
멍하니 하늘을 보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소파에 반쯤 기댄 델로즈가 물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건가?”
“당연하죠.”
“수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
“전혀요.”
태어날 때부터 반테온은 모든 편의 시설과 기술의 중심부에서 살았다. 편리한 저택, 뒤따르는 고용인.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맞춰진 세상에서 지냈다. 센터에서도 그 점은 바뀌지 않았다. 고용인을 대신할 온갖 편리한 물건을 둘둘 두르고 편리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런 환경을 떠나서 산다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 센터를 떠나더라도 더 안락한 저택으로 돌아갈 뿐, 수도와 멀어지는 미래는 그의 인생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