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반테온의 대답에 델로즈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어 보였는데.”
그러고 보면 델로즈는 조용히 반테온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성향을 떠올리면 반테온이 마음에 들어서 본다고 여기긴 어려워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아마 폭포를 홀린 듯 바라보고, 별빛을 감상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물결이 깨지듯 무지개 치며 떨어지던 폭포는 아름다웠다. 발끝까지 비치는 맑은 계곡물에 몸을 담근 건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그림처럼 빛나는 밤하늘도 멋있다. 이런 풍경을 평생 보며 지낸다면 분명 행복하겠지.
하지만 도시에서 자란 반테온에겐 몸 아래서 삐걱거리는 딱딱한 스프링의 촉감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고려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 그래야 할 것 같더군.”
왜 좋게 대화하다가 꼭 마지막엔 비꼬는 말로 끝나는 것일까. 오늘 조심성 없이 금화를 꺼내고,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쓴 것을 비아냥거리는 것이겠지.
잠시라도 평화롭다고 생각한 자신이 잘못했다. 반테온은 이불을 돌돌 말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빛나던 별 대신 낡고 곰팡이가 가득 찬 여관 벽이 보였다.
역시 이런 곳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마을을 찾았으니 큰 도시로 이동하면 센터와 연락 가능할 것이다. 광산에 남은 토벌대의 소식도 들을 수 있을 테고, 곧 돌아갈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거친 면 이불과 딱딱한 베개를 베고도 믿기 어려울 만큼 깊은 잠이 들었다.
***
은은하게 흐르는 바람이 귓가를 살랑였다. 눈꺼풀 너머로 옅은 빛이 느껴졌다. 무거운 눈을 달래 들어보자 커튼이 살랑거리는 창 너머로 어느새 햇볕이 환하게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는 데 발에서 낯선 감각이 느껴진다. 반테온이 고개를 내리자 발목을 단단히 고정한 새 붕대와 부목이 보였다.
“일어났나?”
막 씻고 나온 델로즈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말했다.
“이건 뭐죠?”
“치료사가 아침 일찍 다녀갔다.”
반테온이 자는 사이 의사가 다녀간 것 같았다. 치료를 받은 것보다 자신이 의식이 없는 사이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잠자는 사람 깨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나 봅니다.”
정말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일이 있으면 사람을 깨우면 안 되냐고 말이다. 매번 눈을 떴을 때마다 새로운 상황이 보이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다.
“넌 네가 잘 때 어떤지 몰라서 그래.”
“제 잠버릇이 어때서.”
“잠버릇 말고…… 아니 괜찮으면 됐다.”
죽은 듯이 얌전하게 잔다는 말은 들었어도, 잠버릇 나쁘다는 타박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밤을 보낸 상대와 아침까지 지낸 적은 없었으니. 어렸을 때 듣던 말이었다.
그래도 일어났을 때 흐트러지지 않은 이불과 단정한 옷 상태를 보면 자신의 잠버릇이 어떤지는 대충 알 수 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침대를 내려왔다. 땅을 딛는 발목이 한결 편했다.
“지금 몇 시죠?”
“11시가 넘었다.”
어제 구매한 지도를 보면 센터와 연결이 될만한 마을은 그리 멀지 않았다. 부지런히 이동하면 며칠 안에 도착 가능한 거리였다. 자동차를 빌리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할 테지만, 이곳에 그런 운송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걸어서는 제법 걸릴 것 같은 거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마차를 빌렸으니 이제 걸을 일은 없을 거다.”
“마차?”
“여긴 아직 그런 걸 이용하니까.”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아직 마차를 쓴다니. 수도처럼 자동차가 많지 않은 지역도 최소한 철도나 증기차는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은 했지만, 마차라니. 역사책에서만 보던 이동수단이었다.
수도와 그 외 도시의 격차가 심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욕실로 들어갔다. 덥지도 않았는데 거울에 비친 반테온의 뺨은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찝찝하게 식은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고 뜨거운 물이 채워진 욕조에 몸을 담갔다.
짐도 없으니 준비는 빠르게 이뤄졌다. 밤새 말려놓은 제복을 차려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카운터엔 주인이 아닌 다른 점원이 앉아 있었다.
“아이고.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어제와 다르게 공손하고 빠릿빠릿한 태도로 다가온 점원은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새벽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분이 서슬 퍼렇게 의사를…….”
“조용히 해.”
호들갑스럽게 말하던 점원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 상황을 본 반테온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새벽에 또 열이 났습니까?”
“……그래.”
낮에는 괜찮다고 생각한 몸이 긴장이 풀리니 밤새 아팠던 모양이다.
“왜 깨우지 않았죠?”
아파서 깨우지 못했다고 말했다면 아침에 다그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반테온의 물음에 델로즈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이미 해결된 일이니까.”
이제야 델로즈가 어떤 성격인지 조금은 감이 잡힐 것 같다. 자기 나름 신경을 써 주는 건데, 반테온에겐 그게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말해주세요. 모르는 게 더 불쾌합니다.”
“음…….”
말끝을 흐리던 델로즈의 시선이 가게 문밖을 향했다. 잠시 고민하듯 찌푸려진 눈썹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나가도 놀라지 마.”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델로즈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밖을 향하는 문을 활짝 열자 그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들어온다. 문밖에는 들어올 때처럼 잘 정돈된 여관 마당과 울타리가…….
“이게 무슨…….”
없었다.
눈앞에는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에 뿌려진 나뭇조각과 구석구석 흙이 파인 구덩이만 보였다. 미처 흙을 치우지 못한 자리엔 검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테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흙구덩이 주변도 옅은 붉은색이었다. 뒤늦게 따라온 점원이 그 핏자국 앞에 서더니 곤란하게 웃었다.
“하. 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치운다고 치웠는데 남아 있었네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저거 피 아닙니까?”
“아이고, 곧 잔칫날이라고 돼지 새끼를 잡았더니 좀 남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잔치라고 해도 새벽부터 앞마당에서 돼지 멱을 따지는 않을 터였다.
카운터에 없는 주인. 어제와 다르게 존댓말을 하며 몸을 숙이는 직원. 마당에 남은 핏자국.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어제 누군가 침입했습니까?”
“그래. 주인장이 골드에 대해 입을 놀린 것 같더군.”
결국, 돈에 눈이 먼 여관 주인이 반테온이 가진 골드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걸 노리고 침입자가 방문한 것이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했다. 비발현자 수천 명이 덤벼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상대다. 모두 죽거나 다시 방문하기 힘들 만큼 다쳤겠지. 마당 흙을 다 엎어도 핏자국을 치우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몰래 찾아온 밤손님에게 가질 동정심은 없었다. 그보다 반테온은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팠다고 해도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는 동안 깨지 않았다니.
“잠들면 아무 소리도 못 듣던데.”
“그럴 리가요.”
“그 커다란 덩치 몇 명이 바닥에 처박히는 동안 잘 자더군.”
반테온의 잠귀는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남들보다 예민하진 않아도 특별히 티가 날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하지만 반박하기에는 눈앞에 증거가 너무 뚜렷하다.
반테온은 복잡한 머리를 털었다. 어제 여관에 도착한 후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그사이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당하는 취급에 도둑놈까지.
깊은숨을 바닥에 뱉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한다. 평민들이 지내는 마을에는 반테온이 모르는 것 천지였다.
낯선 환경 사이에 떨어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반테온이 알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결국, 반테온은 굳게 거절했던 과거의 마음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델로즈의 시선을 어슴푸레 피하며 불렀다.
“델로즈.”
“왜 그러지?”
“지금부터 말 놓는다.”
그 말에 눈썹을 움찔한 델로즈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든가, 진작에 그러지라는 비아냥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두 사람 사이로 예약한 마차가 달그락거리며 굴러왔다. 말 2마리가 끄는 소박한 모양의 마차였다. 반테온은 처음 접하는 마차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책에서 보던 것보다 작고 허름한 형태의 마차는 생각보다 냄새나고 불편해 보였다.
미미하게 찌푸린 미간을 눈치챈 델로즈가 물었다.
“마차가 싫으면 또 업고 가도 괜찮다.”
“아니…… 참아 볼게.”
마차가 아무리 불편해도 델로즈의 등에 온종일 업혀 가는 것보단 나았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발판을 딛고 내부에 들어서니 쿠션감이라곤 느낄 수 없는 딱딱한 의자가 있었다. 델로즈가 별도로 여관에서 뜯어온 담요를 밑에 깔고 앉았다.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자 담요가 무색하게 모든 바닥의 굴곡이 느껴진다.
***
다음 마을에 도착한 반테온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매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달리는 내내 멀미에 시달렸다. 발밑이 울렁거리고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두 사람이 있던 마을은 제법 높은 산을 깍아 형성한 것인지, 마차는 거친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