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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31)화 (31/112)

#31

중간중간 준비된 경유지에서 쪽잠만 취하고 말을 바꿔가며 달렸다. 그래도 예상 날짜보다 이틀이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사이 마차와 함께 자갈처럼 흔들리기 바빴던 반테온의 몸이 정상일 리 없다.

중간중간 델로즈가 괜찮냐고 묻고, 차라리 노숙하거나 업고 가겠다는 제안을 오기로 거절했다. 업히는 것도 싫고, 또 새끼 새처럼 안겨서 자는 것도 사절이었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서 쉬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결국, 그 고집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다.

“안색이 나쁘군.”

“윽…….”

마지막 날의 주행은 유독 대단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마을을 도착하기 위해 바쁘게 달린 것은 알고 있다. 그걸 주장한 사람도 반테온이었다. 차라리 천천히 달리고 숲속에서 노숙할 걸 하고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델로즈는 핼쑥한 반테온을 잡아 부축했다. 힘없이 이끌려 그의 몸에 기댔다.

“그러게 쉬다가 가자고 말했지 않나.”

“일찍 도착하는 게 더 좋아.”

“고집은…….”

자신과 다르게 멀쩡한 얼굴의 델로즈를 바라봤다. 종일 마차를 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이다. 피로감 따윈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망할 에스퍼. 어쩔 수 없는 체력의 차이를 느낄 때마다 더 얄밉게 보인다.

목표했던 마을은 반테온의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타고 온 것보다 화려하고 제대로 된 마차와 수도에서 운행하던 증기차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도착한 숙소도 앞서 묶은 여관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시설이 훌륭했다. 문 앞에서 직원이 친절하게 문을 열자 프런트와 샹들리에가 반겨준다. 왕국의 중간 교역지로, 상업이 발달한 마을답게 졸부로 보이는 손님들이 라운지에 거들먹대며 앉아있었다.

두 사람이 입장하자 왕립 에스퍼 센터의 제복을 알아본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다.

“방 하나.”

“두 개.”

익숙하게 방 하나를 잡으려는 델로즈를 막았다. 이전에는 안전을 위한다는 델로즈의 말에 얌전히 한 방에서 밤을 보냈다. 이렇게 안정된 마을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반된 두 사람의 의견에 곤란해하는 점원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반테온은 허리춤 깊은 곳에 보관한 카드를 꺼내어 내밀었다. 정면에 나타난 블랙카드를 본 직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검은색 카드 위에 금빛으로 새겨진 에슬란테의 표식이 빛난다. 카드 위 문양이 진짜가 맞는지 섬세하게 살피는 점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다급하게 외친 직원이 자리를 비우고, 잠시 후 지배인으로 보이는 콧수염 기른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그러곤 반테온의 카드를 빠르게 스캔하고 상냥한 얼굴로 웃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에슬란테 님.”

“방 두 개. 스위트로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저희 호텔이 자랑하는 최고급 객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혹시 식사가 필요하십니까?”

“각자 방으로 보내줘. 메뉴에서 고기는 빼도록.”

“네. 네. 다른 건 어떻게 준비할까요?”

며칠 동안 질 낮은 고기를 먹었더니 다른 음식이 끌렸다. 산에서 먹기 힘든 해산물이나 고급스러운 향신료가 가득 들어간 스튜 같은, 요리다운 요리가 먹고 싶었다.

반테온은 구체적인 요리법과 취향을 반영하여 능숙하게 주문했다. 적당한 샴페인까지 읊은 후에야 주문이 완료됐다. 반테온의 주문이 끝나자 지배인이 시선이 델로즈를 향했다.

“고객님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

“손님?”

재차 묻는 말에 델로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짐짓 화난 것처럼 보이는 변화에 당황한 지배인의 말이 빨라졌다.

“특별히 원하는 요리가 있으면 준비하겠습니다. 저희 호텔 수석 요리장은 왕성 마슐린 3성 레스토랑 출신으로, 대표 메뉴는 올리타 베프 크림을 올린 조개 요리와…….”

정말 알기 싫은 사실이지만, 반테온의 눈에는 지금 델로즈의 표정이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보였다.

“내가 대신 주문하지.”

델로즈 대신해서 지배인을 불렀다. 지배인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저 녀석은 그 말의 반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

“메인은 고기 요리 위주로 준비해줘. 조금 자극적인 맛도 괜찮아. 향신료도 다양하면 좋다. 그리고 술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델로즈에게 물었다.

“더블 캐스크 위스키로 준비해주면 좋겠군. 델로즈. 도수는 강한 편이 좋지?”

“……그래.”

“좋아. 그렇게 준비해줘.”

“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반테온의 요구사항을 모두 적은 지배인은 객실을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델로즈는 그 뒤에서 한 걸음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흘깃 살펴보자 델로즈의 시선이 계속 반테온을 향하고 있었다. 마땅치 않아 보이는 시선이다. 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좋은 방, 좋은 음식. 오랜만에 푹 쉴 수 있으니 만족스러울 것 아닌가.

“내 입맛을 아는 건가?”

“며칠 동안 같이 식사했으니까.”

“겨우 그 정도로?”

겨우 그 정도라니. 매일 저녁을 같이 먹었으니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이미 파악했다. 오랫동안 몸에 밴 버릇이었다. 남이 무엇을 하는지 관심도 없는 델로즈는 몰라도 반테온에겐 그게 기본이었다.

상대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반응하는지. 식성뿐만 아니라 향수까지 외운다. 그것이 귀족들이 서로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연회장에서 잠시 마주친 자들도 다음에 기억하기 위한 습관이었다.

물론 반테온은 다른 사람을 살피며,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인 적은 없었다. 어릴 땐 상대방의 기분 파악이나, 호의를 베푸는 것을 눈치채는 데 둔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이건 단순히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익힌 하는 버릇이었다. 높은 직위에 있을수록 작은 배려로 사람들의 호감과 좋은 평판을 얻기 쉬우니까.

“이 마을엔 에스퍼 센터 지부가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연락하면 될 거야.”

“멀미는 다 나은 모양이군.”

그의 말대로 뇌 속까지 흔들리던 멀미는 어느새 시원하게 가셨다. 고급스러운 향과 빛나는 조명이 닿자 씻은 듯 멀쩡해지는 몸 상태가 자신도 신기할 지경이다.

“스트레스였나 보지.”

“그래 보이는군.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활기차.”

델로즈의 말 속에 작은 불만이 담겨 있었다. 이제 사람이 기분 좋아 보이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 걸까. 정말 사람 기분을 망치는 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거슬릴 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반테온의 기분은 드물게 좋은 상태였다. 오랜만에 거품 욕조에 몸을 누이고, 샴페인 한 잔 곁들일 생각에 기분이 절로 들떴다.

지배인은 곧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 앞에 멈췄다. 한 층에 두 객실밖에 없는 스위트룸의 양쪽 문을 가리키며 카드 키를 전했다. 델로즈는 그걸 받아 방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반테온을 향해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그동안 고생했어. 같이 다니는 것도 내일이 마지막이겠네.”

“…….”

반테온이 인사를 건네도 델로즈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반테온의 객실 문을 노려볼 뿐이었다. 저놈이 이유 모를 행동하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혹시나 룸서비스를 시키고 싶으시면 맘껏 주문해. 그동안 신세 진 것도 있으니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더 못마땅하게 변하는 시선을 무시하고 카드 키로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델로즈는 복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반테온은 겨우 성가신 상대를 시야에서 떨구고 느긋하게 방을 거닐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다.

한쪽에 있는 유리창 밖으로 환하게 폭죽이 터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유독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축제라도 열린 것일까. 창밖을 바라보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차피 축제라고 해도 지방에서 여는 소박한 축제겠지. 반테온은 개의치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매끈한 대리석 욕조에 향이 좋은 거품이 보글거리고 있었다.

발목의 붕대를 풀고 몸을 담그니 뭉쳤던 근육이 노곤하게 풀린다. 몸을 반쯤 물에 담그고 부기가 가라앉은 발목을 움직였다.

부목을 뗀 발목에서는 아직 작은 통증은 느껴진다. 그래도 며칠 동안 땅도 딛지 않은 덕인지, 과하게 돌리지 않으면 다치기 전 상태와 비슷했다.

그래도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이 정도 부상이면 믿기지 않게 양호했다.

처음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으나 델로즈가 보호해준 덕이라는 건 누가 봐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 후로도 반테온보다 다친 발목을 더 신경 쓰고 보살폈다. 델로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고마운 감정은 존재했다.

발목을 다시 물속에 넣고, 어깨까지 모두 담갔다. 폭신한 거품이 턱 밑을 간질거렸다.

아마 델로즈가 없었다면, 그 동굴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았더라도 이 마을까지 오는 건 힘들었겠지.

이제는 그를 괜찮게 봐도 되지 않을까.

물론 거칠고 야만스러운 상대인 건 확실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델로즈는 반테온이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평소 상종하기도 싫다고 생각한 불한당 그 자체였다. 그래도 그의 성장 환경을 고려하면 관대하게 넘어가지 못할 것도 아니다.

서로가 조금 편해지고, 오해가 풀리면 반테온이 ‘그’ 가이드라는 걸 알아도 시원하게 손 흔들고 헤어질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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