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33)화 (33/112)

#33

“로한이라고 했었나?”

“이름을 기억해줄 줄은 몰랐는데.”

로한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허락도 없이 반테온 옆에 앉았다. 그 행동에 서둘러 일어나려 하자 그가 반테온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탁

방비도 없이 저 손에 닿으면 어떤 일이 있는지 알고 있다. 다가오는 팔을 손등으로 거칠게 쳐냈다. 거절당한 로한은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가이드에게 그렇게 닿는 건 예의가 아니야.”

“저런. 다 들켰네?”

바보도 아니고 그때의 강렬한 기억을 잊을 리가 없지. 그때도 에스퍼인 걸 알아보지 못하고 섣부르게 닿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찬찬히 상대를 훑어보던 반테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에 만났을 때, 반테온은 로한이 에스퍼인 걸 알아보지 못했다. 직접 손이 닿기 전까지 그를 비발현자로 생각할 만큼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혹시나 어두운 곳이라 못 본 것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으로 기억 한편에 조용히 묻었다.

하지만 아니다.

다시 만난 로한의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축제의 조명이 빛나는 중앙에 서 있어도 그의 주변에는 아무런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비발현자처럼.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뭐긴 뭐야. 널 기다려 온 왕자님 정도?”

헛소리를.

반테온의 표정이 찌푸려지자 로한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도 못 하겠네. 그냥 평범한 여행객이야.”

“너 미등록 에스퍼지?”

처음에는 야센에 놀러 온 S등급이나, A등급 에스퍼라 생각했다. 잠시 닿았던 순간을 더듬으면 절대 그 이하의 등급은 아니었다. 그리고 센터에서 델로즈를 피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던 찰나, 우연히 왕국 에스퍼들의 명단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 명단을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는지 모른다. 왕국의 모든 에스퍼 A등급과 S등급을 통틀어 눈앞에 있는 로한과 같은 인상착의를 가진 자는 명단에 없었다.

센터에 등록되지 않은 에스퍼.

이상한 인물이다. 상대가 에스퍼라는 건 방금 본인도 인정했고, 반테온도 몸으로 겪어 확인했다. 반테온이 아무리 집중해도 그의 주변을 일렁이는 붉은 빛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반테온에겐 델로즈보다 더 위험한 상대다.

그와 닿은 찰나의 순간이 긴 여운을 남길 만큼 반테온을 힘을 앗아갔다. 그 정도라면 꽤 불안정한 상태였다. 기운이 사납게 요동치는 것이 보여야 할 텐데, 여전히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일반인처럼.

“센터에 등록된 에스퍼 중 로한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어.”

“본명이 아닐 수도 있잖아?”

“짙은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A급 이상 에스퍼는 은퇴한 60대와 40대가 있더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이로 보이진 않는데.”

“이런. 실례야.”

이제는 본인 입으로 미등록 에스퍼라고 인정한다. 반테온이 경계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 그냥 평범한 여행객이야. 센터 따위에 묶이기 싫어하는 자유인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그를 만났던 수도와 여기까지는 비행선으로도 하루가 걸리는 먼 거리였다. 대중적인 교통을 이용한다면 몇 주가 걸리는 거리에서 왜 하필 마주친 걸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축제를 보러 왔지. 이 지방에선 가장 큰 축제거든.”

“이 정도 축제가?”

“무시하지 말라고. 왕국에서 아직 창조신 테제를 기리고 있는 유일한 축제니까.”

창조신이고, 조물주고, 반테온에게 그런 것에 관심 없었다. 이 평범한 축제를 보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이동한 로한이 더 위험해 보일 뿐이다. 여유로운 낯짝도, 껄렁거리는 다리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를 보니 델로즈는 아직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하필 이럴 때 부를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니 쓸모없는 녀석이다. 반테온이 소리쳐도 시끄러운 축제 소음에 파묻힐 거리였다.

“아, 저기가 네 에스퍼인가?”

반테온의 시선을 기민하게 따라간 로한이 말했다.

“제법 좋아 보이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가이드를 이런 곳에 혼자 두다니 실격이야. 그렇지?”

인정하기 싫어도 그 말은 동감이었다. 평소엔 멀어질수록 고맙던 놈이 이런 상황에선 원망스러웠다. 로한을 머리끝부터 찬찬히 살폈다. 도무지 상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위험한 마음을 먹는다면 반테온이 그를 저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테온의 경계가 쉽게 풀릴 기세가 없자 로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행동이지만 그런 모습에도 여전히 못 미더웠다.

“그렇게 보지 마. 정말 반가워서 인사하러 온 거니까.”

“그걸 믿을 것 같아?”

“뭐, 겸사겸사 한 가지 더 알려주러 온 거긴 하지.”

로한은 그 말 후,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바라봤다. 밝은 조명 빛에 반사되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까만 하늘이다. 로한은 그곳을 향해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런 밤하늘은 조심해야 하거든.”

“뭐?”

“넌 마음에 드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오늘은 높은 곳으로 가지 마.”

로한은 영문 모를 이야기를 진지하게 전하더니 팔을 밑으로 떨어트렸다. 그러곤 반테온의 뒤를 흘낏 살펴본다.

“드디어 네 에스퍼의 용건이 끝났나 본데?”

그의 말대로 델로즈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 화가 난 듯 격정적인 움직임이었다.

“내 말을 잊지 마.”

“그게 무슨 말이야.”

“다음에 보면 좀 더 반갑게 인사해 달라고. 그럼 이만 가볼게.”

마음대로 작별을 고한 로한은 그대로 뒤를 돌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처럼 빠른 동작이었다. 평균보다 큰 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반테온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건 확실하지만, 믿을 수 없는 구석이 많았다.

그사이 다가온 델로즈가 흉흉한 표정으로 반테온의 뒤에 섰다.

“저 녀석은 뭐지?”

델로즈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누구와 만났냐고 따지듯 묻는 말에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그의 질문은 반테온의 귀에 굉장히 불만스럽게 들렸다.

자기는 아가씨 두 명과 시시덕거리며 놀고 온 주제에 누구와 있었냐고 따지듯 묻는 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왜 더 놀다 오지 그러지?”

“그게 무슨 소리야.”

“사이 좋아 보이던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나 보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반테온이 위험인물을 경계하는 동안 한참을 넋 놓고 대화하던 걸 본 뒤였다.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사실 다른 여자에게 눈이 팔린 건 이해할 수 있다. 반테온도 남자였고,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조금 전 긴장감을 생각하면 괜히 속이 좁아진다.

반테온의 추궁을 부정한 델로즈는 여전히 딱딱히 굳은 미간을 한 채 질문했다.

“그럼 넌 방금 저놈이랑 무슨 사이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기엔 친근해 보이던데.”

이젠 눈도 잘못되었나 보다. 그 경계하던 모습을 사이좋다고 오해하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 좋은 귀도 축제의 소란 속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나 보다. 반테온이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자 델로즈는 계속해서 추궁하듯 물었다.

“이런 곳에서도 남자를 만나는 건가?”

델로즈는 한심하다는 듯, 어이없다는 듯, 그런 하찮은 눈빛으로 반테온을 내려다봤다. 델로즈를 만날 때마다 케슬란과 테아로트가 있었던 것을 비꼬는 것이겠지.

한동안 잠시 잊고 있었다. 델로즈는 반테온의 취향을 그저 비아냥거리는 놈이었다. 그동안 반테온이 다친 상태였고, 유일한 가이드이기에 억지로 거부감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겠지.

델로즈를 바라보는 반테온의 시선이 못마땅하게 찌푸려졌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반테온도 따질 내용이 많다.

“잠시만 눈을 떼면 매번 새로운 남자가 붙어있는 것 같군.”

“들었던 소문엔 매일같이 여자를 바꾸며 놀았다던데. 나에게 따질 입장인가?”

따질 사람이 따져야지. 반테온이 그동안 센터에서 들은 델로즈의 상대만 열 명이 넘었다. 그런 상대가 반테온에게 문란하다 타박하다니 웃긴 이야기였다.

“그건…….”

“나도 네 행실을 따질 생각 없으니 내 일에 간섭하는 짓은 그만해. 기분 나쁘니까.”

“…….”

직설적인 지적에 입을 굳게 다문 델로즈의 미간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조금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기분 탓이리라 넘겼다. 평소에 그리 뻔뻔한 놈이 과거가 문란했단 지적에 티 날 정도로 동요할 리 없었으니까.

잠시 동요하던 델로즈는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곤 변명하듯 덧붙였다.

“방금은 정말 오해다.”

“해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젊은 남자가 여자랑 노는 건 흠이 아니잖아.”

“너는…….”

단호한 반테온의 말에 델로즈는 거칠게 자신의 앞머리를 쓸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 탓인지 넓은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 보였다.

숨을 고른 델로즈는 낮은 목소리를 변명하듯 뱉었다.

“갑자기 하늘이 위험하단 이야기를 하며 매달리더군.”

델로즈의 이야기에 놀라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방금 로한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같았다. 설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그러기엔 거리가 멀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몰린 사람들 때문에 잡음과 소음이 많았다. 흥이 가득한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바로 옆이 아니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운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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