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34)화 (34/112)

#34

델로즈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었다.

“곧 천벌이 떨어질 것이니 나보고 구해달라고 하더군.”

이건 로한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둘의 이야기를 엿들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 여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조금 전, 델로즈의 앞에 있던 상대를 떠올렸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시골 아가씨들이었다. 축제를 위해 조금 화려하게 입은 복장을 제외하곤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갑자기 델로즈를 잡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필사적으로 붙잡는데 떨구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게 진짜야?”

“속일 이유가 없잖아.”

“아니, 그 여자들이 진짜로 그런 말을 했냐고.”

델로즈는 재차 묻는 말에 이상하단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반테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저 미친놈 하나의 헛소리라 치부하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이런 말을 하고 접근한 이유가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도 똑같은 말을 들었어. 하늘이 위험하니 높은 곳에 가지 말라고.”

“뭐?”

델로즈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그놈은 뭐 하는 녀석이지?”

“잘 몰라. 전에 딱 한 번 만난 적 있는데. 그때도 별다른 친분은……어?”

방금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스쳤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머릿속이 굳으며 토할 듯 어지러웠다. 분명 로한은 반테온과 딱 한 번 마주쳤다. 몇 달 전 방문했던 야센에서.

그때 자신이 어떤 상태로 야센을 방문했었지?

거대한 창이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분명 반테온은 그때 긴 머리에 인식 방해장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폭주 직전이라고 해도, SS급의 델로즈조차 알아보지 못한 장치였다.

그런데 로한은?

변장도 하지 않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고 접근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반테온이 변장을 하고 만났다는 사실조차 잊고 상대할 정도였다.

믿기 어려운 사실에 벌어지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얀 얼굴이 더 파랗게 질린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델로즈가 인상을 찌푸리며 반테온의 팔을 잡았다.

“왜 그러지?”

“…….”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센터 지부로 돌아가자. 분수대 주변엔 높은 건물이 많아.”

분수대의 주변은 마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반테온과 델로즈가 묵는 호텔이 지척에 닿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호텔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지만, 델로즈가 몸을 당겨 호텔과 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테온은 그 행동에 묵묵히 델로즈를 따라 걸었다. 발을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은 아직 로한에 관한 충격으로 어지러웠다.

대체 뭐지? 마석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두 사람은 분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과한 걱정이었을까. 이동하는 동안 하늘은 아무 일 없이 까맣고 잠잠했다.

괜히 이상한 사람 말에 휩쓸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굉음이 들렸다.

-꺄아!

-도망쳐! 이쪽으로 온다!

뒤이어 멀리서 귓가를 찢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온 시야가 벌겋게 변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어젯밤 반테온과 델로즈가 묵었던 호텔이었다. 그들이 지낸 꼭대기 스위트룸이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떨어진 간판과 건물 잔해가 사정없이 광장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세상에…… 저게 뭐야.”

입 밖으로 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불타는 호텔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로, 하늘에서 쏟아지듯 거대한 가고일이 도시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마물이 빠른 속도로 도시로 돌진한다. 별처럼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가고일의 붉은 눈동자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빠른 속도로 하강한 가고일이 높은 건물을 사정없이 발톱으로 깨부쉈다.

경악스러운 시선 앞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델로즈의 등이 반테온을 가로막은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의 옷단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

“갑자기 마물이 습격했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어.”

“사람들은? 피해는 얼마나 되는 거지?”

듣지 않고도 답을 알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다. 가고일이 호텔을 무너트리고, 광장에 불타는 돌무더기가 떨어졌다. 축제로 잔뜩 모인 사람들은 그 아래서 춤을 추고 있었지.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가고일 한 마리가 작은 촌락을 숯 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마물 수백 마리가 마을을 습격한다면 결과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피해의 규모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반테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로한의 정체가 뭐지.

기운이 보이지 않는 미등록 에스퍼. 마석의 힘이 통하지 않는 상대. 거기에 마물의 등장을 예측했다. 아니,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어쩌면 마물을 부릴지도 몰랐다.

반테온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정리할수록 한 가지 결론만 도출된다. 지금 로한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방금 헤어졌으니 서두르면 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눈에 띄는 인물이니 멀리서도 잘 보이겠지.

움직이려는 반테온의 팔을 델로즈가 잡아챘다.

“어딜 가는 거지?”

“그 남자를 잡아야 해.”

그 말에 델로즈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테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델로즈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 방향엔 높은 건물이 많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위험해.”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습격은 그놈 짓이야.”

“무모한 소리 하지 마. 그자가 범인이라면 마물을 부릴 줄 안다는 건데, 네 안전을 어떻게 보장하지?”

그건 맞는 말이었다. 반테온이 로한을 잡아도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행운의 안배인지,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 델로즈가 나선다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범인을 잡으면 마물도 쉽게 제압될 것이다. 그런데도 델로즈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고일 말고 다른 마물이 나타날 확률이 높아. 게이트에 다가갔을 때와 느낌이 비슷해.”

델로즈의 반테온의 팔을 당겨 자신의 등 뒤로 돌려보낸다.

“네가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어.”

“그래서 범인일지도 모를 상대를 놓아주라고?”

“곧 우리를 태울 비행선이 올 거다. 거기에 널 맡기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아.”

그 말에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로한이 의심스러운 건 마물과 관련된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반테온의 변장을 뚫고 알아봤는지, 왜 기운이 보이지 않는지 확인해야 할 사실이 넘쳤다.

지금 놓치면 언제 또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초조한 반테온의 마음도 모르고 델로즈는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늦으면 새벽에 올 수도 있어.”

아직 저녁 10시다. 비행선이 오기를 넋 놓고 기다리는 동안 로한은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가이드의 보호가 최우선이라고 하지 않았나.”

반테온은 융통성 없는 델로즈를 답답하게 바라봤다. 언제부터 센터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

이러는 동안에도 마물은 계속해서 도시로 쏟아졌다. 지부 사람들이 바쁘게 나와서 전투에 합류해도 마물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이런 재난을 수도에 있던 반테온이 들었다면 ‘저런 큰일이겠네’ 하고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눈물지으며 가슴 아파하는 착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본 광경은 기사 속에서 접했던 많은 사건과 다르다. 지금까지 반테온이 아는 전장은 에스퍼들의 전투였다.

방금까지 옆에서 웃고 있던 사람들, 춤추며 즐거워하던 커플들, 고개를 까딱이며 음악을 즐기던 노인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종이처럼 쓰러지고 죽어가는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골목 사이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이 들린다. 부모를 놓쳤는지 바닥에 쓰러진 채 엉엉 울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반테온의 팔을 델로즈가 굳게 잡아챘다.

아이의 주변으로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 상황에서 델로즈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

강렬한 소음 속에서 델로즈의 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보다 가라앉은 눈동자로 냉정하게 반테온을 응시했다.

“어차피 내가 없었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다. 뭐가 문제지?”

그 말에 반테온의 입매가 굳었다.

그래도 그간의 시간으로 델로즈의 성격을 조금은 파악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낯설었다. 불길에 반사되는 델로즈의 동공이 좁아졌다. 평소보다 길게 보이는 동공이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반테온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경악이 담긴 반테온의 행동에 델로즈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피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를 손쉽게 외면한 그가 반테온의 뒷걸음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테온도 알고 있다.

개인이 가진 부와 명예를 다른 자에게 나눠 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힘이 있는 자가 꼭 남을 위해 행동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가진 자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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