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런 순간에 냉정한 델로즈가 낯설었다. 마치 지금까지 사람인 척하던 다른 존재를 보는 듯하다.
“차, 찾았다!”
서먹한 두 사람 사이로 멀리서 제복을 입은 사람이 달려왔다.
“반테온 님! 델로즈 님 여기 계셨습니까!”
지부 소속 마크를 팔에 달고 있는 남자는 숨을 헉헉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숙이고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며 더듬더듬 용건을 전했다.
“지금 비행선이 거의 다 왔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새벽에 올지도 모른다던 비행선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반테온의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출동했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지부 소속 에스퍼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먼 하늘에서 하얀 구체가 내려오고 있었다.
“가자.”
“…그래”
지금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델로즈가 그제야 움직인다. 함께 걷는 두 사람 사이엔 여전히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비행장까지는 대략 500m. 얼마 걷지 않아 건물 사이로 거대한 공터가 보였다. 비행장의 입구를 표시하는 철제 울타리 앞에 도착하자, 멀리서 착륙한 비행선과 그 주변을 바쁘게 움직이는 센터 소속 에스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반테온과 델로즈를 발견하고 이곳을 향해 뛰어왔다.
멀리서도 붉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반테!”
익숙한 목소리가 크게 반테온을 불렀다. 오랜만에 만나는 테아로트였다. 폐광에 있을 테아로트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무사했구나!”
“테아로트. 어떻게 여길 왔어?”
“네가 사라지자마자 수색팀을 제외하고 다 본부에 돌아가서 대기했어. 소텐루 대장까지 다 대기하다가 바로 움직인 거야.”
수색팀만 남기고 나머지 인원을 본부에서 대기시키다니. 이해 못 할 지시에 의아해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긴 에스퍼 델로즈와 가이드인 반테온이 함께 사라졌으니 조난되었다는 생각보다 델로즈가 반테온을 데리고 탈주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한 것이다.
“괜찮은 거 맞아? 혹시라도 저놈이….”
“잠시 헤맸을 뿐이야. 걱정 안 해도 돼.”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평소엔 귀찮던 테아로트를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가웠다. 조금 전 삭막했던 분위기도 잊고 한쪽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테아로트가 반가움의 표시로 손을 뻗어 반테온의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윽…….”
예상보다 강한 힘에 반테온이 본능적으로 소리를 냈다. 놀란 테아로트가 한 걸음 물러서기도 전, 옆에서 지켜보던 델로즈가 그를 거칠게 치웠다. 얼떨결에 밀쳐진 테아로트는 자신을 민 상대를 노려봤다.
“소식이 없기에 어디 도망갔나 했는데 아닌가 보군요.”
“그럴 리가.”
“그쪽은 굳이 돌아올 필요는 없었는데. 본인이 센터보단 밖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환대 고맙군.”
델로즈는 날을 잔뜩 세운 테아로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유로운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듯 바라보던 테아로트는 반테온 쪽으로 돌아섰다.
“반테 많이 힘들었지? 어서 들어가자.”
비행선 쪽으로 안내하려는 테아로트의 앞을 델로즈가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며 묻는 테아로트에게 비아냥거렸다.
“환자를 험하게 다루는 놈에게 맡길 순 없지.”
그 말에 테아로트의 표정이 흔들렸다. 싸늘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걱정스럽게 바뀌었다.
“반테. 어딜 다친 거야? 많이 다쳤어?”
“그냥 발목을 접질렸을 뿐이야. 지금은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했음에도 테아로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반테온의 몸을 둘러보며 살폈다. 더 다친 곳은 없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둘러보더니 반테온답지 않게 해진 제복을 보며 혀를 찼다.
어젯밤 호텔에 관리를 맡긴 덕에 깔끔해 보이는 제복임에도 미세하게 벗겨져 광택을 잃은 단추, 살짝 색이 바랜 바짓단을 숨길 수는 없었다. 평소의 반테온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다.
그동안의 행적이 고스란히 보이는 흔적에, 테아로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생했구나…….”
“괜찮아. 무사히 돌아왔잖아.”
“당장이라도 아래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지진이 길었어.”
지진이 멈추고 반테온을 구하러 가려 했을 때,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은 돌 더미로 막힌 뒤였다. 갇힌 사람을 구조하는 게 최선이었다. 풀이 죽은 테아로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자, 테아로트가 반테온의 팔을 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같은 조에 있었어야 했는데.”
“네가 있어도 별로 달라지진 않았을 텐데.”
가만히 듣고 있던 델로즈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짱을 낀 모양새가 흉흉하다.
두 에스퍼의 기운이 격하게 피어올랐다. 주변을 점차 붉게 물들이며 불타듯 얽힌다. 한참을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테아로트는 비웃음 섞어 말했다.
“저라면 최소한 다치게 하진 않겠죠. SS급 에스퍼가 추락하는 가이드 한 명 제대로 못 잡아 다치게 합니까?”
“나니까 이 정도야. 너랑 같이 떨어졌다면 이미 형체도 없이 으깨졌을 거다.”
으깨지다니. 델로즈의 과격한 표현에 같이 듣던 반테온의 표정까지 일그러진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때도 푸딩 같다고 묘사했었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그럴 리가요. 제가 다치는 한이 있어도 반테는 보호했을 겁니다. 뭐, 그쪽은 멀쩡해 보이네요?”
“…….”
“누구와 다르게 전 가이드 보호가 최우선인 사람이라서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테아로트는 센터 교육을 철저하게 엄수하는 모범 에스퍼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빈정댔다. 모범 에스퍼란 부분엔 반박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반테온은 한 걸음 물러나 유치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봤다.
“네 지론 따위 알 바 아니고. 그 모범 에스퍼가 남의 가이드에게 치근덕거리는 건 확실해 보이는군.”
“남의 가이드?”
“방금 네가 잡은 내 가이드를 말하는 거다.”
“뭐?”
내 가이드라는 말에 반발하려던 반테온은 테아로트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서 마주 보는 테아로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던 그는 미동 없는 반테온의 태도에 입을 악물더니 겨우 질문했다.
“반테. 저놈이랑 가이딩 가능해?”
“…그렇더라.”
테아로트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놀란듯한 그의 옆에는 의기양양한 델로즈가 보였다. 마치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 주장하는 것 같았다. 게임에 이긴 어린애같이 당당하게 가슴을 편다. 단순하기는.
반테온은 그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테아로트의 어깨를 토닥였다.
“당분간 ‘임시’ 가이드 계약을 하기로 했어.”
“임시?”
그 말에 델로즈의 시선이 반테온을 향했다. 반테온은 신경 쓰지 않고 한 번 더 강조하여 이야기했다.
“그래. 델로즈가 찾는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 임시로. 델로즈가 남자 가이드와 정식으로 매칭 할 리가 없잖아.”
일부로 임시라는 말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눈치가 빠른 테아로트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델로즈와 가이딩 되는 건 들켰으나, 그날 밤 폭주를 막은 사람이 반테온이라는 사실을 들킨 건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아 말했다.
반테온의 의도대로 테아로트의 눈빛이 빠르게 밝아졌다. 아직 완전히 늦지 않았다. 그날의 사건을 들키지 않았다면 다음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니 최악의 사태는 피한 것이다.
“그렇지. 남자 가이드는 절대로 싫다던 분이잖아. 잠시 헛말이 나왔나 보네.”
기운을 차린 테아로트가 델로즈를 보며 외쳤다. 방금까지 기분이 좋아 보이던 델로즈는 입을 닫고 조용히 응시했다.
그때 비행장 멀리서 솟아오르는 불길이 더 거칠어진다. 뒤에서 바쁘게 달리는 센터 요원들의 소리도 요란스럽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반테온의 일은 이 뒤에 처리할 수 있으나, 코앞에 닥친 큰 사건은 시간을 놓치면 위험하다.
“알았으면 어서 가. 마물을 처리해야지.”
“아…….”
그제야 상황을 떠올린 테아로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선을 타고 온 인력들은 벌써 동원됐을 거야. 슬슬 합류해야겠네.”
“전력은 충분해?”
“마물 숫자가 이상하게 많긴 한데, 뭐 하루면 정리할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다. 운명인지 우연인지, 두 사람을 데리러 가장 빠른 비행선이 움직였다. 성능만큼 크기도 큰 비행선이 움직였기에 탑승 인원이 많았다. 구조 요청을 보내자마자 새로운 인력을 꾸릴 것 없이 광산에서 돌아와 본부에 대기했던 요원들을 그대로 파견했다. 덕분에 대부분 전투 요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테온은 전장에 합류하기 위해 돌아서는 테아로트를 불렀다. 언제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친구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테아로트. 조심해서 다녀와.”
“물론. 네가 조심하라는데 조심해야지.”
무사를 비는 인사에 테아로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가볍게 말하는 모습이 못 미더워 보이지만, 능력은 쓸만한 놈이다. 이 사태도 금방 정리할 테지. 테아로트가 손을 흔들며 멀어지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보내야 했다.
“델로즈.”
“왜?”
뭐가 불만인지.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델로즈의 기분이 최악으로 나빠 보였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짜증이 고인 눈썹이 움직이며 반테온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