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안 갈 거야?”
“…….”
안전한 곳으로 왔으니 이제 반테온 곁에 붙어있을 이유도 없다. 한시라도 빨리 전장에 참가했으면 하는데, 델로즈의 무거운 발걸음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델로즈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반테온을 바라봤다. 무언가 바라듯,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태도였다. 주요 전력이 미적거리니 속이 탄 반테온이 재차 물었다.
“뭐가 문제인데?”
“나에겐…….”
“너에게 뭐?”
“……아니, 아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킨 델로즈는 재킷을 잠그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언제 망설였냐는 듯 실루엣도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델로즈를 바라보며 반테온도 고개를 저으며 비행정을 향해 걸어갔다. 저 변덕스러운 성격을 이해하려 할수록 본인만 손해다.
멀리서 대원들에게 바쁘게 지시를 내리는 소텐루 대장이 보였다. 홀로 걸어오는 반테온을 발견한 그는 바쁘게 뛰어 다가왔다.
“반테온 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오랜만입니다. 다른 분들도 무사하십니까?”
“부상자는 있었으나 모두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소텐루의 얼굴은 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작전 대장이니 두 사람에 실종에 많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물며 사라진 대원은 에슬란테와 SS급 에스퍼다. 전대미문의 사태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지난날 동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사라진 두 사람보다 더 마음 졸이며 보냈겠지. 괜히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함이 생겼다.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아뇨, 무사히 돌아오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반테온의 무사한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비행선 안으로 안내했다. 그를 따라 비행선에 올라타자 문이 천천히 닫혔다. 대원들이 출동한 후 소텐루 대장과 반테온 둘만 기내에 있는데, 소텐루 대장이 갑자기 소리 차단 마석을 발동시켰다.
의아해하는 반테온을 향해 소텐루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반테온 님. 혹시 델로즈 님의 가이딩이 가능하십니까?”
“네.”
“역시.”
긴가민가하던 소텐루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곤란한 기색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르며 고민에 빠졌던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 왕국에서 델로즈 님의 가이딩이 가능한 사람은 반테온 님밖에 없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파트너를 만들지 않으셨던 거로 압니다만, 이번엔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피하고 있던 진실이 와닿는다. 센터로 돌아가서 이 사실이 발표되면 한바탕 큰 파도가 불 것이다.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을 스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벌써 피곤하다.
“어쩔 수 없지요.”
조용히 수긍하면서도 입 안이 쓰다. 가만히 있어도 화제를 몰고 다니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고를 쳤으니 조용하길 바라는 게 사치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델로즈와 임시 가이드만 하자고 미리 약속해 둔 것일까. 심기를 긁어대던 델로즈의 언사는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지만, 그때라도 확실히 약속해 둔 게 다행이었다.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비행선 창문을 바라봤다. 들것과 붕대를 옮기는 사람들이 분주했다.
“혹시 일손이 부족합니까?”
“괜찮습니다. 반테온 님께서 고생하지 않으셔도 충분합니다.”
소텐루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내부 지원이라도 필요하면 편하게 말해주세요.”
“그럴 일이 생긴다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푹 쉬십시오.”
소텐루 대장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며 반테온을 방으로 안내했다.
소텐루가 안내한 방은 비행선 가장 안쪽에 있는 공간이었다. 적당한 크기에 시설도 깔끔했다. 무엇보다 방 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금실과 붉은실로 자수를 놓은 모양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 거대한 비행선의 함장, 아니면 왕족이 사용할 것 같은 방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주 황금 달걀 취급을 하는군.’
귀한 대접에는 이골이 난 반테온도 이 정도 대접은 처음이었다.
방의 배치는 작전 대장인 소텐루의 결정이다. 그 딱딱한 대장이 이런 판단을 할 정도라. SS급과 손잡을 에슬란테를 향한 가장 직접적인 반응이다.
방 안에는 새로운 단말기와 깔끔한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반테온은 샤워실에서 적당히 씻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벗은 제복에서 나는 매캐한 탄내가 세지 않게 상자에 넣어 뚜껑을 잠갔다.
그때, 벽 한 면을 차지하는 거대한 창문 너머로 불꽃이 터진다. 하늘을 날던 가고일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그 뒤로 익숙한 델로즈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반테온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델로즈와 테아로트가 합류했으니 마물은 곧 해결될 것이다. 비행선에는 구급 물품도, 인력도 충분하니까. 상황은 금방 정리될 테지.
델로즈의 그림자가 다음 마물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기댔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광산에서 떨어져 고립되고, 다친 발로 떠돌며 이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며칠이 너무 길었다. 피로에 지쳐 딱딱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덜컹거리는 마차를 버티며 겨우 이곳에 왔다.
이제 진짜 끝났다.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그 시간이 반테온에겐 그 어떤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겨우 긴장이 풀리자 쌓였던 피로가 몰려온다. 몸을 감싸는 푹신함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델로즈는 수건을 받아 뺨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장갑부터 제복까지 전신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가고일 정도라면 핏방울 하나 튀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잡고 찢고 부수고 싶은 기분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화려하게 움직였더니 결과가 이런 모습이다.
마물의 습격 속에서 자신을 경악스럽게 바라보던 반테온의 눈빛이 떠올랐다. 냉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위험한 일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피에 젖은 상의를 벗자 바닥에 질척한 소리를 내며 무겁게 떨어진다. 이런 꼴을 보면 또 찌푸려진 눈빛으로 경멸하겠지. 까다롭기 그지없다.
“가이드실 준비할까요?”
“아니, 씻는 게 먼저다.”
마물의 피 냄새는 사람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평생 향수만 맡고 자랐을 자신의 가이드라면 기민하게 알아채고 인상 쓰겠지. 코를 손으로 막는 티 나는 짓은 하지 않아도 그 수려한 얼굴 가득 거부감이 맴돌 것이다.
욕실에 도착한 델로즈는 자신의 몸을 씻고, 씻고 몇 번 더 씻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핏물이 든 손톱 아래까지 완벽하게. 마지막 남은 체취가 빠질 때까지 여러 번 씻었다. 몸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줄기가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것을 신경 쓰는 자신의 행동이 낯설다. 평생 피 냄새가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모습이 생소했다.
마물을 처리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기분 나쁜 금발 머리를 찾아봤다. 마을을 훑어봐도 이미 이곳을 떠났는지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물을 부른 범인을 놓쳤으나 아까의 판단이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켜야 할 건 지켰으니까.
떨어진 건물 조각과 가고일에 깔려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델로즈는 그랬다. 옆에서 함께 싸우던 용병이 죽어도, 수십 명이 돌무더기에 깔리는 일이 일어나도 그의 감정은 무감각하게 흘러갔다.
인간이 죽는 것과 동물이 죽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 언젠가는 죽을 생명이 조금 일찍 사라질 뿐이었다. 그런데 왜 사람만은 다른 것일까.
그런 생각이 이상한 시선을 부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랬던 델로즈가 반테온이 뒷걸음치는 작은 행동조차 보기 싫어 한참을 씻으며 피 냄새를 지웠다. 이런 수고를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가이드라서 그런 것일까.
오랜 시간 동안 씻고 나온 델로즈 앞에는 소텐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델로즈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반테온 님께 안내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행선 가장 깊숙한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델로즈는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펴본다. 비행선에서 가장 깊은 곳,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소텐루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틈이 살짝 벌어지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저 안에 자신의 가이드가 있다는 것을.
불쾌하게 짓누르던 모든 감각이 사그라진다. 안개처럼 포근하게, 물결처럼 고요하게 전신을 감싸는 기운이다. 닿지 않으면 가이딩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이 느낌을 모르고 지냈을까.
처음 반테온을 본 순간부터, 남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특출나게 뛰어나진 않으나 그저 다르다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가이딩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토벌대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가까이서 바라봐도 확신은 없었다. 계속해서 그를 주시했으나 남들과 조금 다른 느낌 그 이상의 감각은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