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하지만 떨어지는 반테온을 잡아채는 순간 확실하게 알았다. 손가락 끝부터 몸속에 존재하는 모든 신경 세포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 낯선 감각에 당황하여 떨어지는 반테온을 완벽히 보호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와 마을로 이동하는 동안 델로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다. 그런 욕구에 의지한 채 어린아이처럼 핑계를 대며 그를 업고 안으려 애썼다.
상대가 닿기도 싫었던 사내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몸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완전히 열린 문 너머로 침대 위에서 잠든 반테온이 보였다.
군용 비행선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고급 침구 사이에 누워있었다.
그 사이에서도 반테온의 존재감은 죽지 않았다. 황금 위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어떤 장식보다 귀해 보인다. 처음 봤을 때 사내놈이 거기서 거기라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기 어려웠다.
조용히 이불을 덮고 일자로 누운 반테온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아니라면 죽은 걸로 보일 정도다.
“이런, 피곤하셨나 봅니다. 깨울까요?”
다가오는 소텐루를 팔을 들어 제지했다.
“하지만 가이딩을 받으셔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델로즈의 시선을 받은 소텐루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겨우 그 정도 힘을 썼다고 반테온을 깨울 필요 없었다. 조용한 축객령으로 소텐루를 쫓아내자 이곳은 두 명만 남은 밀실이 되었다.
자는 사람을 깨워 가이딩 하는 번거로운 짓 따위 할 필요 없다. 그저 조용히 곁에만 앉아있으면 충분하다.
델로즈는 반테온이 누운 침대 아래에 조용히 기대어 앉았다. 곤히 잠든 반테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속눈썹의 떨림, 살짝 움직이는 입술의 주름. 생동하는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사내다운 생김새였다. 분명 고운 얼굴을 하고 있으나, 여자로 보일 만큼 선이 가늘지 않았다.
이불 밖으로 반테온의 하얀 발이 튀어나온 것을 본 델로즈는 이불을 끌어 그의 발을 덮었다.
스스로 잠귀가 어두운 편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반테온은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손이 뜨겁도록 열이 올라도 깨지 않았다. 발목이 거의 다 나았다는 걸 알면서도 델로즈는 혹시라도 반테온이 열이 날까 봐 그의 호텔 방 문 앞을 서성거리는 바보짓도 했었다.
“음…….”
기척을 느낀 탓일까? 반테온이 작게 신음하며 움직였다. 살짝 움직인 손끝이 이불 밖으로 나온다. 델로즈는 머뭇거리다가 그 손가락 끝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살짝 닿은 손에 점차 욕심이 나고, 어느새 자신의 손바닥이 반테온의 하얀 손을 완전히 가뒀다.
마주 잡은 손으로 반테온의 맥박이 느껴졌다. 델로즈는 그 맥을 속으로 세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파동을 느끼며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다.”
델로즈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 눈을 떴다. 방금 자신이 뭐라고 말한 것일까. 겨우 손 하나 닿은 것에 만족스럽게 감탄한 걸까.
델로즈는 마주 잡은 손을 바라봤다. 반테온의 얼굴도 번갈아 본다.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충만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맞닿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좋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자신의 마음을 꺼낸다. 귓속에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는 제법 행복하게 들렸다.
***
[곧 비행선이 착륙합니다. 대원들은 모두 자신의 구역에서 대기하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곧 비행선이 착륙하오니 소지품을 챙겨 자신의 구역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스피커로 들리는 음성에 눈이 뜨였다.
언제 잠들었던 것일까? 시야에는 파란 하늘과 솜처럼 떠다니는 구름이 보였다. 느낌도 없이 움직이던 비행선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아래로 하강하는 중이었다.
반테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눈앞에 티 세트가 보였다. 향이 좋은 홍차와 부드러운 디저트로 구성된 다과였다.
누가 이런 배려를 한 것일까. 누군지 몰라도 제법 칭찬할만한 행동이다.
간단하게 씻고 나와 복장을 정비하자 언제나 보던 단정한 반테온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만족스럽게 머리를 마무리하고 안경을 썼다.
-똑똑
“반테, 일어났어?”
역시 파수꾼이라는 별명이 헛되지 않은 녀석이다. 문을 열자 벌써 준비가 끝난 테아로트가 자신의 짐을 들고 앞에 서 있었다.
“마물은?”
“다 끝났지. 복구조만 남기고 수도로 이동 중이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테아로트는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을 내려다보자 익숙한 수도의 전경이 보였다. 두꺼운 성벽이 둘러싼 거대한 요새다.
“드디어 수도로 돌아왔어.”
“그러게. 어쩐지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놈과 어떻게 된 거야? 궁금해서 한숨도 못 잤어.”
반테온은 다급하게 캐묻는 테아로트를 진정시켰다.
“지금 이야기하기엔 조금 길어. 나중에.”
벌써 하늘을 날던 비행선은 어느새 낮은 고도로 내려와 수도의 건물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곧 착륙이다.
테아로트는 매번 이야기를 미룬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익숙하게 비행선의 출구로 안내했다. 반테온이 그의 뒤를 따라 걷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따라왔다.
비행선 출구에 도착하자, 델로즈가 앞에 서 있었다. 델로즈는 반테온을 흘낏 보고, 그 옆의 테아로트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델로즈는 역시나 그의 성격처럼 깔끔한 새 제복을 대충 풀어서 자유롭게 입고 있었다.
커다란 기체가 미끄러지듯 내려앉으며 땅에 착륙했다. 빨간색이던 비상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대기 상태가 되자 대원들이 차례대로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이 비행선의 함장인 동시에 작전 대장인 소텐루였다. 그리고 그 뒤로 델로즈와 반테온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시야를 가리는 눈부신 햇살에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앞에는 거짓말처럼 많은 인파가 비행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델로즈 대장!”
페턴이 잿빛 머리를 휘날리며 숨 가쁘게 뛰어왔다. 전혀 반기는 기색이 없는 델로즈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동안 멀리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흰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지은 센터장이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허허허.”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임무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상황 아닙니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지요.”
나이가 지긋한 센터장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반겼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지능계 에스퍼였다. 가문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센터장은 반달처럼 접힌 눈으로 델로즈와 반테온을 번갈아 보며 흐린 눈을 빛냈다.
“피곤한 줄 알지만, 이 늙은이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매칭 검사실로 가시지요.”
능구렁이 같은 영감. 반테온은 웃는 얼굴로 티 나지 않게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평소엔 얼굴도 보기 힘든 영감이 이럴 땐 사람들의 중심에 서서 쐐기를 박는다.
이 타이밍에 반테온에게 검사실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대로 두 사람의 매칭률까지 확인하고 자신이 제어할 수 있게 조율하겠다는 것이겠지.
겸사겸사 매칭률 테스트를 센터장이 직접 권했다며, 그 공을 챙기려는 의도도 있을 터였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지만, 대외용으로는 충분히 영향력 있었다. 매칭률을 처음 확인하고 발표하는 역할도 가져가겠지.
소텐루도 이런 일을 예상했기에 매칭 테스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다.
현장만 뛰던 소텐루 대장이 눈치챌 정도라면 센터장답지 않게 얕은수를 썼다.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다.
에슬란테 가문이 SS급 에스퍼와 친분을 맺는다. 이 문장 하나로도 잔뜩 촉을 세우며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으로 반테온에게 한 다리라도 걸치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이 배로 많아질 것이다.
숱하게 가봤던 매칭 검사실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수많은 이목이 따라붙었다. 흥미와 경계가 뒤섞였다.
다행히 반테온의 등이 시선에 타들어 가기 전, 검사실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하던 담당자가 익숙하게 기계를 움직였다.
“그럼 바로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전선이 펼쳐진다. 기계에서 뻗어 나온 얇고 긴 전선이 반테온과 델로즈의 머리,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전신을 연결했다.
긴 거리를 걸어오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델로즈가 반테온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럼 작동합니다.”
전원이 들어간 기계의 계기판이 반짝거린다. 거대한 열기와 환기 팬의 윙윙거림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긴 기다림 끝에 매칭 검사실 전광판에 거대한 숫자가 박혔다.
***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책상 위로 던졌다. 아침부터 보기 싫은 기사를 읽었더니 기분이 나쁘다. 반테온이 던진 신문 1면엔 굵은 글씨가 대문짝처럼 박혀 있었다.
[세기의 파트너가 성사됐다. SS급 에스퍼와 에슬란테 가문의 만남. 98.7%라는 기적적인 매칭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