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38)화 (38/112)

#38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진정하기 위해 몸을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혼란한 머릿속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천천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테스트 초반부터 매칭률 판독기의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큰 기계음과 전광판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 숫자를 오랫동안 눈여겨 바라봤다. 숨도 쉴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여러 가지 숫자가 요란하게 오가고, 마침에 삑삑거리는 신호음과 함께 빨간 글자가 전광판에 떠올랐다.

결과는 98.7%.

빨갛게 떠오른 숫자에 모두 말을 잃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다. 아주 오래전, 유아 시절부터 함께 자랐던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률이 93%대를 뚫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숫자였다.

일반적으로 에스퍼와 가이드가 지내는 시간이 길면 매칭률이 올라간다. 첫 테스트 결과가 이렇다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경악스러운 가정에 검사실 내부 사람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경악에 빠졌다. 그 긴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델로즈였다.

“이제 끝난 건가?”

“이, 이게…… 수치가 어떻게…….”

하루에도 수십 번 기계를 작동하는 직원도 결과를 믿지 못해 더듬거리며 손을 떨었다. 평소 점잖은 척하던 센터장의 눈도 커다랗게 떴다.

이 안에서 평온한 건 당사자인 델로즈와 반테온밖에 없었다. 직원이 진정할 기세가 없자 두 사람은 덤덤하게 몸에 붙은 전선을 직접 제거했다.

델로즈의 생각은 모르겠으나 반테온은 이미 높은 수치가 나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높은 수치에 앞으로 번거로워질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델로즈는 무심하게 반테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전에 이야기했잖아.”

“임시 가이드를 하자는 제안?”

“마, 말도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직원이 끼어들었다.

“98%인데 임시 가이드라니요. 당장 정식 매칭을 하고 학회에 보고해야…….”

“건방지게 끼어들지 마라.”

델로즈의 일갈에 입을 다물고 새파랗게 질린 직원이 뒷걸음질 쳤다. 그 앞으로 센터장이 허허 웃으며 다가왔다.

“저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이보다 높은 상대는 찾기 어려울 텐데, 굳이 임시 가이드를 하실 필요 있겠습니까?”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델로즈의 말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센터장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말을 뱉은 델로즈는 손에 쥔 전선을 당장이라도 끊을 듯 힘주어 잡았다. 비싼 기계의 비명에 직원이 놀라며 다가와 선 정리를 시작했다.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 판단한 센터장은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저 늙은이의 조언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이미 델로즈와 이야기를 끝낸 문제입니다.”

“허허허.”

반테온까지 단호하게 거절하자 센터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린다. 사람 좋은 척 웃고 있으나 속으론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반테온은 델로즈에게 잡힐 생각은 결단코 없으니까.

“반테온 님이 아니면 누가 매칭 한단 말입니까.”

“그때 폭주를 막은 가이드의 정체를 알면 그녀에게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요.”

기억력도 좋은 센터장이 그런 일을 잊을 리 없으면서 모르는 척했다. 능구렁이 같은 상대였다.

“그렇게 합의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분이 나타나도 매칭률이 지금보다 더 뛰어날 확률은 낮지 않겠습니까?”

“매칭률이 조금 낮더라도 저보단 여성 가이드가 좋을 겁니다. 그렇지. 델로즈?”

“…….”

재차 들이미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반테온은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반테온이 신경 쓰는 건 센터장의 반응이 아니었다. 델로즈와 반테온이 동의한다면 아무도 그 판단에 제약을 걸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델로즈에게 던진 질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매칭 가이드를 하라는 직원의 말을 잘라낸 걸 보면, 아직은 반테온의 의견에 동의하는 거로 보였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임시 가이드를 하잔 말에 긍정하는 대답도 아니다.

“델로즈.”

“그래.”

한 번 더 재촉하자 델로즈가 무심하게 대답하며 반테온을 바라봤다.

“그 가이드가 나타날 때까지라고 했던가?”

“맞아. 그녀가 나타날 때까지.”

재차 그녀라고 반복하는 말에 델로즈의 눈이 살짝 휘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무언가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원하던 델로즈의 대답이 돌아왔음에도 기분이 어딘가 꺼림칙하다. 분명 반테온의 말에 동의한다는 말인데.

반테온은 그의 의도를 살피려 델로즈를 바라봤다.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에서 건질 만한 건 없었다.

뭐, 상관없었다.

델로즈의 지금 생각이 어떻든, 일단 찬성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렇게 애써 합리화하며 반테온은 서둘러 임시 가이드 서류를 작성했다.

마지막까지 미련이 남은 직원의 애절한 눈빛을 뒤통수에 꽂혔다.

***

여기까지가 어제의 기억이었다. 그 후 오랜만에 들어온 그리운 자신의 방에서 숙면을 취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아까 그 불쾌한 신문 1면 기사였다.

반테온은 평소 잘 피우지 않는 시가를 꺼내 캡을 잘랐다.

시가에 불을 붙인 뒤 천천히 빨아들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붉은 점이 시야에 반짝이고, 알싸하고 몽롱한 연기가 속을 두르고 나왔다.

당분간은 휴가였다. 토벌대에서 구르고 뒹군 보람이 있는 시간이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일정이 비었으니, 그저 편안하게 즐기고 쉬면 되었다.

처음 델로즈의 폭주를 막고 토벌대로 피신 갔을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중간중간 고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된 것인지 몰랐다.

물론 임시 가이드라는 족쇄가 생기고, 끝까지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다.

그래도 이건 시간문제다. 정식 매칭 가이드가 아니니, 델로즈는 정기적으로 다른 가이드들과 매칭 테스트를 해야 한다. 그러다 여성 가이드 중에 가이딩이 가능한 이를 찾는다면, 그 기회만 온다면 바로 족쇄를 넘길 예정이었다.

델로즈의 취향을 생각하면 높은 매칭률보다 여성 가이드를 선택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부터라도 센터장에게 언질을 넣어 최대한 많은 수의 여성 가이드를 테스트에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센터장도 다루기 힘든 반테온보다 자기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는 가이드가 좋을 테니까. 그 계획에 양손을 들고 환영할 것이다.

델로즈에게도 그게 좋은 일이다. 환상 속의 그녀도, 반테온도 잊고 원하던 여성 가이드와 안정적인 여생을 보내면 될 것 아닌가. 델로즈는 센터의 기본 교육을 수료하는 대로 높은 직위를 물려받을 것이고, 새로운 세력의 중심에서 마음껏 즐기고 살 수 있다.

그렇게 델로즈가 새로운 가문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그때는 에슬란테 가문의 핏줄과 그의 가문을 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델로즈는 난폭하고 천박한 부분이 있으나 나름 다정한 면도 있었다. 아픈 사람도 챙길 줄 알고, 능력도 좋았다.

환자라는 이유로 평소에 닿기도 싫어하는 남자를 업고 다닐 정도이니. 나름대로 융통성은 있는 녀석이었다. 아마 자신의 가이드와 자식은 훌륭하게 보호하겠지.

토벌대를 떠나기 전 델로즈의 이야기만 들어도 진절머리내던 과거에 비하면 커다란 변화였다.

여유롭게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던 반테온의 귀에 알림 소리가 들렸다. 드물게 울리는 외선 전화였다.

익숙한 신호 표시를 알아본 반테온은 느긋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야기 들었어. 어떻게 된 거야?]

오랜만에 통화하는 상대는 안부 인사도, 걱정도 없이 용건부터 물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테온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다. 동생아.”

[안부 소식이 너무 과한 거 아냐? 나 마물 잡다 손 미끄러질 뻔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평생 에스퍼는 안 만날 것처럼 하더니 그 정도 파트너를 기다렸던 거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진작 적당한 놈이라도 만들어 둘 걸 후회했단다.”

[하하하. 형이라면 그럴 것 같았어.]

“넌 어떻게 지내?”

[나야 똑같지. 마물 잡고 터트리고 죽이고…… 아, 당장 뛰어가고 싶은데 지금 임무 중이라 갈 수가 없네. 뭐 다른 큰일 생긴 건 아니지?]

큰일은 큰일이긴 했다. 통화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힘든 일이긴 했지. 하지만 임무 중인 동생을 잡고 하소연할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았다. 동생은 S급 에스퍼로 각성하여 왕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항상 어려운 임무에 투입되는 강한 전력이지만, 반테온에겐 언제나 어리고 어설픈 동생이었다.

“조심해서 다녀. 가문에선 뭐라고 안 해?”

[늙으신네들이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겠지. 손에 들어온 SS급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먹을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하면서.]

“넌 어때?”

[나? 내 의견?]

처음부터 차기 가주로 교육받은 사람은 반테온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동생도 어엿한 에슬란테의 직계였다. 가문의 몇몇 순혈주의 장로들은 반테온을 두고 S급으로 각성한 동생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이 자라면서 그런 말은 쏙 들어갔다. 사람이 몸을 쓰면 되는데 왜 힘들게 머리를 써야 하냐는 것이 동생의 인생관이었다. 그 말에 장로들은 모두 반테온이 다음 대 가주를 맡는 것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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