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형 마음대로 해. 마음에 안 들면 때려치우든가. 음, SS급이 무섭긴 한데, 이참에 얼마나 강한지 싸워보지. 뭐.]
“태평하네.”
[설마 가이드의 동생을 해치겠어? 매칭률 98%라면서. 형은 가이드라 와닿지 않을 건데. 그 정도 매칭률이면 에스퍼는 형 발닦개도 할 거야. 신처럼 느껴질 텐데?]
“어디서 에스퍼들은 말 험하게 하는 법 교육도 받는 거야? 너도 그렇고 테아로트도 그렇고…….”
[형이 산골 오지에서 마물만 잡으면서 살아 봐. 말이 곱게 나가는지. 아 테로 형은 잘 지내고 있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덕에 동생도 테아로트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숙한 사이였다. 테아로트의 안부를 묻는 말에 반테온은 잠시 고민했다. 매칭률이 뜨고 센터가 뒤집혔다. 그 후 테아로트에게 연락했으나 아직 단말기에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까진 멀쩡하더라.”
[과연…… 형의 매칭 소식을 듣고도 멀쩡할지 모르겠네.]
“다를 게 뭐 있어. 번거로운 짐 하나 덜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지.”
[그거 알아? 형은 똑똑한 것 같은데 진짜 둔해.]
“둔해도 그게 욕이라는 건 알겠다.”
[하하하. 일단 나 또 임무 가야 해. 그럼 통화 끊을게.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전화나 잘 받든가.”
[노력해볼게!]
임무 중엔 단말기도 두고 다니는 놈이 어떻게 노력한다는 말인지. 해맑게 웃으며 끊긴 동생의 목소리 덕에 오랜만에 순수한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의자에 기대 쉬었던 몸을 일으켰다. 수업도 없는 휴가임에도 약속된 일정이 남아 있었다. 반테온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단말기로 전달된 내용을 읽었다.
오후 2시. 매칭 교육실.
첫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하는 교육이니 꼭 방문해 달라는 정중한 공문이었다. 파트너끼리 함께 받는 수업이니, 또 델로즈와 마주쳐야겠군.
반테온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교육실이라. 20살도 되기 전에 졸업한 곳을 다시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선생이 아니라 학생의 신분으로 갈 줄은 몰랐는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움직였다.
교육실이 보이는 정원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델로즈가 보였다. 그동안 걸쳤던 토벌대 제복을 벗고, 편안한 복장이다. 가슴의 반은 풀어헤친 셔츠에 소매도 대충 묶어놓은 모습이었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꼴이었다. 결국, 저런 녀석과 파트너를 해야 하다니. 반테온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가갈수록 델로즈의 모습이 더 자세하게 보인다.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앞머리 사이로 금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반테온이 눈치챌 거리이니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반테온이 가까워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던 델로즈는 당연하다는 듯 반테온 옆에 서서 걸었다.
인사도, 대화도 없는 침묵이다. 곁눈으로 살펴보자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걸을 뿐이었다. 반테온의 머리에 문뜩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처럼 느끼기는 무슨. 사람을 충전기 수준으로 생각하는 행동인데.
교육실 앞에 적힌 숫자를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도착한 교육 담당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어머, 같이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반테온 에슬란테입니다.”
“저는 요르민 아셀이라고 해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릴게요.”
선생님은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긴 백금발의 여성 가이드였다. 한눈에 봐도 뛰어난 외모에 말투까지 우아하다. 그 모습에 반테온은 속으로 웃었다.
너구리 같은 센터장이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델로즈에게 매칭 테스트해 볼 기회가 남았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이런 선택을 하다니. 평소라면 그 수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나 지금은 고마웠다.
요르민 선생은 반테온과 델로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지금은 저희가 학생이니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매너가 좋으시네요.”
살짝 미소 지으며, 수줍다는 듯 행동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무에게나 그런 건 아닙니다.”
사교성 미소를 지으며 익숙하게 칭찬하자 요르민 선생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반테온은 빠르게 델로즈를 살폈다. 어서 이 아름다운 여성 가이드에게 반응을 보이란 말이다. 속으로 재촉하며 그를 바라보자 델로즈의 시선도 요르민 선생을 향했다.
무기질 같은 눈빛으로 선생의 모습을 위부터 아래까지 천천히 훑는다. 여성을 그렇게 바라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당장 제지하고 싶었으나 못 배운 놈이라 그렇다고 속으로 다독이며 참았다. 당사자인 요르민 선생은 불편한 기색 없이 웃을 뿐이었다.
“두 분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첫 수업부터 함께 오시다니.”
“우연히 앞에서 만났습니다.”
“우연인가요? 그래도 제 눈에…….”
“수업은 몇 번이나 하지?”
무뚝뚝한 음성이 둘 사이를 갈랐다. 처음 꺼낸 말이 수업 내용이라니. 여자가 좋다고 말하면서 호감을 얻는 법은 전혀 모르는 놈이었다. 하긴 지금까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대가 붙는 편한 삶을 살았겠지.
“아, 보통 3회 정도 진행되지만, 두 분은 2회로 짧게 끝낼 거에요. 수업은 처음 계약을 하는 분들이 오는 곳이라 어린 분들 위주로 맞춰져 있으니까요.”
요르민 선생은 수업 자료를 펼쳐서 전체적인 목차를 설명했다. 가볍게 계약의 의미와 지켜야 할 사항, 가이드 횟수를 정하는 법 등. 기본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안 들어도 알 수 있는 상식적인 내용에 긴장이 풀렸다. 그냥 듣고 수료하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될 것 같았다.
교재를 펴고 강의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두 사람의 상황에 맞춰 융통성 있게 내용이 수정되어 있었다. 제법 긴 수업이라서 살짝 흐름이 끊기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수업이었다. 현명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다. 저 짐승 같은 놈에게는 아까운 상대였다.
그래도 델로즈의 배경과 능력은 최상이니까. 만약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된다면, 나름 어울리는 한 쌍이 되지 않을까.
아까의 무관심함은 어디 갔는지, 델로즈는 요르민 선생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쳐다봐서 마치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처음엔 얌전한 척해도 괜찮은 상대 앞에선 다 그렇게 되는 법이니까. 반테온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업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딱 한 차례, 중간에 만나는 횟수를 정할 때만 잠시 분쟁이 있었다.
결국, 다른 사람도 가장 많이 선택한다는 주 2회 정도 만남이 채택됐다. 주 1회면 충분하다는 반테온과 3회는 필요하다는 델로즈의 중간 지점이다.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던 두 사람은 뒤에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별도로 조절할 수 있다는 조건에 겨우 타협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제법 양이 많죠?”
“저희야 듣기만 한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
델로즈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강렬한 눈빛으로 요르민 선생을 바라봤으면 좀 호의적인 인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무게만 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반테온만 답답함에 몰래 가슴 칠 뿐이다.
“다음 수업은 3일 후인가요?”
“네. 다음 가이딩 날짜와 맞췄어요. 시간은 단말기로 전달할게요. 아. 그리고 숙제가 있어요.”
요르민 선생은 바닥에 놓인 보조 가방에서 제법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내 올렸다. 서류 봉투는 스티커까지 붙여 단단하게 밀봉된 상태였다. 앞선 수업 내용을 떠올리면 딱히 따라가기 힘든 부분은 없었다. 굳이 숙제로 주는 내용이 무엇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요르민 선생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양쪽에 하나씩 서류 봉투를 나눠주곤 당부했다.
“일반 학생들은 개인 시청각실에서 수료하지만, 두 분은 각자 개인 공간이 있으시니, 거기서 확인하시면 될 거예요. 꼭 혼자 있을 때 보세요”
“…알겠습니다.”
정체 모를 서류 봉투를 찝찝한 마음으로 받아 들었다. 델로즈도 성의 없는 태도로 대충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을 마친 요르민 선생이 나가고 방에 두 명만 남게 되자 델로즈가 반테온을 바라봤다.
할 말이 있는 듯 용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무거운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반테온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할 말 있어?”
“너는 여자도 좋아하는 건가?”
예상도 못 한 질문이 떨어진다. 교육받는 내내 조용하더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실 반테온에겐 성별은 크게 상관없었다. 좀 더 유혹이 쉽고, 충동에 약한 남자 에스퍼들을 꼬셨을 뿐. 그것이 성별의 문제는 아니었다.
“크게 상관하지 않지.”
“……그렇군.”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온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센터에 오니 얼굴이 좋아.”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니까?”
낯선 곳을 떠돌 때보다 얼굴이 좋은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이어지자 반테온은 말은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는 델로즈를 두고 숙제를 챙겨 일어났다.
떠나기 전, 델로즈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한 명 때문에 수업에 차질이 생기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 다음에도 시간 맞춰서 오도록 해.”
“그래.”
“숙제 제대로 확인해. 대충 넘기지 말고.”
건성으로 돌아온 대답에 한 번 더 상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