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예전 대리 수업했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델로즈는 학업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긍정의 대답을 들었어도 숙제를 열심히 할 거라 믿기 어려웠다.
“요르민 선생이 넘어가도 내가 확인할 테니까.”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델로즈가 가진 배경에 눌려 제대로 지적하기도 힘들다. 괜히 선생님에게 무거운 짐을 넘겨드릴 생각은 없으니 자신이라도 제대로 검사하리라 마음먹었다.
매칭에 관한 수업을 소홀히 하여 델로즈가 실수하면 손해 보는 건 반테온이니까.
델로즈의 준비 부족으로 수업이 길어지거나, 피해를 보게 된다면 단단히 한 소리 하겠다 다짐하며 교육실을 나섰다.
***
반테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숙제 서류를 풀었다. 서류 안에는 책과 홀로그램으로 재생되는 시청각 자료가 들어 있었다.
책의 두께는 얇았다. 몇 시간 걸릴지 파악하며 익숙하게 프로그램을 켜고 재생했다. 네모 납작한 물건에서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올라오고 에스퍼 센터의 로고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홀로그램이 로딩되는 동안 반테온은 책을 펼쳤다. 표지를 넘기고, 첫 번째 페이지를 지나 목차가 적힌 페이지를 보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굳었다.
“이게…….”
경악에 찬 목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바쁘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1. 가이드와 에스퍼의 접촉 부위에 따른 효율성
2. 잠자리 매너와 안전수칙
3. 바람직한 체위와 자세에 관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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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테온은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설마 센터의 교육이 포르노도 아니고, 이런 걸 학생에게 전해줄 리가 없다. 그저 형식 갖추기 식으로 정리해 둔 것이겠지.
잠시 후, 반테온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몇 페이지 넘기자 차마 읽기 힘든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내용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살색 가득한 그림과 노골적인 묘사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충격에 헤매는 반테온의 귀에 얇고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으흣… 응… 아아…….”
간드러진 목소리와 숨이 넘어가는 헐떡거림. 그리고 살가죽이 격하게 맞닿는 적나라한 질척거림까지.
조금 전, 미리 틀어놓은 홀로그램 안에선 이름 모를 두 남자의 살색 가득한 동작이 펼쳐지고 있었다.
“흐…아…!”
젖은 신음을 내며 자지러지는 모습에 황급히 손으로 화면을 가렸지만, 그런다고 홀로그램이 멈출 리 없다. 잠시 혼란한 손짓으로 더듬거려 겨우 전원을 눌렀다. 그제야 방 안을 채운 살색 향연이 꺼졌다.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진정, 아니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괜히 반쯤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매끈한 찻잔을 쓰다듬는다. 센터에서 줬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이런 행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갓 성에 눈을 뜬 애송이도 아니까.
조금씩 진정되고 호흡이 돌아온다. 그래 매칭을 하면 혹시나 모를 사태에도 대비해야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교육을 센터 밖에서 잘못 배우는 것도 문제니까. 그러니 별것 아니…….
‘숙제 제대로 확인해. 대충 넘기지 말고.’
그제야 조금 전 자신이 델로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대체 자신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일까.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던 테아로트의 말이 절실하게 공감된다.
반테온은 자신의 가벼운 입과 혓바닥을 저주하며 테이블에 그대로 고개를 묻었다. 비어있는 찻잔이 푹신한 카펫에 떨어지고, 반테온을 놀리듯 우아하게 구르며 멀어졌다.
***
원치 않는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다가온다. 반테온은 내키지 않는 손짓으로 옷차림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깔끔하게 빗은 머리와 안경까지 착용하자 언제나 같은 단정한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평소 볼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이 눈 아래 드리우고 있었다. 그 원흉은 망할 홀로그램이다.
델로즈에게 제대로 확인하라고 엄포를 해놓고 본인이 외면할 순 없어 고집스럽게 끝까지 확인했다.
시작부터 반테온의 혼을 빼놨던 홀로그램은 시간일 갈수록 가관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반테온도 성에 고루한 편은 아니다. 적당한 때마다 파트너를 바꿔가며 즐기는 편이고, 사람의 관계에서 즐겁기만 하면 도덕적 장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구의 사용법과 이런 것까지 알려주나 싶은 자세한 묘사엔 몇 번이고 교육을 중단하고 싶었다. 센터 교육에서 그렇게 적나라하게 자료를 제공할 줄이야.
그걸 델로즈도 봤다는 생각을 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남자와 가이딩 하는 것도 거부감을 느끼는 상대가 남자끼리 온갖 체위로 즐기는 영상을 봤으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정말 가기 싫어도 가야 했다. 오늘따라 목을 감싼 옷깃이 갑갑하게 느껴져서 손가락으로 당겨 느슨하게 만들고 느린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교육실 근처에 도착하자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상대가 서 있었다. 미리 교육실에 들어가 있으면 될 걸 왜 매번 밖에서 기다리는 것일까. 그렇다고 살갑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오늘따라 유독 얼굴을 보기 싫은 상대의 마중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
숙제에 관해선 먼저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기에 반테온은 조용히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델로즈도 아무 말 없이 옆에 붙어 걸었다.
민망한 상황을 모른 척하는 눈치가 생긴 것일까. 화를 내거나 비꼴 거란 태도와 다르게 얌전한 모습에 잔뜩 긴장했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래, 델로즈에게도 재난 같은 숙제였겠지. 먼저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반테온은 애써 태연한 척 교육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도 같이 오셨네요.”
요르민 선생이 웃으며 맞아 준다. 전에 봤던 모습처럼 우아한 미소에, 주름 하나 가지 않은 완벽한 복장이다. 그때와 같은 모습이지만, 오늘의 감상은 조금 다르다.
이렇게 웃는 얼굴로 그 휘황찬란한 홀로그램을 쥐여 줬지. 얼굴을 보고 사람을 믿으면 안 되었다.
“숙제는 다 하셨나요?”
“……네.”
“조금 놀라셨죠?”
반테온은 애써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요르민 선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환한 얼굴로 새로운 교재를 꺼냈다. 혹시나 그 숙제와 같은 내용이면 어쩔까 하는 걱정과 달리 교재에는 상식적이고 가벼운 내용이 나열되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안도의 한숨이 작게 새어 나갔다. 그 반응에 요르민 선생이 웃었다.
“남자끼리 파트너 할 경우엔, 아무래도 챙겨야 할 부분이 더 많으니까요. 조금 내용이 많아요.”
악취미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장편 포르노에 관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챙겨야 할 부분과 30가지 체위를 담은 홀로그램의 상관관계를 도저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간단한 성 지식이 아니라 반테온도 생전 처음 듣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초에 델로즈와 접촉할 생각이 없는 반테온과 여자만 만나던 델로즈에겐 전혀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혹시 파트너의 성별이 바뀌면 새로 들어야 하는 겁니까?”
“교육을 들을 필욘 없으세요. 홀로그램은 신청하면 추가로 보내드린답니다.”
그 질문에 델로즈의 시선이 반테온을 향했다. 나중에 여자 가이드를 만날지 모를 그를 대신하여 물어봐 준 건데, 왜 저렇게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르민 선생은 교재를 펴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두 분은 임시 계약이니 그렇게 깊은 접촉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절차상 드린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수업을 시작할게요.”
그렇게 시작된 수업은 전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조금 더 심화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고, 임무나 전투 시 필요한 사항에 관해 설명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반테온의 긴장이 풀렸다. 수업 내용도 그 비정상적인 숙제와 다르게 유용했고, 걱정과 다르게 델로즈도 딱히 관련해서 티를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2시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수업이 모두 끝났다. 이걸로 임시 가이딩에 관련한 교육은 끝났다며 요르민 선생은 단말기에 이수 완료를 체크했다.
“맞다. 두 분 위치 추적기는 신청하실 건가요?”
“그게 뭐죠?”
“보통 매칭 파트너들이 서로의 위치와 상태를 체크 하기 위해 소지하는 물품인데요. 두 분은 임시라고 해도 단독 매칭이니 신청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요.”
말이 좋아 파트너를 확인하는 장치지, 감시를 위한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설명을 들은 반테온의 미간이 깊어졌다.
“그럼 신청하…….”
“아뇨. 필요 없습니다.”
긍정하려는 델로즈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웃는 낯으로 몸을 돌려 요르민 선생을 바라봤다.
“어차피 전 센터 내부에만 있을 테니 괜찮을 겁니다.”
“하긴 델로즈 님이 파견 가셔도 반테온 님은 센터에 대기하길 원한다고 하셨죠?”
델로즈는 요르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반테온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매칭 가이드가 없는 델로즈가 임무를 나가면 임시 가이드인 반테온이 동행해야 했다. 지금까지 임무에 파견되지 않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부분을 미리 상부와 델로즈가 합의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