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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42)화 (42/112)

#42

아주 작은 차이로 반테온이 대충 가이딩 하는 척 움직이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러면 좋겠네. 그럼 이 귀찮은 의무도 안 채우고 필요할 때만 하면 될 텐데.”

의뭉스럽게 대답하며 대화를 돌렸다. 반테온의 비밀을 아는 건 동생과 테아로트 정도. 어딘가 새어 나갈 곳도 없는 믿을만한 사람들이다. 델로즈에게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라서 다행이군.”

반테온은 의심을 거둔 듯한 델로즈의 태도에 안도하며 손을 거뒀다. 오늘 할당량을 끝냈으니 당분간 볼 일은 없겠지.

델로즈가 마지막까지 꼭 쥐고 있던 새끼손가락을 놔주자, 반테온은 미리 챙긴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델로즈는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뚫어지게 손을 응시하는 시선이다.

“필요해?”

“뭘?”

“손수건.”

반테온에겐 필수품이지만, 델로즈가 손수건 같은 걸 섬세하게 챙길 성품 같지 않으니, 선심 쓰듯 여분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긴 서로 맞닿은 손이 불쾌한 건 저쪽도 같을 테지.

델로즈는 잘 개어진 하얀 새 손수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반테온이 이미 썼던 손수건을 잡아챘다.

“이거면 돼.”

“썼던 거야.”

“이게 더 예쁘군.”

미적 감각이 존재하는 놈이었나. 주제에 보는 눈은 있는지 둘 중 더 비싸고 질이 좋은 손수건을 골랐다. 금액보단 희소성 때문에 더 아끼던 손수건을 아쉽게 떠나보냈다.

섬세한 자수가 들어간 손수건을 쥔 모습이 우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델로즈의 손에 쥐어진 얇은 천은 두꺼운 손가락과 묘하게 어울렸다. 센터에 있던 기간 동안 기존의 촌티가 많이 벗겨진 것 같았다.

반테온은 새삼 델로즈의 모습을 자세하게 뜯어봤다.

처음 센터에 왔을 때, 그를 야성적이다 멋있다 판단하던 말에 단 1%도 공감하지 못했으나 요즘은 제법 가꿔진 느낌이 났다.

여전히 복장은 제멋대로 풀어 헤쳐 입긴 하지만.

외모 외에도 바뀐 것이 많았다.

처음 델로즈라는 상대를 알았을 때, 그는 상종하기 싫은 무례함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특히 숙제라는 이름의 포르노를 본 후 이죽거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깜깜했다. 앞으로 이런 날이 이어지면 어떻게 버틸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델로즈는 그에 관련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답인 걸까. 그의 거친 언사에 반테온도 조금씩 적응했고 델로즈도 나름의 예의는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만날 때마다 기분이 상하던 불쾌한 상황도 3번에 한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다만 홀로그램 수업을 듣고 접촉이 많을수록 가이딩 효율이 높다고 학습한 뒤론 미세하게 스킨십이 늘어났다. 꼭 깍지를 끼고 가이딩을 한다든가, 묘하게 가까이 앉는 행동을 한다든가.

남자와 닿기도 싫어하던 녀석이 꾸역꾸역 센터 교육을 듣고 있다니, 남의 말 따위 귓등으로도 안 듣던 델로즈인데, 그런 모습이 의외이긴 했다.

그런 태도가 가상하여 반테온은 선심을 쓰듯 델로즈에게 말했다.

“센터 요구가 부담스러우면 적당히 어겨도 괜찮아.”

“무슨 말이지?”

“억지로 닿아서 가이딩 할 필요 없다고. 어차피 남자 싫어하는 건 나도 잘 아니까 적당히 시늉만 해도 말 맞춰 줄게. 급할 때만 가이딩 해도 괜찮아.”

반테온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델로즈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묘한 표정으로 반테온을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많이 참고 있어.”

“그러니까 참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잖아.”

“…….”

기분 탓일까. 바라보는 눈빛이 더 가라앉았다. 괜한 간섭을 한다고 기분이 상한 걸지도 몰랐다.

“내가 안 참으면 곤란한 건 너야.”

뭐가 곤란해진다는 것일까. 생각과 다른 반응에 델로즈를 살펴봤다. 세상 편한 대로 사는 델로즈가 참을 일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찌푸려진 얼굴에 서린 묘한 감정을 보며 확신했다.

지금도 반테온이 남자 가이드인 걸 겨우 참고 있으니 도발하지 말라는 의미겠지. 나름 평화롭던 분위기가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생각해줘서 이야기해도 이러니…….’

괜히 생각해서 챙긴 보람도 없다.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기분만 상한 반테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옷을 챙겼다.

“그래. 참아줘서 고맙네.”

“…….”

델로즈 말대로 참고 있을 때 빨리 멀어져야지. 저 감정 기복 심한 녀석이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반테온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행동에 델로즈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요즘은… 정원에서 산책하지 않는 건가?”

예상도 못 한 말이 발걸음을 잡는다.

반테온은 종종 정해진 루트로 산책을 즐기곤 했다. 최근엔 소문도 시끄럽고 시선도 따가워 나간 적이 없었다. 한동안 서재와 방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어디선가 그 소식을 들었나 보다.

“피곤해서.”

“몸이라도 아픈 건가?”

“그냥 귀찮을 뿐이야.”

“흠…….”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기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

홀로 방에 남은 델로즈는 턱을 괴고 몸을 숙였다. 큰 체구가 위협적으로 가라앉는다. 고요하게, 차분하던 방금의 모습과 다르게 짙은 무게감이 방을 채웠다.

닫힌 문 너머로 규칙적으로 멀어지는 소리가 점점 아득해졌다.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리다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참은 숨을 내뱉었다.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것이 또 없었다.

손에 쥔 손수건을 문지르자 얇은 천이 손가락 사이에서 끊어진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끊어지고 망가지니, 어찌 다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당기면 끊어질 것 같고 밀자니 쓰러질 것 같다.

델로즈는 자신의 인내심이 크지 않음을 알고 있다.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남에게 맡기기엔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태다.

번거롭고 거슬리고 신경 쓰이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굴면 안 된다.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망가지면 미련 없이 버리고 살았다. 그런 삶이 익숙하다고 하여 그리 행동하면…….

머릿속에 떠오른 미래에 미간 사이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

“선생님!”

멀리서 케슬란이 손을 흔들며 뛰어온다. 토벌대에서 본 이후 처음 마주치는 것이었다. 가까워질수록 울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예요. 선생님? 그 야만인이랑 매칭 했다는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자식 남자는 안된다면서요!”

가까워지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내던 케슬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게. 모두 반테온이 되묻고 싶은 말이었다.

조금 진정한 케슬란이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진짜로 매칭 했어요?”

“임시 가이드 매칭일 뿐이야.”

“그럴 줄 알았어…… 그 자식이 그럴 줄 알았다고!”

케슬란은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에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그 모습이 귀여우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델로즈와 반테온이 매칭 할 줄 알았다는 말투였다.

케슬란은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반테온에게 말했다. 폐광으로 파견될 타이밍에 발목이 부러져 급하게 센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천막에서 만난 다음 날 그놈이 고의로 제 다리를 부러트렸다니까요? 실수인 척 부딪혔는데 다리가 부러진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긴 했다. A급 에스퍼가 단순히 부딪혔다고 다리가 부러지다니. 그러나 델로즈가 성격이 더러워도 이유도 없이 한참 어린애 다리를 부러트릴 이유는 없었다.

실수 아닐까. 워낙 힘 조절 못 하는 놈이니 그랬을지도 몰랐다.

“설마. 널 다치게 할 이유가 없잖아.”

“다 선생님을 노려서 그런 거죠. 천막에서 날 세울 때부터 알아봤어요.”

얼굴이 붉어지도록 분개하는 케슬란을 다독였다.

“그때 화낸 건 남자 둘이 붙어 있는 걸 보기 싫어서 그런 거야.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는 녀석이 날 노릴 리가 없잖아.”

한두 명도 아니다. 센터 입소 이후 매일같이 상대를 바꿨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매칭률만 아니면 엮일 일도 없을 상대야.”

반테온의 단호한 말에 케슬란이 고개를 들어 말간 갈색 눈동자로 그를 올곧이 바라봤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살펴보는 듯 집요하게 반테온과 눈을 맞췄다.

“그럼 얼마 전에 숙소 정원에서 난리 난 건 왜죠? 이상하다…… 분명 선생님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반테온이 정원에 발길을 끊은 지 시간이 제법 흘렀고, 종종 소문을 전해주던 테아로트도 센터에 없었다.

문뜩 만난 지 오래된 테아로트가 떠올랐다. 오늘로 벌써 3주째다.

테아로트는 센터로 돌아온 직후 마물이 습격한 마을에 긴급 보수 작업을 자청했다. 반테온 때문에 2번 연속 장기 임무를 다녀왔으니 쉬어도 되는데, 굳이 자원하여 센터를 떠났다. 종종 임무 중에 연락이 닿지 않은 적은 있어도 단말기 연락까지 끊긴 건 처음이다.

귀찮을 정도로 먼저 연락 오던 테아로트였기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하는 고민도 종종 들었다.

센터에서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없는 것이겠지. 단순한 복구이니 위험할 일도 없을 테고…….

“선생님?”

“응?”

잠시 테아로트 생각에 빠져 대답을 잊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하는 케슬란에게 웃으며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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