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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에스퍼를 피하는 방법 (43)화 (43/112)

#43

“아냐. 잠시 다른 생각이 들어서. 무슨 일이라고 했어?”

“정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어?”

“역시 모르셨군요.”

케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잘거렸다.

“정원에서 선생님 이야기를 하던…… 아니 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런 무리가 있었거든요.”

종종 반테온 뒤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한둘이 아니기에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델로즈가 걔들을 완전히 쓸어버렸어요. 두 명은 복귀할 수 없는 수준이래요.”

케슬란은 손짓을 동원하여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가십에 관심이 많던 무리 중 유독 헛소문을 퍼트리던 자들이라고 했다. 평소처럼 에슬란테가 수완이 좋다며 감탄을 빙자한 뒷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원래 외부엔 발걸음도 하지 않았던 델로즈가 그날따라 정원을 돌아다니더니 멀리서 이야기하던 무리를 사정없이 밟았다는 이야기다. 능력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때리고 밟아서 중태에 빠트렸다는 말을 하며 케슬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 귀신 같은 청력을 생각하면 멀리 있어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겠지.

“선생님과 정식 매칭을 노리는 게 분명하다니까요. 아니면 남의 이야기에 그렇게 예민하게 굴 리 없잖아요.”

“그건…… 아닐지도 몰라.”

케슬란의 이야기를 듣자 기시감이 떠오른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반테온의 일로 델로즈가 나서서 사람을 정리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광산에서 떨어져 여관에 묵을 때였다.

무례한 취객들이 델로즈가 남자를 사서 데려간다며 비웃던 것에 분노했었지. 이번 일도 그때와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남자 가이드와 엮였다는 이야기가 불편해서 응징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설명하자 케슬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이에요? 선생님도 아무 관계도 아닌 거죠? 단순히 계약만 한 거죠?”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앞으로도 그럴 거야.”

표정이 부드러워진 케슬란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거렸다. 결 좋은 갈색 곱슬머리가 그 행동에 따라 찰랑거린다. 이끌리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케슬란이 헤실헤실 웃으며 반테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이 기울 정도로 강하게 당기더니, 그대로 반테온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쪽 소리 나게 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선생님이 흔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 녀석이 선생님 취향이 아닌 건 알지만, 신경 쓰였다고요.”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붙는 아이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케슬란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접촉해온 적은 없었다. 나이에 맞게 서투른 호감 표현이 싫지 않았다. 기특하다는 손짓으로 케슬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케슬란에게 보답하듯 그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이니 이 정도 접촉은 괜찮겠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헤헤.”

말간 뺨이 기분 좋게 발개진다. 반테온 취향이 델로즈가 아닐뿐더러, 델로즈도 반테온을 억지로 참고 있으니 이 아이가 걱정하는 일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안심시키며 오랜만에 만난 케슬란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먼 곳에서, 반테온은 볼 수 없이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

맑았던 오후와 다르게 저녁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덤불 위로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점차 굵어져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치자 창틀을 때리는 요란한 물소리가 가득 찼다. 몸을 씻고 나온 반테온이 향초를 켰다. 아직 이른 저녁임에도 하늘을 덮은 먹구름 때문에 밤처럼 사방이 깜깜하다.

부드러운 향이 가득한 방을 잠시 거닐다 의자에 앉았다. 홍차라도 끓일까 싶어 주전자에 손을 뻗는데 문밖에서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십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반테온의 방에 손님이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급한 일이 있을 때 테아로트 정도였다.

혹시 계속 연락이 없던 테아로트가 몰래 찾아와 장난치는 것 아닐까? 장난을 치려고 단말기 연락을 무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테아로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멈춘다. 역시 테아로트였나보다. 다 큰 녀석이 공을 들여 이런 장난을 치다니. 한 소리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벽, 아니, 사람의 가슴팍이 보였다. 테아로트가 크긴 하지만 이렇게 크진 않은…….

“그놈과 밤에도 종종 지내나 보군.”

“대체 무슨 일이야?”

낮에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한 상대가 자신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습관처럼 델로즈의 주변을 살피자 평소처럼 안정된 기운이 보인다. 가이딩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일지 모르겠다.

이해 못 할 행동에 반테온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행동에 델로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에스퍼가 허락 없이 가이드 동에 오면 안 되는 거 몰라?”

“그런 규칙도 있었군.”

“정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까. 한심함에 따지려던 반테온의 귀에 작은 소음이 들렸다. 멀리서 누군가 복도를 걷는 소리였다. 이대로 가다간 밤 중에 반테온을 찾아온 델로즈를 발견할 것이다. 내일이 되면 센터에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반테온은 델로즈를 끌어당겨 방에 들인 후 문을 닫았다. 방금까지 기분 좋은 향이 가득하던 방이 불편한 존재감으로 가득 찼다.

“저 사람이 지나가면 조용히 나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왜?”

질문하는 델로즈를 바라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일까. 아니면 반테온을 열 받게 하려고 빈정대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고 오해하면 곤란하잖아.”

“무슨 상관이지? 다른 사람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주변 시선을 자신보다 더 무시하는 델로즈에게 저런 말을 듣자 부아가 치민다. 그의 말대로 반테온이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 써서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소문도 아니고 델로즈와 엮여서 소문이 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다. 델로즈의 입장도 반테온과 같을 것이다.

“남 이야기처럼 말하지 마. 남자 방을 몰래 찾았다는 말이 나오면, 기분 나쁜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상관없어.”

“뭐?”

델로즈는 자신의 평판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내 가이드를 찾아갔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 거지?”

“이게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자꾸 내 가이드라고 칭하는데, 이건 확실히 해두자. 나는 네 가이드가 아니고, 네 가이드가 될 일도 없어. 잊고 있나 본데, 임시 매칭의 의미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야.”

“…….”

“너 말고 다른 에스퍼도 맡을 수 있단 말이지.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을 물건처럼 말하는 건 큰 실례야.”

이런 걸 하나하나 짚어줘야 할까. 기본적인 사항을 읊는 반테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델로즈의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반테온이 한 말 중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진 몰라도, 불편한 표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가이드 동은 외부 사람 출입 금지야. 정식으로 허가받은 연인이라면 몰라도.”

“그럼 하면 되겠군.”

“뭐?”

“정식 매칭이든, 연인이든 상관없으니 하잔 말이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진지하게 하는 것일까. 반테온은 어이없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술이라도 마셨어?”

“아니 아주 멀쩡해.”

델로즈는 힘껏 밀어내는 반테온 앞에 벽처럼 버티고 섰다. 위압적인 행동이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힘을 쓰는 모습에 몸이 경직되었다. 그동안 델로즈는 힘의 우위에 있어도 반테온에게 강압적으로 군적은 없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행동은 아니었어도 반테온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기에 방심하고 있었다. 반테온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한 번 더 물어도 델로즈에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스스로 말한 내용에 본인도 혼란스러운지 일렁이는 눈동자로 곧바르게 응시할 뿐이다.

예의를 지키며 사람대접하는 것도 말이 통해야지. 참기 어려울 만큼 치솟는 짜증에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네.”

“싫어하는 짓이라.”

반테온은 앞을 지키고 선 델로즈를 밀었다. 잠시 흔들린 틈에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단말기에 닿기도 전에 거대한 손아귀에 손목이 잡혀 위로 들렸다. 델로즈가 반테온의 하얀 손목을 그대로 쥐어 당겼다.

“너는 이런 걸 좋아했었지?”

눈앞까지 다가온 델로즈의 고개가 그대로 반테온의 옆으로 다가왔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나 하던 반테온의 눈이 경악스럽게 벌어졌다.

서서히 다가온 델로즈가 반테온의 양팔을 결박한 상태에서 그대로 그의 오른뺨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뜨겁고 부드러운 촉감이 뺨에 닿는다.

놀란 반테온이 몸부림쳐도 델로즈의 손에서 힘이 빠질 기미가 없었다. 반테온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얼굴이 흔들리자 불편했는지 델로즈는 뺨에 머물렀던 입술을 내려 반테온의 목에 묻었다. 축축하고 옅은 호흡에 목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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